태종의 연비와 불효 뜸 화상흉터치료

in #kr7 years ago

새 왕조를 연 태조 이단은 즉위 한 달 만에 수도를 옮길 결심을 했다. 처음에는 나라 이름도 고치지 않고 수도도 그대로 개경으로 할 생각이었으나 무슨 까닭에서인지 천도를 결심, 후보지를 고르기 시작했다. 백성의 생활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큰 역사를 벌임은 옳지 않다는 천도 반대론을 물리치고 재위 3년(1394년) 8월 태조는 마침내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새 수도의 도시 계획을 구상, 천도를 명령했다.
처음 후보지로 지목된 곳은 계룡산이었으나 하륜이 계룡산은 땅이 좁고 토지가 비옥하지 않으며 금강과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를 들어 천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계룡산 대신 하륜이 거론한 무악(지금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 일대)은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하여 나라를 다스려왔고, 동향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정도전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다음날, 태조는 왕사 무학, 정도전, 하륜 등과 함께 새 도읍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곳은 바로 고려의 남경 터였다.
《연려실기술》에는 한양을 새로운 왕조의 수도로 추천한 것은 승려 무학으로, 삼각산에 이어 목멱산(木覓山)을 거쳐 백악산 아래의 땅(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에 도착한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백악산과 남산으로 좌우 용호(龍虎)를 삼는 이곳을 궁궐터로 정하고 태조에게 아뢰었다. 무학은 이곳이 적당하다고 생각했지만, 한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가다가 "이놈의 소! 미련하기가 무학과 꼭 같구나. 바른 길을 버리고 굽은 길을 찾아가다니, 이럇!"라고 소리질렀다고 한다. 무학은 노인을 쫓아가 길지를 알려달라고 간청했고, 노인은 "여기서 서쪽으로 십리를 더 가면 알 일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무학은 그대로 태조에게 길지를 보고하였고 정도전 등이 찬성하자, 태조는 그곳으로 도읍지를 정했다. 그곳이 북악산 밑, 경복궁 자리였다고 한다. 하지만 실록에는 태조 본인이 한양으로의 천도를 결정한 주체였다고 되어 있다. 새 도읍지 한양이 '조운이 잘 통하고 사방의 이수도 고르니 사람들에게 편리하다.'는 이유였다.
10월 태조는 각 관청당 2명씩만 남겨두고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을 출발, 한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새 수도의 이름을 한성부로 고쳤다. 12월부터 본격적인 역사에 들어갔다. 이는 왕씨의 본거지인 개경을 버리고 한양(漢陽)으로 천도하여 도성을 신축하는 등으로 국가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재위 4년(1395년)에는 도성축조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 성을 쌓기 위한 기초측량을 하게 했다. 총책임자는 정도전을 임명했다. 태조 5년(1396년) 쌓기 시작한 한양 성곽은 1년여 만에 완성되었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 이단(이성계)은 명나라로 가서 국명을 지어주길 부탁했다. '화령'과 '조선'중 하나로 이름을 지어주길 부탁하자 명의 홍무제는 국명을 조선으로 최종 결정하였다. 이는 단군 이래로 내려오는 우리 역사에서 나라의 이름을 중국에 정해달라고 부탁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고, 이 일 때문에 태조 이단은 자주적인 태도를 버렸다는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논공행상으로 창업에 공을 세운 이에게 개국공신의 호를 주고 전지(田地)와 노비를 내리어 왕권을 튼튼히 하였으며 관제(官制)를 비롯한 국가의 시설을 정비하고 정도전 등으로 하여금 《조선경국전》,《경제육전》등을 찬집(纂輯)하게 하여 반포하는 등 여러 가지 정책에 힘썼다.
태조에게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와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두 왕자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을 몹시 사랑하여 세자로 책봉했다. 한편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한씨 소생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의 불만이 갈수록 쌓여갔다. 이방원은 정도전 일파가 방석을 끼고 자신들을 해치려 한다는 이유를 들어 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일파와 강씨 소생 왕자들을 살해했다.
태조(太祖)는 이 사건에 몹시 상심하여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정종(定宗)마저 2년간의 재위기간동안 동생 이방원에 의해 좌지우지되어 힘이 없어지고 동생 이방원의 힘이 갈수록 세지자 방원(태종)을 왕세자에 책봉하고 개경으로 다시 천도를 하자 왕세자였던 이방원이 이를 구실로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9개월 뒤인 음력 11월 13일에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마침내 이방원(태종)이 왕이 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자 성석린(成石璘)을 보내 서울로 모셔 왔다. 그러나 1402년(태종 2년)에 다시 함경도로 들어간 채 돌아오지 않으므로 태종이 차사(差使)를 보내어 돌아오기를 권유하니, 차사(差使)마저 돌려보내지 않고 활에 화살을 넣고 족족 오는 차사마다 죽였다는 전설이 있어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났다. 뒤에 무학대사가 가서 겨우 서울로 오게 하였다.
1401년 한성부로 돌아온 태조는 태상왕으로 7년을 더 살며 염불삼매로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1408년 음력 5월 24일에 지병으로 있던 중풍이 악화되어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다.
태조어진.jpg
이때 태종이 의관 김완을 보내 문안하게 했는데, 태조는 온천욕 덕분에 병에 차도가 있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면서 자주 사람을 보내면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칠 수 있으니 문안을 자제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다 74세의 쇠약한 몸으로 중풍을 맞은 태조는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이미 68세 때 처음 풍병(風病)을 앓은 적이 있었지만 그때와는 모든 상황이 달랐다. 병마를 이기고자 요양을 하고, 죄수를 석방하고, 성황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등의 방법까지 썼지만 아무런 효험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 태조가 병환에 시달리자 태종은 쾌유를 빌기 위해 팔뚝에 燃臂연비를 하기도 했다. 연비는 팔뚝에 명주실을 놓고 태우는 것으로 중생을 병에서 구제하는 약사 보살에게 빌어 환자를 낫게 하려는 일종의 불교의식이다.
상왕 정종도 밤새도록 불상 앞에 꿇어앉아 12주나 팔뚝을 지졌다.
태조의 병세는 쉽게 호전되지 못했고 임종하는 날 당일에는 가래가 많이 끓는다고 소합향원을 먹게 했다. 또한 병세의 위독함에 태종이 가져온 청심원을 급히 복용하게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태조는 병상에 누운 지 4개월만에 생을 마감한다.
조선왕들의 생로병사, 강영민 지음, BF북스 26-27

《법화경法華經》 중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서도 몸을 태워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을 찬탄하는 내용이 나온다.

若有發心, 欲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
약유발심, 욕득아누다라삼먁삼보리자,
만약 마음을 내어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는 자라면

能燃頭指, 乃至足一指, 供養佛塔,
능연두지, 내지족일지, 공양불탑,
머리와 손가락 내지 발가락 하나를 태워 부처님과 탑에 공양할 수 있어야 하니

勝于國城妻子, 及三千大千國土, 山森河池, 諸珍寶物, 而供養者.
승우국성처자, 급삼천대천국토, 산삼하지, 제진보물, 이공양자,
이것이 나라나 마을이나 처자나 삼천대천국토나 산하와 여러 보물보다 나은 공양이니라.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고행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행방식에서 유래하는 것인데, 부처님은 겁의 세월을 거치는 보살도를 수행할 때, 여러 가지 종류의 몸을 버리는 공양과 목숨을 구해주는 공양을 실천했던 바, 예를 들어 나찰 악귀에게 게송 한 구절을 듣기 위해 두려움 없이 몸을 던져 먹이가 되었고, 눈 덮인 산에서 굶주린 호랑이를 만났을 때도 젖을 먹지 못하는 어린 새끼호랑이를 위해 몸을 던져 호랑이의 먹이가 되었는데, 이러한 보살행의 실천이 바탕이 되어 ‘難行能行, 難忍能忍(하기 어려운 것을 능히 하고,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아내다)’이라는 보살정신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고행 그 자체는 신의 뜻에 따라 하는 고행과 다르며, 산 사람의 몸을 바치는 제천의 의미와도 같지 않다. 중국에서 전하는 《고승전高僧傳》에는 「망신편忘身篇」과 「유신편遺身篇」이 있어서 몸을 던져 수행한 고승들의 사례를 수집해두고 있는데, 소신공양은 자기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아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큰 결심과 인내가 필요할 때 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불교 수행의 바른 법은 역시 인간의 보편적인 윤리와 상식에 어긋나지 않는 방법에 기초한 것이라야 할 것이다.

손가락을 태우는 연지燃指(소지燒指) 공양의 예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례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마 위쪽 정수리에 향으로 태운 흔적을 남기는 연정燃頂은 타이완臺灣을 제외하고는 다른 나라에서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없고, 경전에서도 그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타이완에서 시행되고 있는 연정은 12개, 9개, 6개, 3개, 1개 등으로 다양하지만 그 각각의 대의에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서 타이완 불교계 안에서도 연정공양의 지속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다고 한다.

불가에서 말하는 연정, 연비, 연지 등 소신공양의 동기와 의의를 정리해보자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연비3.jpg

  1. 破相之義: 상相을 부수는 뜻이 있다.
  2. 警策之義: 경책의 뜻이 있다.
  3. 供養之義: 공양의 뜻이 있다
  4. 發願之義: 발원의 뜻이 있다.
  5. 精進之義: 정진(Skt. virya)의 뜻이 있다.
  6. 自度度人之義: 자기와 다른 사람을 함께 제도하는 뜻이 있다.
  7. 證佛道之義: 부처님 가르침을 증명하는 뜻이 있다.
    (원문출처: 地藏孝親網)

아무튼 연비는 화상을 입히는 것인데 연비를 하면 화상흉터가 남을 수 있다. 또 불에 데인 통증이 있다. 화상흉터는 일반적으로 본인이 만든 것보다 화재, 불장난, 끓는물, 뜸치료등으로 발생한다. 강남역 4번출구 www.imagediet.co.kr 자향미한의원에서는 화상흉터침인 BT침을 사용해 화상흉터를 치료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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