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때 일본에 초기에 밀린 이유 제승방략과 블록체인 기술의 중요성

in #kr8 years ago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이순신이 경상도로 출전하기에 앞서서 조정에 올린 장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전략) 그래서 수군에 소속된 방답·사도·여도·발포·녹도 등 5개 진포의 전선만으로는 세력이 매우 외롭고 약하기 때문에 수군이 편성되어 있는 순천·광양·낙안·흥양·보성 등 5개 고을에도 아울러 방략(方略)에 의해서 거느리고 갈 예정으로 처음에는 경상도로 출전할 때 해로를 지나게 되는 본영 전양으로 일제히 도착하라고 급히 통고하였습니다.(후략)
위 장계에서 방략(方略)이란 ‘제승방략’을 말한다. 제승방략은 조선전기의 방어체제였던 진관체제의 단점을 보완하여 조선중기에 성립된 국가 방어체제였다. 그러면 진관체제란 무엇인가?

  1. 진관체제(鎭管體制)
    조선전기의 국방 체제의 근간은 진관체제였다. 1457년(세조3)에 확정된 진관체제는 행정조직 단위인 읍(邑)을 동시에 군사조직 단위인 진(鎭)으로 나누고 각 읍의 행정관인 수령이 군사지휘관도 겸임하도록 한 제도였다. 즉 진관체제는 국방 체제를 전국토로 확대해 행정조직과 맞물려 일원화한 조치였다. 주진은 최고지휘부이며, 훈련과 방어의 중심은 거진에서 이루어졌다.
    류성룡은 “평시에는 진관의 읍이 주진(主鎭)이 되어 그 소속된 고을을 검칙(檢飭)하여 일체의 병기를 다루고 군대를 훈련하는 일을 모두 다스렸고, 유사시에는 진관이 또한 각기 소속된 군병을 인솔하고 차례차례 정돈하여 주장(主將)의 약속을 듣게 하였으니, 조종(操縱)과 신축(伸縮)은 오직 주장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진관의 군병이 비록 패배하여 무너진다 하여도 다른 진관이 각기 대병으로서 차례로 굳게 지켜 혹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혹 뒤를 습격하기도 하며 혹 좌우를 뒤흔들기도 하니, 적이 비록 승세를 타더라도 감히 쉽사리 충돌하지 못하는 것은 그 형세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라고 정의하였다.
    그런데 수군의 진관 편제는 육군의 그것과는 달리 반드시 행정조직과 일치되지 않고 전략상 요해지에 포 또는 진을 설치하는 것이 상례였다. 따라서 각 진포의 소속 수군은 부근 거주인이 아닌 먼 곳의 거주자가 되는 예가 흔했던 것이다. 아울러 수군의 진관체제는 왜구의 침입규모에 따라 진별 대응 수준이 달랐다. 소규모일 경우 제진에서 대응하고, 규모가 커지면 거진이 중심이 되어 지휘하여 대응하고, 보다 커지면 주진이 지휘하여 적을 막는 방책이 시행되었다.
    진관체제의 방어는 각 진관 단위로 자전자수(自戰自守)를 원칙으로 했으므로 병력을 다른 진관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적이 침입할 경우에는 먼저 제1선 진관이 대적하고, 해당 진관이 함락되더라도 다른 진관이 자기 지역에서 계속해서 적과 대적했다. 그래서 다른 진관으로 적이 침입할 때까지 시간을 확보해 적의 진격을 최대한 저지했다.
    그러나 진관체제는 몇 가지 단점이 있었다. 전 국토를 방위 대상에 포함시키다 보니 국가 방위에서 전방 후방의 구별이 없었다. 방위체제가 평면적이어서 요충지에 실질적인 방어병력을 투입하기 어려웠다. 예컨대, 적이 상습적으로 침입하는 지역이 있다면 군사력을 이 지역에 집중시켜야 한다. 실제로 조선 초기에 왜구 침입이 남해 연안에 집중되면서 이 지역의 중점 방어가 시급했다. 그렇지만 진관체제에서는 군사를 분산 배치하므로 집중적으로 적을 격퇴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진관체제는 전국토 방위 체제이므로 많은 군사가 동시에 필요했고 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보인(保人)을 확보해야 했다. 하지만 군역 기피로 16세기 이후 대립제(代立制)가 성행하면서 병력수가 감소했고, 군사들의 전투력도 점점 저하되었다. 대립제란 16세기 이후 경제적 능력이 있는 양인들이 서울로 올라가야 할 번상병으로 뽑히면 타인을 고용해 대신 병역을 치르게 한 제도이다. 그런데 대립이 점차 보편화되자 군역제는 군역을 실제로 수행하는 대신에 포를 걷는 방법으로 변질되었다. 이로 인해 폐단이 자주 일어나자 1541년(중종36)에 군적수포법(軍籍收布法)을 정식화했다.
    특히 16세기 중반 이후 방군수포(放軍收布) 현상으로 유방지에는 체류하는 군사가 없게 되고 역부담의 과중은 연쇄적인 포류(逋流)를 초래하여 이미 군사적 기능을 갖추지 못한 군사는 수적으로도 감소되었다. 각 진관이 독립단위로 자전자수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달량포왜변이 벌어졌을 때 진관체제로서는 왜구들을 물리치는 데 애로점이 많았던 것이다. 따라서 달량포왜변과 같은 사태에 대한 응급책으로 이른바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분군법이 대두되었다. 이것은 진관체제를 대신하여 적용된 것으로 조선 수군의 방어체제도 이러한 방어 전략의 변화에 따라 보조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러한 수군의 방어체제는 임진왜란 시기에 적용되고 있었다.

  2. 제승방략체제(制勝方略體制)
    1510년 삼포왜란을 계기로 왜구의 침략규모가 커지면서 조선은 왜적의 주요 침입로에 병력을 집중시킬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런 배경에서 새롭게 등장한 방위 전략이 제승방략이었다. ‘제승’이란 적을 제압해 승리를 거둔다는 뜻이다. 제승뱡략은 전 국토의 평면적인 군사 배치를 지양하고 여러 진관의 군대를 제일선 방어에 집중 배치하는 시스템이었다.
    예를 들어 남방에 적침이 발생하면 중앙에서 지휘관이 중앙군을 인솔해 내려가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와 함께 군사를 나누어 대적했다. 각도 수령은 소속 군사를 이끌고 본진(읍)을 떠나 미리 배정된 방어지역으로 이동해 진관 단위와 상관없이 주장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이때 한 곳에 집결한 군사는 전시 편제에 따라 새로이 편성해 여러 지휘관 휘하에 소속시키므로 제승방략을 ‘분군법(分軍法)’이라고도 했다. 요컨대 제승방략의 분군법은 각 진관 별로 자전자수하는 진관체제와 달랐다. 유사시에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군사들을 하나의 방어진지에 집결시켜 공동 대처하는 방어전략이었다.
    제승방략체제 정착의 직접적인 계기는 1555년 을묘왜변을 겪으면서 진관체제의 문제점이 확연히 드러나자 당시 제주목사 김수문의 건의에 의해 제승방략체제가 정착되었다. 1555년 5월의 해남 달량포에 왜구가 70여 척의 배를 가지고 쳐들어왔을 때 큰 규모의 침략을 당한 조선군은 제대로 대응을 몬한 채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즉 왜구가 대규모로 쳐들어오자 전라도 병마절도사 원적이 장흥부사 한온(韓蘊),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달량포로 출전했으나 오히려 왜구에게 포위되어 원적과 한온은 항복했다가 피살되고 이덕견만 탈출했다. 전라도 병마절도사 휘하의 정예군사가 붕괴하자 왜구는 5월 하순까지 별 저항을 받지 않고 어란포·장흥·강진·진도를 거쳐 다시 영암으로 침입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금군(禁軍) 등 정예군사를 동원함과 아울러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전라도 도순찰사, 김경석(金慶錫)·남치훈을 좌·우도 방어사(防禦使)로 임명하여 이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분개한 제주목사 김수문의 건의에 의해 제승방략제가 채택된 것이다.
    그런데 류성룡은 이러한 제승방략체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조종의 원대한 계획이 이와 같이 자세한데도 중세 이후로 좋은 법과 아름다운 제도가 일체 폐지되었고 또 가벼운 생각과 얕은 꾀를 가진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뜻대로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내어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고 이름하였는데, 당초 을묘년 왜변(倭變)을 당하자 이러한 일시의 구급책을 마련한 것이니, 이것은 겨우 소소한 적을 상대할 수는 있어도 대적을 제압할 방략은 못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배경에서 수군의 경우도 제승방략제가 적용되었다. 진관체제에서의 수군부대는 주진-거진-제진을 막론하고 모두 군사진만 소속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각 읍에 소속된 수군도 주장인 수군절도사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읍 수군도 정비되어 당해 도 수군절도사의 지휘를 받게 된 것이다. 전라좌수군의 예를 든다면, 진관체제에서는 전라좌수사영이 주진(절도사)이라면 사도진이 거진(첨사)이었으며, 여도·녹도·발포·방답진 등이 제진(만호)으로 속하였다(여기서 방답진은 첨사가 지휘했지만 사도진의 통제를 받았다). 수군절도사는 유사시 이러한 수군진 만을 지휘하여 전투를 벌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제승방략제의 시행에 따라 순천부·낙안군·보성군·흥양현·광양현의 읍수군도 전라좌수사 관할 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방어체제가 임진왜란 시기에 적용되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남쪽 지역뿐만 아니라 북쪽 지역에서도 제승방략에 의한 분군법이 행해졌다. 1583년(선조16) 2월에 여진족 니탕개가 난을 일으켜 대규모로 조선의 북방을 침략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니탕개 난을 진압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도체찰사와 방어사 등을 파견해 병마절도사와 함께 지방군을 나누어 지휘하도록 했다.
    이 난이 있은 뒤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이일이 1588년 3월에 『제승방략』을 펴냈다. 이일이 완성한 제승방략은 유사시에 북도의 병마절도사를 중심으로 도내의 전체병력을 동원하는 체제였다. 남방의 제승방략이 중앙에서 파견한 경장이 중심이라면 북방의 제승방략은 현지 병마절도사가 중심이 되어 군사를 통솔하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양자 모두 군사력의 피폐와 지휘관의 비전문성으로 인해 진관체제가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자 전문 지휘관을 중심으로 남아있는 병력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는 공통점을 띤다.
    류성룡은 “그 후에 양남(兩南)의 감사(監司)와 병사(兵使)들이 각기 소견을 가지고 두찬(杜撰)하여 첨가하였는데 온 세상이 마치 손오 병법(孫吳兵法)처럼 떠받들어 일체 통행했으니, 국가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비록 다른 일의 잘못도 많지만 대개는 《제승방략》이 그르친 것입니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진관체제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승방략체제도 임진왜란이란 전면전이 발생하자 여러 문제점을 드러냈다. 가장 큰 문제는 제승방략법이 변방의 국지전을 대비하는 방어체제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전면전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군사력을 제1방어선에 집중 투입한 결과 제1선이 무너지면 후방의 제2, 제3 방어선을 형성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인근지역이 적에게 빠르게 함락되었다.
    또 적이 급박하게 진격하는 상황에서 중앙에서 적시에 지휘관을 파견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경장이 도착하기 전에 적이 침입한다면 집결한 군사는 지휘관이 없는 오합지졸이 되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중앙에서 파견한 지휘관과 지방의 지휘관이 뒤엉켜 명령 계통이 통일되지 못하는 혼선을 빚었다. 특히 임진왜란 초기 제승방략에 따라 대구지역에 결집해 있었던 경상도 병력이 경장 이일의 부임 지연으로 인해 와해된 사실은 제승방략제의 맹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류성룡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대체로 그 중 큰 요점은 한 도의 군병을 미리 순변사·방어사·조방장과 병사·수사에게 분속시켜 적에 관한 정보를 듣기만 하면 적군의 많고 적음과 적의 정세와 지세(地勢)의 험난과 평이함을 살피지 아니하고 일제히 징발하여 모두 국경 부근에 결집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변사에 소속된 군병은 병사가 비록 사용하고 싶어도 할 수 없으며 그밖에 병사·수사·조방장에 소속된 군병도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매번 한차례 군병을 조발하면 일개 도가 모두 움직여 다시 뒤에 남은 힘이 없는데 조정에서는 천리 밖에서 장수를 보내니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장수가 없는 군병이 곳곳에 뭉쳐 있으나 약속과 기율도 호령도 없이 벌판에 어지러이 흩어진 채 장수를 기다려도 3∼4일이나 되도록 오지 않으니 적의 선봉(先鋒)은 이미 육박하여 오는 판에 굶주림과 목마름은 계속되어 새와 짐승처럼 놀라 서로 잇따라 무너지고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야 이른바 서울의 장수들이 단기(單騎)로 달려온들 이미 흩어진 군병은 그 누구도 불러 모을 수 없는데 적의 선봉은 이미 부닥쳐 오게 되는 것입니다. 임진년 여름에 적병이 승승장구하여 곧바로 경성에 당도하게 된 것도 대체로 이러한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수군의 경우에는 이와 정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수군의 경우에는 총 지휘관이 육군의 경우 같이 경장이 지휘한 것이 아니라 해당 수군절도사가 지휘를 하였다. 1592년 한 해에 있었던 여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제승방략제에 따라 수군의 방어체제가 효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육지에서의 제승방략제는 경장의 부임 지연으로 인해 실패했지만, 해상에서의 제승방략은 전라좌수사를 중심으로 효율적인 방어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즉 전라도의 관과 포에 소속된 모든 수군은 동원되어 경상우수군과 힘을 합쳐 전력의 집중을 기할 수 있었다. 아울러 육지와 같은 경장의 파견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수군 사정에 익숙한 수군절도사에 의한 지휘로 전투에 효율성을 기한 결과인 것이다.
    cafe.daum.net/jjmkssm1545-1598/kL0j/4 격군님의 글
    이순신제승방략.JPG
    진관 체제(鎭管體制)는 15세기 세조 이후 실시되었던, 지역 단위의 방위 체제이다. 각 도에 병영을 설치하여 주진과 그 아래에 거진, 제진을 설치하여 각 지역의 지방관이 지휘하는 체제로 소규모 적의 침략과 내륙을 방어하는데 효과적이지만 대규모 적의 침략을 방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대립제, 방군수포제 등, 군역이 문란해짐에 따라 병력자원이 줄어 전투력 유지가 어렵다.
    제승방략(制勝方略)이란 조선의 분군법(分軍法) 군사정책으로 진관 체제의 단점을 보완하고자 고안되었다. 적의 침입에 맞서 각 지역의 군사를 요충지에 집결시킨 다음 중앙에서 파견한 장수가 이를 통솔토록 하는 방법으로 1만 이상의 대규모 전에는 효과를 발휘하였으나 그 본진이 무너지면 그 후방은 모두 적에게 노출되는 불리함을 가지고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 패전의 원인이 되어 이후 폐지되었다.

임진왜란때 왜 왜군에 조선이 밀렸는가 하는 이유가 바로 진군에서 제승방략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전까지 명장이었던 신립장군이 충주에 파견되었는데 오가는데 시간이 다 잡아먹고 그 지역의 지형이나 군인에 대한 정보, 왜군에 대한 정보가 부재했기 때문에 진을 논두렁에 쳐서 기병이 빠져서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몰살당했다.
원래 장수는 밖에 나가면 군주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인데 중앙 집권화 통제화가 씻을 수 없는 비극을 가져오고 결국 명나라 원군과 의병에만 의존하고 관군은 거의 전투다운 전투를 치를수 없게 되었다.
스마트폰도 없고 통신도 봉화가 파발마정도가 있는데 전투를 직접 중앙에서 지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중앙집권식 권력 통제인 제승방략이 얼마나 큰 비극을 가져오는지 뼈저리게 역사의 비극으로부터 배운다.
그런데 또 정부는 화폐 권력도 통제하려고 한다. 물론 사기성 코인도 있고, 피라미드 사기에 해킹도 있지만 중앙집권으로 비트코인이나 알트코인 암호화화폐 시장을 컨트롤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특히 코인 발행 행사인 ICO를 심판 판단도 없이 싸그리 무력화 시키려는 시도는 잘못되었다. 차라리 국가에서 암호 화폐를 한국은행에서 세계 최초로 발생하여 국민 생활 편의에 기여하고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기 위해서 한국 원화 화폐를 발생하는 것은 찬성한다. 대신 민간 발행인 비트코인등 암호화 화폐와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이렇게 임진왜란이나 전쟁 역사를 통해서 얻은 교훈을 가지고 앞으로 닥쳐올 세상에 대해서 판단을 해야지 자신의 선입견이나 주관, 그냥 암호화 화폐는 사기야이런식으로 단견이나 근시안적인 태도로 임해서는 절대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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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etah robot이 설치고 다니는 군요. down vote도 했네요. 인용하신 내용이 너무 많다보니 표절로 분류가 된 것 같습니다. steem하기 참 힘드네요. 로봇들과 상대를 해야 하니.
인용부분 조금 줄여주시고(너무 길기는 합니다:) ) 아래에 나오는 주제만 있어도 될 것 같습니다.

오늘 또 하나 배우네요. Steemit에서 인용을 너무 많이 하면 spam으로 분류되어 로봇으로 부터 down vote 받는다!!

댓글 감사드립니다 제가 쓴 글도 전에 글을 인용해 쓰면 또 돌아다니면서 난도질을 합니다. 스팀 CEO에게 매일도 보냈는데 답장도 없고 한국인 커뮤니티에서 공동으로 대책을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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