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산을 사도록 사기당한 과부 백선행과 우연히 운이 좋아 거부가 됨 적선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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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행(白善行)1848년 11월~1933년
경기도 수원에서 백지용(白持鏞)의 장녀로 출생하여 어려서 평양 중성(中城)에 옮겨 살았다. 7세에 부친을 여의었으며, 편모 김씨(金氏) 슬하에서 자라며 효행이 남다른 가운데 14세 때 안재욱(安裁煜)과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2년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친정으로 돌아와 홀어머니를 모시고 온갖 궂은 삯일을 도맡아 하면서 청상과부로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다.
1933년 5월 10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열여섯 살이 된 백 과부는 남편을 잃고 다시 과부 어머니를 찾아 친정으로 돌아왔다. 개가하여 팔자를 고치라는 동네 사람의 권유가 있었으나 스무 살 전의 과부는 세 번 남편을 갈지 않으면 불행을 면치 못한다는 미신이 주는 공포와 어머니 과부의 신세를 생각하여 과부 모녀는 죽기까지 떨어지지 않기로 맹세하고 새 생활을 개척했다. 우선 그날그날 먹을 것이 문제였다. 그들은 청대(쪽으로 만든 검푸른 물감) 치기와 간장 장사, 베 짜기 등으로 새 생활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고 백선행 여사 일생1’, 「동아일보」 1933년 5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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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마저 여읜 뒤 더욱 근검절약하며 억척스러운 과수로 화장을 제대로 하는 일도 없이 불철주야 천한 일을 하여 큰 돈을 모아들였다. 그 뒤 평양 근교인 강동군(江東郡) 만달면(晩達面) 승호리(勝湖里) 일대의 광대한 황무지를 사들여 1900년대에 일본인 시멘트생산업자 오노다[小野田]에게 넘기면서 굴지의 평양 갑부가 되었다.
만달산(晩達山) 자체가 시멘트 원료인 석회 석산이었던 관계로 막대한 치부를 하게 되자 자선사업에 희사할 뜻을 굳혔다. 1908년 첫 공익사업으로 대동군(大同郡) 용산면(龍山面) 객산리(客山里) 솔뫼다리[松山橋]를 돌다리로 새로 부설하여 ‘백선교(白善橋)’라 이름하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에 충격을 받고 1924년 모든 재산을 사회사업에 바치기로 공식발표한 뒤 당시 30만 원의 거금을 출연하여 평양 일대의 각급학교 지원의 육영사업과 시민들을 위한 문화시설로 대공회당(大公會堂)을 신축하였다. 대동강 옆의 이 웅대한 석조건물은 ‘백선행기념관’이라 하여 평양의 명소로 지목되었다.
1925년 광성소학교(光成小學校)에 1만 4000여 평과 숭현여학교(崇賢女學校)에 전답 2만 6000평을 기증하여 재단법인의 기초를 세우는가 하면, 1927년 미국선교사 모펫(Moffet, S. A., 馬布三悅)이 설립한 창덕소학교(彰德小學校)에도 부동산을 내놓아 교육재단을 만들도록 주선, 기백창덕보통학교(紀白彰德普通學校)로 발전시켰다.
이처럼 민족교육에 헌신하는 한편, 근우회(槿友會) 평양지회의 사회활동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보다 보람 있는 봉사사업의 소망을 품고 평양사회의 지도자 조만식(曺晩植)과 뜻을 같이하여 일본인들의 공회당인 평양 부민관보다 큰 민간문화운동의 집회장으로 도서관 겸용의 공회당 신축을 위한 백선행기념관 재단법인을 설립하였다.
이 재단법인의 재단이사장을 맡으면서 조만식·오윤선(吳胤善)·윤주일(尹柱逸), 그리고 최경렴(崔敬濂)을 이사로 하여 1927년 3월 10일 연광정(練光亭)이 올려다 보이는 대동문가에서 기념관 기공식을 하고, 3층의 화강암 건물을 지어 이듬해 9월 준공, 1929년 5월 7일 성대한 개관식을 거행하였다.
329평 대지 위에 연건평 총 324평의 백선행기념관 1층에는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회당, 2층에는 500명 수용의 집회실과 응접실·회의실·오락실 시설을 하고, 3층에는 도서관시설도 완비하였다.
1931년 12월 동상 건립이 추진되어 기념관 앞에 백선행동상이 1932년에 세워졌고, 이 무렵 숭현여학교와 광성보통학교에도 기념비가 세워졌다. 86세로 죽었으며 여성으로는 최초로 사회장이 엄수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에서는 그녀를 애국심이 없고 인색한 보통 자본가의 모습과 대비시켜 좋은 자본가로 묘사했다. 김일성은 1992년 회고록에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일제 강점기에 돈을 모을 수 있었던 것 때문에 전쟁 영웅으로 존경했다고 썼다. 2006년 7월 평양에 그녀의 기념비가 재발견되고 복원되었다.

http://www.iheadlin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905
그녀의 뛰어난 사업가적 안목과 자질은 만달산을 매입해 일본 굴지의 시멘트 회사 사장에게 몇 십 갑절의 이득을 남기고 매매한 일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녀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은 바위산에 불과한 만달산을 사들인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일본인들이 석회석이 많이 나는 땅을 찾아다닌다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경성(서울)을 돌아보고 온 다음 현대식 건축물이 들어서기 시작하면 시멘트에 필요한 원료인 석회석이 대량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만달산이 그녀에게는 석회석이 풍부한 황금 산으로 보였다. 더욱이 만달산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거대한 바위산에 불과했기 때문에 백선행은 아주 헐값에 이 산을 사들일 수 있었다.
사실 백선행이 만달산을 매입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고민과 결단이 필요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행동을 무모하다고 여겨 산의 매입을 적극 만류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익이 언제 발생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바위산을 구입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위험한 투자였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백선행의 투자 판단과 과감한 행동이 옳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녀가 예측한 대로 일본인이 운영하는 시멘트 회사에서 만달산을 팔라고 통사정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백선행은 값이 오를 대로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못한 듯 이 산을 팔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 한 건의 부동산 거래로 30만원(300억원 상당의 금액)의 자산을 소유한 평양 제일의 여성 갑부로 거듭났다.
전해오는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백선행은 사기꾼에 속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황무지에 불과한 만달산을 구입했고, 당시 평양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그녀가 이제 폭삭 망하게 되었다고 쑤군대며 조소거리로 삼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본인이 나서 거액을 주고 만달산을 구입하는 바람에 불행이 행운이 되는 전화위복으로 일약 평양 제일의 갑부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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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 에피소드를 두 번째 내용인 사기로 속아 만달산을 구매했는데 시멘트 수요가 생겨 전화위복이 되어 거부가 되었다는 내용으로 알고 있다.
사실 자신이 미리 사전 정보를 가지고 부자가 되던지 아니면 우연히 사기당했다가 다시 일확천금의 노다지가 되었던지 간에 부자는 하늘이 내린다고 본다.
그렇다면 지금의 금광 노다지와 만달산은 어디에 있을까? 필자가 보기에는 암호화폐가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일제 강점기 시멘트 건물이 늘어나는 건축의 혁명이 일어나는 패러다임 변화가 백선행을 부자로 만들었듯이 암호화폐도 실물 지폐나 화폐를 대체하는 수단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선제 투자가 필수적이다.
다행히도 최근 악재를 쏟아내어 G20 재무장관 회의등 겁을 주는 이삭털기가 끝났고 상승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지금도 늦지 않았다. 단 정부에서 일구이언하며 4개 거래소와 6개 시중은행 독과점을 시키고 계좌 입금을 틀어 막는 반 자본주의적 행태를 뜯어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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