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유비가 조조를 죽인 오초칠국의 난과 중앙집권 다시 지방분권과 블록체인

in #kr6 years ago

한나라 유비가 조조를 죽인 오초칠국의 난과 중앙집권 다시 지방분권과 블록체인

중국에서 잘 다스려진 시기를 가리키는데 문경지치란 말이 있다. 한나라 문제와 경제 시기의 치세란 말인데 그 당시에도 사실 혼란이 있었다.
특이한 점은 유비가 번국을 깍아내려는 조조를 죽게 했다는 점이다. 삼국지시대의 내용이 아니라 오나라 왕인 유비(吳王 劉濞, 기원전 215년 ~ 기원전 154년)가 조조鼂錯가 제후국 세력을 줄이려고 시도하자 책임을 묻게해서 죽이는 것이 발단이 되었다.
오초칠국의 난(吳楚七國-亂)은 전한 경제 치세인 기원전 154년 전한의 제후국 오나라의 왕 유비가 주축이 되어 조(趙)·교서·초(楚)·교동(膠東)·치천(菑川)·제남 여섯 나라와 함께 전한 중앙 정부에 일으킨 반란이다. 경제는 과격한 정치가 조조의 정책을 실행해 제후왕의 죄를 빌미로 조·교서·초나라의 봉토를 삭감했다. 마침내 오나라에도 봉토를 삭감하려 하자,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한 유비는 초, 교서, 조, 의 제후왕과 공모하여 황제 측근의 간신인 조조를 칠 것을 구실로 선수를 쳐서 군사를 일으켰다.
이 제후왕의 반란은 주아부가 거느린 정부군의 교묘한 전략에 의해 오왕은 살해당하고, 오와 공모한 제후왕도 모두 살해당하여 전란은 불과 3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이 싸움에서 한의 조정이 승리를 거둔 것은 제후왕에 대한 조정의 우위(優位)를 결정지어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한초(漢初)의 정치사상 오초칠국의 난의 평정이 지닌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오왕은 영내의 장군(鄣郡)에 구리 광산이 있어 망명객을 불러모아 불법으로 돈을 주조하고, 나라 동쪽에 면한 황해의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부세를 걷지 않아도 나라는 풍족했다.
문제 때에 오나라 태자 유현이 입조해 황태자(경제)와 육박(六博)을 했는데, 서로 다투다 황태자가 육박 판을 던져 유현을 죽이고 말았다. 한나라에서는 유현의 시체를 오나라로 보내 장사지내게 했는데, 오왕은 장안에서 장사지내지 않은 것에 노해 원망을 품고 입조하지 않았다.
경제는 태자 시절부터 총애한 조조를 어사대부로 삼았고, 조조는 제후왕의 죄를 물어 지군(제후국 관할의 군 중 서울을 관할하지 않는 지역)을 덜어내도록 청을 올렸다. 경제는 이 문제를 놓고 여러 신하들과 의논했는데, 두영 외에는 아무도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그리고 조조는 30가지 법령을 바꾸어 제후국들을 소란하게 했다. 조조는 경제에게 올린 청에서 오왕의 반란은 이미 기정사실로 여기고 왕국령을 덜어내면 반란이 일찍 일어나겠지만 피해가 적을 것이라고 했다. 경제와 조조는 세 나라 왕의 죄를 추궁해 그들의 군을 덜어냈다.
조왕 유수, 경제 2년 = 조왕 수 26년(기원전 155년) 죄를 지어 상산군을 덜어냄
초왕 유무, 경제 3년 = 초왕 무 20년(기원전 154년) 효문태후의 상중에 간음했으므로 동해군 혹은 동해군과 설군을 덜어냄
교서왕 유앙, 작위를 팔고 간음했으므로 여섯 현을 덜어냄(교서국은 교서군 1군만 있는 제후국이라 군을 삭감하는 것은 곧 폐번임)
조정에서는 경제에게 큰 불만을 품고 있는 오나라 지군도 덜어낼 의논을 했고, 오왕은 선수를 쳐 반란을 일으키고자 해 중대부 응고(應高)를 교서왕에게 보내 설득했다. 교서왕은 반란에 가담할 것을 약속하고, 이웃의 제·치천·교동·제남에도 사신을 보내 반란에 함께할 것을 약속받았다.
경제는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대사면을 행하고, 주아부를 태위로 삼고, 종실과 외척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판단한 두영이 얼마 전에 종고모 두태후와 불화해 관직을 버리고 집에 있었는데 두영을 강권해 대장군으로 삼아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27][28] 두영은 출진하기 전에 난포와 옛 오나라 재상 원앙 등 재야의 인물들을 천거했다.[29] 주아부는 오나라·초나라 방면을 맡았고, 역기는 조나라를 치러 출진했고, 난포는 조나라를 치러 출진했으며, 두영은 형양에 주둔하면서 조나라와 제나라 방면의 군사를 감독했다.
한편 조조는 원앙이 오왕의 모반을 뇌물을 받고 숨겼다고 탄핵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었고, 원앙은 이 소식을 듣고 두영을 통해 경제를 만났다. 경제는 군사를 낼 일에 대해 조조와 상의했고, 조조는 경제가 친히 출정하면 자신이 조정을 지키고 있겠다고 했다. 마침 원앙은 이때에 경제를 만났다. 경제가 원앙에게 옛 오나라 승상으로서 오나라의 상황과 반란 진압 가능성, 오나라가 돈과 소금을 만들어 호걸들을 불러모으는 것에 대해 물어보자 오나라에서 돈으로 사는 사람들은 간사한 사람들이므로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고 조조도 동의했다. 경제가 원앙에게 다른 계책이 없는지 물어보자, 조조와 주변 사람들을 다 물리도록 하고 반란군이 조조를 제거할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니 조조를 죽여서 반란군에 사죄하면 누그러트릴 수 있다고 했다. 경제는 조조를 죽여 반란군에 사죄하고, 원앙을 태상으로 삼고 오왕의 조카 덕경후(德景侯) 유통(劉通)을 종정으로 삼아 오왕을 찾아가게 했다. 이때 오나라와 초나라는 양나라의 극벽을 공격하고 있었다. 먼저 친족인 덕경후가 오왕을 만나 회유하고 조서를 주었는데, 오왕은 원앙이 온 것을 알고 “내가 이미 동쪽의 황제인데 누구에게 절하겠느냐?” 하며 원앙을 만나지 않고 억류하고 자신의 장수가 되도록 겁박했다. 원앙이 거절하자 오왕은 원앙을 죽이려 했고, 원앙은 오나라 군중의 사마가 예전에 원앙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어서 그 도움을 받아 탈출해 양나라로 가서 귀환했다.
오나라가 반란을 결정하고 전녹백(田祿伯)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전녹백은 자신에게 5만 군사를 따로 주어 회남, 장사를 거두어들이고 무관에서 호응하도록 제안했다. 그러나 오나라 태자가 군권을 나누어주는 것을 반대해 전녹백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37] 또 젊은 환장군은 오나라는 보병이 많고 한나라는 전차와 기병이 많으므로 재빨리 낙양으로 진군해 양무의 창고와 오창의 곡식을 손에 넣고 낙양의 험준한 지형에 의지해 싸워야 하며 천천히 성들을 함락시키며 가다가는 양나라와 초나라의 평지에서 싸워 패할 것이라고 했다. 오왕이 늙은 장수와 상의하자 늙은 장수가 반대해 이도 성사되지 않았다. 오왕이 모든 군사를 아울러서 지휘했다.
오왕이 아직 화이허를 건너기 전, 오왕의 빈객 중에 유일하게 군직을 맡지 못한 하비의 망명객 주구(周丘)가 한나라의 절(節)을 달라고 해 오왕이 줬다. 하비에서는 오왕의 모반 소식을 듣고 성을 지켰는데, 주구는 성에 들어가 전사에서 영인을 죽이고 형제들과 친한 관리들을 불러모아 오왕이 곧 성을 함락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하비는 오나라에 항복했고 주구는 3만 명을 얻어 오나라에 보고하고 북진하며 성읍을 노략했다. 주구가 성양나라에 이르렀을 때에는 병사가 10여만으로 불어났고, 성양의 중위를 격파했다. 그러나 오왕이 패주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비로 돌아가다 등에 종기가 나 죽었다.
주아부가 막 출발해 패상(覇上)을 지나는데, 조섭(趙涉)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오왕이 부로 사람을 모아서 효산(崤山)과 민지(黽池) 사이의 험한 곳에 간자를 숨겨놨을 위험성을 지적하고, 하루이틀 돌아가는 길이지만 몰래 무관을 지나 낙양으로 가도록 진언했다. 주아부는 이를 따랐고, 낙양에 이르러 효산과 민지 사이를 수색해 과연 오나라의 복병을 찾았다. 주아부는 조섭을 호군으로 삼았다.
진압이 끝나자, 경제는 원래 오왕의 동생 집안인 덕경후의 아들과 초왕의 할아버지 초원왕의 아들 유례로 두 나라의 후사를 모두 세워주려 했다. 그러나 두태후가 황실의 원로로 난을 주도한 오나라를 괘씸하게 여겨, 유례만 초왕이 됐고 오나라는 이름을 강도나라로 고쳐 여남왕에게 주었다. 제북왕은 반란군과 함께 모의했으나 실제로 반란에는 가담하지 않았기에 치천나라로 옮기고,반란 가담을 단호히 거부한 형산왕을 표창해 제북나라로 옮겼다. 여강왕은 반란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나 월나라와 교류했으므로, 장강 북쪽에 있는 형산나라로 옮겼다. 여남나라와 여강나라는 폐지하고 한 조정의 직할지로 삼았다. 교서나라에는 유단을 봉했다. 한편 조나라에서 중산나라를 새로 만들어 중산정왕을 봉했다.
주아부는 조후에, 두영은 위기후에 봉했고, 이 둘은 조회에서 열후 중 가장 존귀한 대접을 받았다.
1년 후인 기원전 153년, 교동나라에 경제의 아들 유철을 왕으로 봉했다. 2년 후인 기원전 152년, 광천왕을 조나라로 옮겨 봉했다.

위 내용을 보면 군현제를 유지했던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는 다시 봉건제도로 여러 아들을 제후국에 봉해 지방의 세력이 커졌다가 다시 오초칠국의 난을 평정하고 중앙집권제도로 돌아서게 된다. 한나라 무제가 서역개척과 고조선등을 멸망시킬수 있던 바탕도 이 지방 번국을 제압했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는 분열에서 통일로, 통일에서 다시 분열로 나가는 역사로 삼국지연의에서 이미 설파를 했다. 현재 한나라의 화폐는 거의 단일화폐로 통일이 되어 있다. 그 문제점은 국가가 통화량을 조절해 인플레이션을 마음껏 하고 또 그것을 경제성장으로 포장한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은 수출의존국가이므로 미국에서 양적완화를 하면 경쟁력을 위해 미국보다 더 많은 통화를 찍어내야 하는 고충이 있다.
1944년 브레튼우즈체제에서는 '금 1온스=35달러'의 공식이 있었지만 1971년 베트남전비 마련을 위해 닉슨이 금태환을 중지시켰다.
현재 금값을 보면 2017년 9월 온스[약 28g]당 1294달러이다. 그렇다면 1294/35를 하면 1971년 이후로 얼마나 많이 인플레이션이 되었는지가 나오게 된다. 물가가 인플레이션으로 36.97배가 상승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근로자 실질임금이 올랐어야 하는데 그만큼 오르지 않았으니 미국은 1971년 이후[특히 1980년대 신자유주의 레이거노믹스로 경제를 절단냄]로 계속 내리막길을 걸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한국은 문제점이 환율이 처음에는 200-300원했던 고정환율이 2017년 11월 13일 현재 1121원을 하고 있다. 250원으로 잡으면 4.84배 대략 5배가 오른 것이다.
인플.jpg
얼마면 돼? 하는 부자 아프리카 원빈같지만 달걀 2개도 못삼
즉 한국은 인플레이션이 1971년 이후로 36.97*4.84=165.77배가 인플레이션이 되었다. 필자가 어린시절에 자장면이 500원, 라면 100원이 기억나는데 그나마 TV나 전자제품 가격이 싸지고 중국의 농산물등이 있어서 싸게 공급되어 물가가 그나마 유지가 되는 것이다.
왜 응답하라 시리즈가 인기를 끌겠는가? 그 이유는 현대에 경제적으로 너무 살기 힘들고 정말 그 시대가 상대적으로 풍요로왔기 때문이다. 박정희나 전두환 독재정권의 향수가 아니라 실제 인플레이션이 적어 경제적으로 나았기 때문이다.
오초칠국을 보면 한나라 문제 경제 때 오나라 왕도 지방에서 구리광산을 가지고 자체 화폐를 발행했다. 필자가 자주 말하는 구리광산을 가지고 관상에서 굶어죽는다고 말해 총애를 잃어 굶어죽은 등통도 자신이 민간으로 화폐를 만들었다.
모든 인플레이션이란 서서히 뜨거운 물로 개구리를 삶아 죽이는 행위를 피하려면 결국에는 2100만개로 채굴이 한정되고 채굴 난이도가 증가해 자체 디플레이션이 되는 비트코인이나 알트코인등 암호화화폐의 시대로 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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