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 제목인 윤동주의 시 병원에 나오는 하얀다리와 튼살치료

in #kr7 years ago

윤동주 병원.jpg

한 개인의 경우에 있어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이 죽기 전에 자신의 일생을 비교적 솔직하게 회고록 형식으로 기록해놓았다고 해도, 그것을 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자신의 마음속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콤플렉스나 치부들을 기록자 스스로 파악하기 힘들뿐더러, 설사 파악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차마 솔직히 까발겨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진짜 ‘속마음’을 읽어내려면 그 사람이 공식적으로 남긴 기록에 의지하기보다는, 순간적인 본능적 욕구에 사로잡혀 넋두리하듯 써내려간 연애편지나 일기 같은 것을 참고하는 편이 낫다.

예컨대 톨스토이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엔 톨스토이를 그저 위대한 휴머니스트로만 보았다. 하지만 최근에 이르러 그를 ‘결벽증적 금욕주의와 신경질적 성욕의 틈바구니에서 갈등하다 죽어간 자아분열적 이중인격자’로 보는 견해가 대두되게 되었다(J. 라브린의 저서 ‘톨스토이’가 대표적인 예다).

그것은 톨스토이가 남긴 저서 때문이 아니라 그와 그의 부인 소피야 사이의 일을 기록한 톨스토이의 일기, 서간 및 부인이 직접 기록한 일기 때문이었다. 소피야는 자신이 역사에 ‘악처’로 기록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에서 톨스토이와의 성격적 갈등과 성적 갈등을 남편 몰래 기록해두었던 것이다.

소피야의 기록에 의하면 톨스토이는 정신적으로는 지독한 금욕주의자이면서 실제로는 지독한 색정광(色情狂)이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성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자신이 마치 악마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여성을 남성의 성욕을 도발시키는 원흉으로 몰아붙여 스스로의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므로 톨스토이가 그의 소설 ‘안나 까레니나’에서 안나가 진실된 성에 눈떴다가 결국 자살하도록 만든 것은, ‘불륜의 대가’라는 뜻에서라기 보다(모든 성애에 불륜은 없다) 여성에 대한 적개심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톨스토이의 일기를 봐도 이런 사실을 증명하는 대목이 여러 군데 나온다.

톨스토이의 일생을 그의 업적중심으로 건성건성 파악하려면 이런 내밀한 기록들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그의 ‘운명’을 이해하려면 이런 기록들이 참고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업적과 운명을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적어도 가정적으로는 너무나 불행한 운명을 타고났던(아니 자초했던) 사람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윤동주(尹東柱) 시인은 맑고 투명한 시심으로 한 시대를 치열하게 고뇌하며 살다간 항일시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학적 업적으로만 보면 윤동주 시인은 어쨌든 빼어난 인물이다. 그러나 한 개인의 운명으로만 본다면 그는 20대 나이에 ‘비명횡사’한 불행한 남자일 뿐이다. 그의 ‘운명’의 비밀을 밝히려면 그의 시에 나타난 잠재심리(마조히즘과 나르시즘, 그리고 관음증)를 면밀하게 분석해보면 된다.

윤동주의 시 ‘자화상’에는 당당한 성적 취향으로서가 아니라 죄의식 섞인 관음증과 나르시즘이 복합되어 나타난다. 우물 안에 비춰진 자기자신을 들여다 보면서 그는 일종의 나르시즘적 만족을 얻는다. 그러다가 그는 그런 심리에 빠져 있는 자기가 싫어져 우물로부터 떠나 보려 애쓴다. 하지만 그는 그게 잘 안되어 결국 ‘우물 속의 자기’로 돌아오고 만다. 이러한 모습은 우물(자궁 또는 여성성기의 상징이다)을 당당히 사랑하지도, 그렇다고 과감히 떠나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방황만 되풀이하고 있는 폐쇄적 자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몰래 엿보거나 들여다보는 정도의 찝찝한 관음적(觀淫的) 성희에 머물고 마는 우유부단한 모럴리스트였다. 그의 시들 가운데 “들여다본다”는 구절이 열 군데나 나온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그는 기독교의 금욕주의적 윤리에 함몰돼 있던 나머지, 자신의 욕구를 주체적으로 풀어버리지 못하고 오직 죄의식 섞인 관음행위(이럴 경우엔 도시증(盜視症)이란 용어가 더 적당하다)로만 풀어보려 했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도덕적 초자아가 그의 본능적 자아를 짓누르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기에 그는 ‘십자가’라는 시에서 “행복했던 사나이 예수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달리길 원했다. 감히 자살할 용기도 없고(기독교에서는 자살도 죄악이므로), 그렇다고 힘써 싸워나갈 용기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명예욕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누군가 자기를 예수처럼 ‘명분 있는 죽음’으로 몰아가 주길 바랐다.

이러한 무의식적 소망이 결국 그의 비명횡사를 자초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육체적 행복(이를 테면 성적 쾌락 같은 것)을 죄악시했기에 왠지 모를 답답함에 따른 까닭모를 적개심이 생겼고, 그러한 적개심의 화살은 마조히즘적 자학심리에 편승하여 스스로의 가슴에 부메랑처럼 날아와 박혔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어찌보면 죽음을 희구한 셈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시가 갖는 품격과는 별개로 윤동주가 그저 불쌍해 보이기만 한다. 그는 안중근 의사 같은 사람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한 사람이 아니라(그가 일제 말 창씨개명까지 해가며 굳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유약한 심성을 지닌 학구파 휴머니스트였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업적은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조작자들에 의해 과장되게 부풀려질 수도 있고 아예 묻혀버릴 수도 있다. 비겁하게 살진 않으면서 자기체질에 맞춰 야한(즉 솔직한) 정열을 추구해나가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애쓰되 자신의 명분이나 명예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이웃 전체의 구체적인 쾌락과 행복을 도모해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자세라고 나는 믿는다.

위선적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이 겉으로 표방하는 정의, 자유, 도덕 같은 것들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속아왔던가. 이 세상에서 소중한 가치는 오직 ‘솔직성’ 하나 뿐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윤동주는 당시의 문학인들 중에서는 가장 순진하고 솔직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육체적 욕구에까지 솔직하지는 못했다. 아니 그가 처한 지적 환경, 즉 보수적 퓨리터니즘이 그를 솔직하지 못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어쩌면 톨스토이도 마찬가지였다고 볼 수 있다.
-마광수 교수님의 글-
병원jtbc.jpg
필자가 보기에는 프로이드가 말년에 천착한 타나토스[죽음]와 에로스를 집착했다고 하는데 마광수 교수님은 너무 색욕에만 집중을 한다. 성행위 이후에 물건의 죽음이 존재하며 자신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면 사라줘 죽어줘야 하듯이 마광수 교수님의 리비도에 치우친 해설이라고는 하지만 윤동주에 대해 한가지 일리를 제공한다고 본다. 서시를 보면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고 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윤동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일 뿐 아니라 윤동주 시의 전체라고 볼수 있다.

윤동주 病院
살구나무 그늘로 얼골을 가리고. 병원病院뒷
뜰에 누어、젊은 여자女子가 힌옷아래로 하
얀다리를 드려내 놓고 일광욕日光浴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알른다는 이
女子를 찾어 오는 이、나비 한마리도
없다。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어왓다。그러나 나의 늙은 의
사는 젊은이의 病을 모른다。나안테는
病이 없다고 한다。이 지나친 시련試鍊、이
지나친 피로疲勞、나는 성내서는 않된다。

女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花壇에서 금잔화金盞花 한포기를 따 가슴에
꼽고 病室안으로 살어진다。나는 그女子
의 健康이―― 아니 내 건강健康도 속速히
회복回復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엇든 자리에
누어본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병원.jpg
위 사진을 보면 붉은색 표시한 병원이란 제목이 지워진 흔적이 존재한다.
윤동주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시집의 제목을 ‘병원’이라고 지으려고 했다. 세상에 온통 환자뿐이니, 이 시집이 혹시 앓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이다.

이 시는 필자가 처음 봤는데 마음의 병인지 짝사랑 상사병인지 일제 암흑기인 시대상의 우울인지 모르는 윤동주가 의사에게 갔는데 진단이 안내려지는 내용이 나온다.
한의학에서는 건강과 질병 사이의 미건강 상태를 未病미병이라고 한다. 황제내경(黃帝內經)에 따르면 성인 불치이병 치미병(聖人은 不治已病, 治未病)이라고 하는데 성인은 이미 병든 것을 다스리지(치료하지) 않고, 아직 병들지 않음을 치료한다고 했다. 서양의학적인 의사가 윤동주의 질병을 진단 및 치료하지 못함과 대비가 된다.
아무튼 윤동주는 약간 소극적인 여성적인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 여자에게 고백을 하지 못하고 겨우 그녀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런데 윤동주는 젊은 여자가 하얀 다리를 내놓고 일광욕을 하는 장면에서 욕망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기독교인이기도 하고 욕망을 제어해야 해서 참다가 질병이 났고 의사에게 진단도 받지 못하게 된다.
이처럼 여성의 다리는 남자에게 눈요기 이상의 어떤 성적인 감각을 유발하게 된다. 하지만 종아리나 허벅지가 날씬하고 각선미가 예뻐도 하체 다리에 튼살이 있다면 말짱 꽝이 된다.
불행중 다행히도 강남역 4번출구 www.imagediet.co.kr 자향미한의원에서는 다리 튼살에 대해서 ST침으로 치료를 한다.

병원32.jpg

Sort:  

Thanks for share heplfull post

Coin Marketplace

STEEM 0.18
TRX 0.16
JST 0.030
BTC 62416.00
ETH 2447.19
USDT 1.00
SBD 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