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중통원보교초의 인플레이션과 달러 가지 하락 비트코인 암호화화폐
화폐의 등장부터 관철된 '가치하락'의 법칙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라는 표현은 널리 알려진 문구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은 쉽게 이해하기 힘든 말이 아닐까 싶다. 일상생활에서 ‘구축’이라는 단어는 “진지를 구축(構築)한다”식으로 주로 쓰이기 때문이다. ‘어떤 세력 따위를 몰아서 쫓아냄’이란 뜻을 지닌 ‘구축(驅逐)’이라는 낱말은 이제 사전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법하다. ‘악화(惡貨)’나 ‘양화(良貨)’란 단어도 쉰내를 폴폴 풍기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취해진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QE)’처방도 따지고 보면 돈의 가치를 떨어뜨려 빚 부담을 줄이는 것이니 어찌 보면 오늘날도 악화가 양화를 계속 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제 저명한 경제사학자 갤브레이스는 “역사상 단 한 번도 도전받지 않은 경제법칙”으로 나쁜 돈이 좋은 돈을 쫓아버린다는 소위 ‘그레셤의 법칙’을 꼽기도 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은 금속화폐가 등장하는 것과 동시에 시작됐다. 금속 화폐는 처음에 오늘날 금괴와 비슷한 막대(bar)형이었다. 애덤 스미스는『국부론』에서 고대 로마시대 플리니우스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고대 로마인들은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시대까지 주화를 가지지 않았고 필요한 것을 구매하기 위해선 각인되지 않은 구리덩어리를 썼다”는 ‘전설’을 전했다. 문제는 매번 거래를 할 때마다 무게와 금, 은의 순도를 확인해야 했다는 점이다. 그런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막대 표면에 무게와 순도를 확인하는 인장을 찍었다. 하지만 인장은 위조하기 쉬웠고, 막대의 일부를 잘라내도 표시가 나지 않는 약점이 있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주화(금속화폐)였다. 최초의 금화와 은화는 BC 7세기 소아시아의 리디아인이 만들었다. 리디아인은 금화와 은화에 사자머리 문양을 새겼다. 금속화폐에 문양을 찍는 방법은 이웃 나라들로 퍼져 나가서 아이기나는 거북, 코린트는 날개 달린 말, 아테네는 부엉이를 화폐에 등장시켰다. 페르시아 화폐에는 사자와 황소, 활을 쏘는 궁사 등이 배치됐다. 중국 한나라에선 오수전(五銖錢)을 발행할 때 동전의 양면에 윤곽을 넣고 주조했다. 동전을 갈아서 동(銅) 가루를 얻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처럼 안전장치를 한 금속화폐도 무게와 순도 조작의 위험에서 안전하지 않았다. 화폐를 만드는 국가부터 이 같은 문제점을 ‘이용’했다. BC 6세기경 아테네를 이끌었던 솔론은 화폐를 만들면서 이익을 챙기는 ‘주조차익(시뇨리지)’관례를 최초로 만들었다. 당시 은 1달란트(talent)는 60미나(minae)였고, 1미나는 100드라크마(drachmae)였다. 은 1달란트는 6000드라크마 가치를 가지는 게 원칙이었지만 솔론은 1달란트로 6300드라크마를 주조했다. 주화 제작 첫 발부터 은화의 표면가치는 실질가치에 못 미쳤던 것이다.
로마시대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3세기 이후 로마의 영토 확장이 한계에 이르면서 정복을 통한 전리품 유입이 크게 줄었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지출은 변함이 없었다. 대규모 공사와 왕실의 사치를 위한 자금 수요는 끝이 없었다. 또 시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황제들은 많은 재물을 계속 풀어야 했다.
로마 황제들이 택한 방법은 재원확보를 위해 은화 속의 은 함량을 줄여나간 것이었다. 로마시대에는 금화(아우레우스)와 은화(데나리우스), 동화(세스테리우스) 등 3개 금속에 바탕을 둔 화폐 체제를 갖췄지만 주화의 기준은 은화인 데나리우스였다.
문제는 주화의 액면 가치는 그대로 둔 채 크기와 함량을 줄이는 ‘장난’을 쳐서 동일 양의 금속으로 더 많은 화폐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이 방법은 돈이 필요할 때 세금을 올리는 것 보다 시민들의 저항도 훨씬 적었다. 이미 1세기 중반에 플리니우스는 해마다 2500만 데나리우스가 넘는 돈이 중국, 인도, 아라비아의 사치품을 사는 데 쓰였다고 기술했다. 실제로 로마의 화폐는 인도에서 흔히 발견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결과, 화폐가치 하락이 꾸준히 발생했다. 네로 황제는 아예 도금된 화폐를 만들어 재원을 충당하기도 했다. 로마 데나리우스 은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해외에선 은 함량이 높은 특정 은화만 요구하게 됐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순도가 높은 은화를 시장에 풀지 않고 품안에 모셨다. 시장에 유통되는 것은 모두 순도가 낮은 불량 화폐뿐이었다.
54년 은 함유량이 100%에 가까웠던 로마의 은화는 68년 은함량이 90%로 줄었고, 211년엔 50%로 떨어졌다. 260년 갈리에누스 황제가 집권했을 때 은 함유량은 60%였지만 불과 8년간의 집권이 끝난 뒤인 268년에는 원래 중량의 4% 밖에 안 되는 은이 섞였다. 결국 로마제국 말기에 가면 데나리우스를 대체하는 라디에이트가 도입되지만 라디에이트는 액면가는 데나리우스의 두 배이면서도 은화에 함유된 은은 2%에 불과하고 98%는 동이었다. 296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중량 100% 은화를 새로 주조하며 화폐가지 안정을 꾀했지만 너무 늦었다.
화폐가치 하락의 법칙은 중세시대에도 계속 관철됐다. 로마제국 멸망 후 도시가 활기를 잃고, 교역이 위축되면서 화폐 자체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는 사례까지 나왔다. 브리튼 섬에선 로마군이 물러난 뒤 화폐 사용이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전면 중단됐다. 유럽 전역을 아우르던 로마라는 권력이 사라진 뒤 화폐 발행과 유통을 강제할 주체가 없어진 탓이었다.
각 지역별 봉건 제후들의 권력이 커지면서 화폐 주조권은 더욱 분열됐고, 화폐가치는 계속 급락했다. 지방의 봉건영주들이 주조한 잡다한 화폐들이 뒤섞여 유통됐다. 중세시대가 ‘위조의 시대’였던 만큼 위조화폐도 흔했다.
화폐의 공급 뿐 아니라 수요도 위축됐다. 농민들은 자급자족 경제생활을 했고, 장원제 하에서 농지 사용료는 화폐가 아니라 수확물과 노동 같은 현물로 지급됐다. 화폐는 영주들이 사치품을 사는 용도 정도로만 살아남았다. 화폐를 거래할 일이 사라지면서 금화는 시장에서 유통되는 커녕 목걸이나 기념품으로 사용됐다. 금 비축량이 적어 계속 금화를 찍어낼 수도 없었다. 동로마제국에서 보상금 형태로 유입되던 솔리두스 금화의 유입도 곧 중단됐다. 금화는 솔리두스 가치의 3분의1 수준인 트레미시스 같은 작은 단위로 쪼개지다가 사라져 버렸다. 일부 은화만 겨우 명맥을 유지했고, 금화는 9세기 이후엔 주조가 중지됐다. 은화에 비해 가치가 과소평가 됐던 금화는 유통되지 못한 채 금고 속에 보관되거나 녹여져서 금괴로 바뀌어져 은화를 사는 용도로 팔려 나갔다.
얼마 유통되지 않던 화폐마저 가치 하락과 재주조가 반복됐다. 가장 큰 이유는 일반인들의 위조(counterfeit)와 테두리 깎기(clipping) 때문이었다. 가죽가방 안에 동전을 넣고 흔들어 떨어지는 가루를 모으는 ‘땀내기(sweating)’방법도 있었다. 은행업자나 금세공업자들은 금은의 순도가 높은 양화는 자신이 보유하고 순도가 떨어지는 악화만 거래에 사용했다. 화폐 훼손에 대처해 나타난 궁극적 처방은 1663년 영국에서 처음 채택된 주화 둘레에 오돌토돌한 톱니 모양을 새기는 것이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후대 인물인 엘리자베스1세 때 왕실 재정고문이었던 토머스 그레셤(1533~1603)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고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각종 ‘범죄행위’ 탓에 화폐가치가 도저히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지면, 일차적으론 강한 처벌책과 협박을 동원했다. 1124년 영국의 헨리1세는 200여명의 화폐제조 장인을 불러 모은 뒤 100여명의 오른손을 잘라버렸다.
하지만 가장 널리 쓰인 방법은 화폐가치를 경쟁적으로 더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왕들은 기존의 화폐를 모아 중량과 순도가 다른 새로운 화폐로 찍어냈다. 이 과정에서 화폐 유통량은 과거에 비해 형편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자들의 주조차익 욕구는 여전했다. 3~5년 간격으로 기존 주화를 회수한 다음 가치가 낮은 새 디자인의 주화로 대체하곤 했다.
14세기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장2세는 영국과 전쟁에서 생포된 뒤 당시 프랑스 영토 절반에 해당하는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재위 첫해에만 18번, 그 뒤 10년 동안 70번이나 화폐를 개조했다. 1360년 몸값으로 내기 위해 3.87g 무게로 발행한 새 화폐 ‘프랑(franc)’은 이후 프랑스 화폐단위 프랑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이 같은 화폐가치 하락은 범유럽적 현상이었지만 지역별로 약간씩 수준차가 있기는 했다. P. 스퍼퍼드의 계산에 따르면 1300~1500년 유럽의 화폐가치는 잉글랜드가 1.5%, 아라곤과 베네치아가 1.9%, 보헤미아 2.5%, 한자동맹 3.9%, 피렌체 3%, 로마 2.8%, 프랑스 3.9%, 오스트리아 5%, 플랑드르 6.1%, 쾰른 16.8%, 카스티야 65% 수준으로 손실을 경험했다.
가치 하락에도 불구하고 주화가 계속 찍힌 원인으로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정부가 화폐발행을 독점한 이후 군주들은 화폐에 자신의 모습을 새겨서 국민에게 지배자의 위상을 과시하거나, 화폐발행에 따른 화폐주조차익을 획득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고 꼬집기도 했다.
게다가 재주조에 따른 비용을 왕실이 부담하지 않은 탓에 혹 순도는 좋아졌을지 몰라도 화폐의 중량은 지속적으로 줄었다. 반복적인 재주조로 영국에선 은화 1파운드가 120페니로 만들어지다가 15세기가 되면 240페니로 주조됐다. 중량이 절반으로 줄었다. 화폐를 쪼개고 자르는 행위도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주화를 8조각으로 절단해 사용하는 관습에서 ‘조각(piece)'을 의미하는 페소라는 통화단위가 만들어졌다. 해적들은 8분의1조각 이란 표현으로 페소를 지칭했고, 영어에서 ’2조각(two bits)'이라는 용어도 25센트를 의미했다.
유럽 사회가 이 같은 악순환에서 벗어날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이탈리아 상업도시들의 부상 덕이었다. 지중해 무역을 통해 금화를 주조할 만한 양이 축적된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악화 생산에 브레이크를 건 것이다.
13세기 중엽 제노바, 피렌체, 베네치아 등에서는 자체적으로 금화를 주조하기 시작했다. 연대기 작가 조반니 빌라니에 따르면 1340년경에 피렌체 주조소는 연간 35만~40만 플로린 어치의 금화를 찍어댔다. 피렌체에서 주조한 ‘피렌체 금화(피오리노 도로)’인 플로린화는 금화 하나당 순금 54그레인(gr)을 함유했고, 유럽 여러 황제와 왕들에 의해 모방됐다. 네덜란드와 헝가리에서도 통용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최종승자는 상업 중심지였던 베네치아에서 주조한 두카트 금화였다. 두카트화는 무게와 순도가 정확하게 유지됐기 때문에 국제결제를 대표하는 통화로 역할을 수행했다. 프랑스 장2세의 일부 몸값과 잉글랜드 리처드2세의 부인이었던 프랑스 이사벨의 지참금, 키프로스 자크1세의 몸값, 곤트의 존이 영국 왕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대가가 모두 두카트화로 지불됐다. 양화(良貨)가 시장의 신뢰를 양분삼아 유럽경제의 분위기를 바꿔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레셤의 법칙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았다. 중세 유럽 사회와 거울처럼 동양사회에서도 비슷한 통화가치 하락 현상이 반복됐다. 대상이 금속화폐가 아니라 지폐로 바뀌어도 마찬가지 현상이 발생했다.
경제학자 로저 부틀에 따르면 1190년부터 1240년 사이에 중국의 지폐공급은 6배 늘었고, 같은 기간 물가는 20배나 뛰었다. 원나라 시대 지폐인 ‘원보초(元寶鈔·交鈔)’의 운명은 그런 인플레이션 사례의 압축판이라 할 만 하다.
원제국은 은 중심의 경제정책을 썼다. 1260년 쿠빌라이(원 세조) 즉위를 기점으로 은본위 통화인 중통원보초(中統元寶鈔·中統鈔)를 발행하고, 일종의 태환 준비금 역할을 할 핵심물자로 원제국내 은 재고량을 엄격하게 관리했다.
하지만 지폐 사용이 늘고, 금속화폐를 제치고 지폐가 주화폐가 되면서 ‘남발’의 유혹을 피하긴 어려웠다. 군사비 등 각종 경비에 지출하기 위해 지폐를 마구 찍어댔고 원보초 가치는 폭락했다. 1287년 지원통행보초(至元通行寶鈔)가 발행되자 화폐가치 하락은 되돌릴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지원초 발행 자체가 중통초의 가치가 하락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명목가치를 이전의 5분의1로 재조정 한 뒤 출범시킨 것이기도 했다.
원보초의 근본적인 문제는 종이에 찍어낸다는 것이었다. 지질 상태에 따라 가치가 쉽게 변하는 약점이 있었는데 정부차원의 관리는 날이 갈수록 해이해졌다. 원래 원제국은 지질 관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신보초와 구보초를 교환해주는 행정기관으로 ‘행용고(行用庫)’를 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본래 임무가 방기되거나 고가의 환전 수수료가 요구되는 폐단이 발생했다. 환전이 제대로 안되면서 화폐의 가치와 신용에 대한 일반인들의 신뢰는 급격히 약화됐다.
특히 지원초를 대신해 중통원보교초(中統元寶交鈔)를 발행하면서 동전인 지정통보전(至正通寶錢)이 주조돼 함께 유통된 것은 악수 중의 악수가 됐다. 명목통화인 지폐와 현물가치를 내재한 동전이 함께 유통되면서 시중에서 지폐가 추방됐다. 그 결과 시중 물가가 10배로 뛰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정부가 군량 공급과 포상을 위한 쉬운 선택으로 지폐를 찍어대면서 원보초 가치는 급전직하했고, 시중에선 철저히 버림받았다.
그리고 이 같은 현상은 고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충렬왕부터 충목왕까지 고려왕들은 원황제와 황실로 부터 다량의 원보초를 하사받아 국왕들의 원 방문 비용과 대외무역 등에 사용했다. 하지만 공민왕대에 이르면 종잇조각이 된 원보초는 쓸 곳이 없어졌다. 결국 이는 군인들의 봉급으로 ‘땡처리’ 되거나 관료들로부터 마필을 강제 공출하면서 명목상 대가로 주어지는 형태로 악용됐다. 원제국의 화폐남발의 폐해는 이웃 한반도의 고려 지배층과 일반 백성들에게 까지 직접적인 흔적을 남겼다.
세계사속 경제사, 돈 성 권력 전쟁 문화로 읽는 3000년 경제 이야기, 글항아리, 김동욱, 페이지 89-97
위 내용을 보면 교초라는 거의 최초의 지폐가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가치하락되어 원나라와 같이 멸망한 내용이 나온다. 2007-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미국 금융위기가 발생하여 여러 은행이 파산했고 미국은 구제 금융이란 이름으로 달러를 마구 찍어내는 양적완화를 유발해서 겨우 급한 불을 껐다. 문제는 달러를 얻기 위해 수출하는 모든 한국등 국가도 원화를 평가절하하기 위해서 달러가치가 하락함을 따라 원화를 더 찍어내서 이런 양적완화에 맞추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따라서 원나라때의 화폐 남발이 고려까지 피해를 주었듯이 미국의 달러 공급이 결국 한국까지 막심한 피해를 준 사태처럼 역사가 반복된다.
결국 이런 사태가 재발되지 않기 위해서 두 가지 해결책을 제시한다. 미국 정부는 국채를 발행해 연방준비은행에 빚을 내서 달러를 찍어내지 말고 직접 발행한다. 세계 기축통화를 파운드, 위엔화, 금, 루블, 한국 원화, 엔화로 오일을 마음껏 거래하게 해야 한다.
또 2100만개만 발행되어 오히려 디플레이션등을 유발하는 비트코인등 암호화폐 블록체인 기술을 응용한 것들을 유통시켜야 한다. 역사적으로 오랜 대제국의 도덕적 해이를 유발하는 이런 국가 화폐 발행 남용권을 제한시켜야 한다.
good to know such things thank you dear friend
Good post
잘 했어.@imagediet
미국 달러화의 기축통화 가치를 포기할 수 있을지 .. 그 위치가 대체될 수 있을지, 그것을 용인할지를 모르겠네요 !
한국 역사는 매우 모호하다.
Korean history is very vag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