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가면을 쓴 이유와 존 피어폰트 모건과 연방준비은행 얼굴 흉터침치료

in #kr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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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 1837년 4월 17일~1913년 3월 31일)은 미국의 은행가로 J.P. 모건 회사를 설립했다. 미국 코네티컷주 하트퍼드 출생으로 독일 괴팅겐 대학교를 졸업했다.
남북전쟁 시절 이스트먼 이라는 사람과 함께 수표를 들고 북군에게 카빈소총을 1정당 3.5달러에 사들여 북군에게 1정당 22달러에 다시 되팔아 막대한 돈을 번다.
남북전쟁 시절 북군이 우세하면 금가격이 떨어지고 남군이 우세하면 천정부지로 뛰어 올랐다. JP모건은 이 시세 차이를 이용하여 16만달러 (현재 가치로 2천억원)의 돈을 번다. 이는 당시 북군의 지휘관 듀폰과 친밀한 관계를 이용하여 미리 전황을 파악한 모건의 전략이 뒷바침 했다.
모건은 철도 회사에 투자했다. 웨스턴 유니언이라는 전신회사를 장악하여 통신 내용을 도청하여 얻어진 정보로 금괴가 이동하는 정보를 알아낸다. 또 전신전화에 관계된 모든 회사를 집어삼켜 미국전신회사(AT&T) 라는 회사를 차린다.
아버지 헨리 S. 모건이 하던 금융업에 들어가 아버지가 죽은 후 1895년 회사 이름을 J.P. 모건 회사로 바꾸었다.
뉴욕센트럴 철도회사의 중역이된 JP모건은 영국의 로스차일드에게 철도회사 주식을 판다. 로스차일드가 대서양을 오가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는 영국측의 주주 대리인으로서 대표이사가 된다는 계약을 맺고 뉴욕센트럴 철도회사의 대표가 된다. 이로써 국제적 금융가의 지위를 확립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프랑스 정부에 자금 원조를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아들 J.P. 모건 2세가 영국과 프랑스 정부를 지원했다. 1913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사망하였고 막대한 재산을 남겼으며 그가 소유하던 막대한 양의 미술품들은 모두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증여 '소위 기증'하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바티칸의 재정관리를 JP모건에게 맡겼다. 또한 바티칸 교황청이 무솔리니와 라테란 조약 체결하고 받은 이탈리아 국채를 다양한 포트포리오로 투자하여 교황청의 재산을 증식해 준다. 이 공로로 JP모건은 교황 비오 11세에게 성 그레고리 대십자훈장을 받는다.
위 부자 모건의 내기 때문에 황당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20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에 방송된 MBC '서프라이즈'에서는 철가면을 쓴 사나이의 이야기가 방영되었다.
1900년대 초 영국에서 한 남자의 재판이 열렸는데 영국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모습을 드러낸 피고의 얼굴에는 철가면이 씌어져 있었다. 죄목은 영국의 한 작은 마을에서 허가 없이 거리에서 우편엽서를 판 죄였다. 그는 이름 없이 철가면을 쓴 사나이라고 불렸지만 이미 그는 영국에서는 유명인이었다.
1908년부터 영국 여러 도시에 나타난 그는 철가면을 쓴 채 거대한 원형 바퀴가 달린 90kg이 넘는 유모차를 끌고 경호원과 동행해 자신의 모습이 담긴 우편 엽서를 팔았다.
많은 사람들은 왜 그런 모습으로 엽서를 파는지 궁금해했지만 자신의 모습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영국 왕 에드워드 7세가 그에게 엽서를 한 장 구입하면서 사인을 요청했지만 그는 정체가 밝혀질까봐 거절했다. 그를 향한 궁금증은 날로 높아졌고 한 신문사는 그의 정체를 밝히면 1000파운드를 지급한다는 공고까지 내렸다. 또한 호텔에서 일하는 청소원이 숨어서 그가 철가면을 벗는 순간을 보려고 정체를 밝히려다 발각되었다.
재판 중 자신의 정체를 밝혀야 했던 철가면을 쓴 사나이. 그는 이 모든 것은 내기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이 사건은 영국의 한 사교클럽에서 시작됐다. 부자인 존 피어폰트 모건과 론스 데일 5세는 얼굴을 가리고 169개 영국도시와 18개국을 여행하면서 가면을 안 벗은채로 청혼을 받게 세상을 활보할 수 있는지를 두고 내기를 시작했고 해당 대상자에게 현재 가치 176억 원에 달하는 10만 유로를 주겠다며 내기를 제안했다.
결국 그는 2kg의 철가면을 쓴 채 규칙을 지키기 위해 신분을 알리지 않은 채 엽서를 팔아야 했다고. 그 와중에도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결국 가벼운 벌금형을 받고 풀려났다. 그 이후 200여명의 여성들에게 청혼을 받기도 했다. 1914년 성공을 눈앞에 두고 철가면을 벗어버렸다. 그 정체는 투자가였지만 도박으로 거지가 되었던 해리 벤슬리로 1차 세계대전의 발발 소식을 들은 뒤 군입대를 지원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철가면을 벗어던진 것이었다. 그는 "전쟁이 터졌는데 장난같은 내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실패의 위로금으로 받은 4000파운드를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전쟁 후 그는 모든 것을 잃고 가난하다 살다 79살의 나이로 쓸쓸히 사망했다고 알려졌다.

1907년 공황(Panic of 1907 또는 ‘1907년 은행 패닉’, 또는 ‘니커보커 위기’로도 알려져 있다)은 1907년 미국에서 발생한 경제 공황이다. 1907년 10월 몬태나의 구리왕(Copper King)이라고 불렸던 F. 오거스터스 하인츠 등이 ‘유나이티드 구리 회사’(United Copper Company)의 주식을 사재기하려 했던 것이 공황 발생의 계기가 되었다. 그들의 매집은 실패로 끝났고, 하인츠에게 사재기 자금을 제공했던 ‘상업국립은행’을 비롯한 여러 은행에서 뱅크런이 일어났다. 소란은 곧 관련 은행과 신탁회사에도 확산되었으며, 그 다음 주에는 당시 뉴욕 3위의 신탁회사였던 ‘니커보커 신탁회사’(Knickerbocker Trust Company)가 영업 정지를 당하면서 위기가 표면화 되었다. 니커보커 신탁회사의 도산과 관련 금융기관에서의 뱅크런에 불안을 느낀 예금자들은 모두 은행에서 현금을 인출하려 했다. 지방 은행은 시중 은행에서, 전국의 시중 은행은 뉴욕 은행에서 예금의 회수를 시도했다. 이 때문에 전국적으로 대부분의 은행에서 지급을 제한하였고, 많은 은행들이 준비금 고갈로 파산했다.
JP 모건은 위기가 심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JP 모건은 유동성을 확보하고 금융시스템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자산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뉴욕의 은행, 신탁회사를 설득해 금융 풀을 구축했다. 당시 미국은 시장에 유동성을 주기 위해 중앙은행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건이 그 역할을 한 형태가 되었다.
결국 JP 모건은 작은 공황을 해소해줘서 유명인이 되고 연방준비은행 탄생의 음모의 주인공으로 된다. 이런 공황이란 문제를 일으켜 자신이 반응해 해결하고 새로운 대안으로 연방준비은행을 설립했다. 헤겔의 변증법적 正反合정 반 합의 문제 해결 방식이다. 미국을 초월한 사립 은행 자본가 모임이 꼭대기에서 그림자 정부처럼 조종하게 한 것이다. 모건이 철가면 쓴 사람을 내세워 내기 장난질을 쳤듯이 국가가 해결 못한 작은 공황을 해결사로 나서서 미국을 노예로 만든 연방준비은행 설립의 명분을 세웠다.

알렉산더 뒤마의 철가면이란 소설이 있는데 실제 벨벳 가면을 쓴채 감옥에 갇혀 루이 16세의 쌍둥이라는 소문을 가지고 소설을 쓴 것이다. 문제는 해리 벤슬리는 두 사람의 장난질 때문에 특이한 모습을 하고 돌아다니고 그는 이용만 당한채 결국 내기에 실패했고 비참하게 죽게 되었다. 아마 복면가왕의 가수가 아닌데도 얼굴에 철가면처럼 가면을 쓰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얼굴에 베이거나 긁힌 흉터가 있거나 화상을 당해 자국이 남은 사람일 것이다. 아니면 얼굴에 거상술이나 코에 성형수술 흉터등이 있어서 일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철가면을 쓰면 타인의 이목을 자석처럼 더 끌어당길 것 같기 때문에 오히려 이렇게 얼굴을 가리는 것이 더 불가능하고 차라리 흉터침으로 치료를 받느니만 못하다.
강남역 4번출구 www.imagediet.co.kr 자향미한의원에서는 OT침이라고 불리는 수술후 흉터침으로 흉터를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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