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철수와 루시티니아 진주만 애치슨 선언 통킹만 미국의 배후인 팍스 로마나의 음모

in #kr7 years ago

주한미군 철수와 루시티니아 진주만 애치슨 선언 통킹만 미국의 배후인 팍스 로마나의 음모

인터넷 뉴스를 보니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 전략가는 2017년 8월 16일(현지시간) 현지 종합지인 ‘American Prospect’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북한의 핵을 동결하는 조건으로 주한미군을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스티브 배넌은 이날 인터뷰에서 북한 핵문제와 관련, “군사적 옵션은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는 강경한 군사 대응 가능성을 열어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정책기조와 상반되는 주장이라 논란이 됐다.

필자는 싸드 배치가 중국을 겨냥하기 때문에 싸드 배치를 반대한다. 그런데 주한 미군 철수를 말한 것이 1950년대 애치슨이 남한을 제외한 라인을 그려 한국전쟁을 유발한 것이 오버랩된다.

애치슨 라인 선언(Acheson line declaration, 애치슨 선언)은 1950년 1월 12일에 발표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에 의해 발표된 선언이다. 여기서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은 그 선언에서 발표된 미국의 동북아시아에 대한 극동방위선을 의미한다. 1950년 1월 10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의 비밀회담에 참석한 애치슨은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타이완의 동쪽 즉,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라고 말하였다. 이틀 후(1월 12일), 외교위원장 톰 코널리는 이를 대외에 발표하였다.
애치슨은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열린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 참석하여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동북아시아 방위선을 재확인하는 발언을 하였다. 태평양에서 미국의 지역방위선을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대한민국과 중화민국, 인도차이나 반도가 미국의 방위선에서 사실상 제외되었다. 이 선언은 중화민국 정부가 국공내전으로 인하여 타이완으로 천도(국부천대)한 것에 대한 미국 조야의 충격을 반영한 것이다. 더욱이 한반도는 당시까지만해도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하게 됐다는 것이 후일의 평가다. 애치슨의 이같은 선언 이후, 대한민국의 임병직 외무부장관은 즉시 주한 미국대사인 존 무초를 불러 애치슨 선언의 진의를 해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또 장면 대사에게 훈령을 보내 애치슨 발언의 경위를 신속히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애치슨은 한국이 미국의 극동방위권에서 제외된 이유에 대해 한마디 회답도 보내주지 않았다. 이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애치슨의 선언에 그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렇다면 북한 핵개발은 누가 도와줬는가? 일반적으로 김대중 대통려의 햇볕정책이라고 생각하겠지만 1994년 한반도 불바다 발언 이후 남북화해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orean peninsula Energy Development Organization, KEDO)는 1995년 3월 9일, 대한민국-미합중국-일본 삼국이 창립한 단체로, 1994년 영변 원자력 연구소에서 원자력발전소와 관련된 개발, 연구를 하는 것으로 알려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북미양자협상으로 원자력 발전소 개발연구의 봉인을 유도한 이후, 그에 따른 보상을 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의 핵심 활동은 경수로를 건설하여 북한으로 하여금 북한의 마그녹스형 발전소를 포기토록 유도하는 목적이다. 당초 계획은 2003년까지 1000메가와트인 OPR-1000 2개를 완공하는 것이었다. 미국 원조액은 알려진 것만 405백만달러, 남한은 1,455백만달러로 김일성이 죽고 홍수등 피해 나서 망해가던 북한이 기사회생을 하게 되었다.
즉 남한의 총풍사건으로 북한이 총을 쏘면 댓가를 주겠다고 한 사건처럼 북한이 미사일, 핵 실험을 할 때마다 미국은 북한 원조를 해주고 결국 중국이 오히려 더 고립되고 나중에 중국과 미국 대결에 유리한 중국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제제안을 봐도 뜬금없이 중국 저작권을 걸고 넘어지는 등 중국에 불리해지고 있다.

미국의 자해 공갈 사건은 다음과 같다.
루시타니아호는 1915년 5월 7일 아일랜드 남쪽 해안 킨세일에 있는 올드 헤드 부근에서 몇 킬로미터를 앞둔 사이에 침몰했다. 루시타니아호가 우현에 어뢰 공격을 받는 순간, 부근해안에서 봄 산책 나온 사람들은 배가 공포속에 침몰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몇 초 뒤 큰 폭발이 뒤따랐다. 18분만에 배는 1,198명의 승객,선원과 함께 침몰했다. 761명만이 살아남았으며, 사망자 중 123명이 미국인이였다. 이 사건으로 중립노선을 걷고 있던 미국에서는 참전론이 높아졌으며,결국 치머만 전보사건과 이 사건으로 미국내 반독정서가 높아졌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생존자들은 폭발이 두 차례 있었다고 했지만 기록에 따르면 U-20는 단지 한 개의 어뢰만 발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오랫동안 영국이 주장해온 것처럼 루시타니아호가 단순히 승객만을 실어나르는 배가 아니라는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일부에서는 이 배가 영국군이 프랑스에서 사용하기 위해 미국에서 들여온 고성능 폭발물을 싣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영국은 배가 침몰해 독일에 대항하는 연합군에 미국이 참여하기를 원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아무튼 미국은 원래 영국과 프랑스를 지원해주고 있는 터에 독일의 루시타니아호의 격침으로 수 많은 미국인이 죽자 중립노선에서 참전 쪽으로 기류가 기울게 된다.

중일전쟁이 난 1941년에는 일본과 미국과의 오래된 긴장이 더 고조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일본에 무기 제조에 필요한 고철 수출을 금지했으며, 석유 수출 금지, 미국 내 일본 재산 동결, 일본 선박의 파나마 운하 통과 거부로 중국 내에서의 군사행동을 위축시키고자 했다.
일본군의 공격 임박설에 대한 사전 정보들은 많았으나, 아무도 이 정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941년 1월 주일대사 조셉 그류는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계획 정보를 입수했다. 공격개시 수시간 전에 진주만 외곽에서 한 대의 잠수함이 발견되고 다른 한 대는 원인 불명인 채 침몰되었으며, 오아우 북쪽 해안 레이다 기지에서는 거대한 비행물체가 포착되었다. 많은 관리들은 일본군의 공격임박설을 알고 있었지만 묵살하고 결국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여 일본과 독일 연합이라 독일과 전쟁까지 뛰어들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의 도화선이 된 유명한 통킹만 사건이 있다. 1964년 8월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은 북베트남 측이 미국 해군의 구축함을 두 차례 공격하였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통킹 만 사건이라 불리며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된 도화선이 되었다. 하지만 실제는 한 차례의 공격만이 있었고 사건 전체는 조작이었음이 후에 밝혀졌다.

결국 미국은 첫째 남한내 싸드 배치 반대를 무력화하기 위해서 주한 미국 철수를 주장했다. 둘째 실제 주한미군 철수를 하고 북한 남침을 유도하여 조그만 꼬투리라도 잡기 위해 제 2의 6.25를 유도한다이다. 필자는 말 실수나 해프닝 우연을 믿지 않는다.
루시티니아-진주만-애치슨 선언-통킹만 사건을 통해서 역사를 보면 실체를 알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 생각에는 미국도 전쟁을 하면 자국민이 피를 흘리는데 설마 전쟁을 유도하면서까지 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것이다. 걸프전쟁을 봐도 상하원 의원 자식은 단 1명 참전을 했다. 또 미국의 전쟁하는 군인을 보면 대학도 나오지 않은 대학을 보내줄게 해서 지원한 약간 하층민의 총알받이 느낌이 강하다. 즉 미국도 케네디 대통령 참전등과 달리 부시는 징집기피자이니 노블리스 오블리쥬는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팍스 아메리카나(라틴어: Pax Americana, 아메리카의 평화) 는 20세기 후반부 서양세계의 평화와 관련한 역사적 개념이다. 미국의 역사에서 종종 남북 전쟁 이후의 시기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세계의 역사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팍스 브리타니카에 뒤 이은 국제 평화 질서를 이끈 것을 뜻한다.
이 평화의 실체는 무력의 배경이 있고 경제적으로는 석유와 달러 기축통화 유지를 위함이다.
팍스 로마나(라틴어: Pax Romana) 또는 로마의 평화는 로마 제국이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을 최소화하면서 오랜 평화를 누렸던, 1세기와 2세기경의 시기를 말한다.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던 시기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평화(Pax Augusta)’로 불리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기원전 27년에서 180년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이 시기는 고대 로마 역사상 유례없는 태평성대이긴 하였으나, 군사적인 충돌도 일어났다. 황제들은 이따금 발생하는 속주의 반란에 대처해야 했으며, 국경 지역에서는 소소한 교전이나 대규모 정복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와 전쟁을 치렀으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통치 후반기를 대부분 게르마니아 전선 등 최전선에서 지냈다. 또한 로마의 평화는 로마제국의 지배계급들에게는 태평성대였지만,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던 식민지 민중들에게는 로마의 평화유지를 위한 로마의 폭력과 착취로 고통받는 제국주의 체제였다.
팍스 로마나의 시기는 제3세기의 위기때와 같은 큰 내전이나, 2차 포에니 전쟁처럼 강력한 외적의 침공도 없이 상대적으로 평화로왔다. 이 기간 동안 로마의 상업은 융성하였다.
역사가들은 "팍스 로마나"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강대국의 폭력에 의한 가짜 평화가 등장할 때에 신조어를 만들어낸다. 팍스 아메리카나(Four Swifts with Landscape Sketches, 1887.jpg), 팍스 아시리아카(Pax Assyriaca),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 팍스 유로피아나(Pax Europeana), 팍스 게르마니카(Pax Germanica), 팍스 히스파니카(Pax Hispanica), 팍스 미노이카(Pax Minoica),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팍스 오토마나(Pax Ottomana), 팍스 시니카(Pax Sinica), 팍스 시리아나(Pax Syriana) 등이 그 예이다.
필자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배후에는 역사적으로 팍스 로마나의 의미가 있고 현재 미국은 로마와 똑같은 멸망의 길을 걷고 있으며 조지 오웰이 소설을 쓴 1984년 수교한 로마 안의 한 나라에 의해 미국이 좌우된다고 깊은 대뇌망상의 바다에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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