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매를 입은 조나라의 복장 개조와 튼살치료

in #kr9 years ago

짧은 소매를 입은 조나라의 복장 개조와 튼살치료

허베이의 문화적 맥락을 이루는 또 하나의 주제는 조나라다. 이 조나라의 전통에 관해서는 앞에서 소개한 산시편에 이미 언급했다. 산시에서 발원한 진晋에서 갈라져 나와 주우언의 나라로서는 어마어마한 개혁인 호복기사의 태풍을 만들었던 곳이다. 중원의 전통적 복장을 모두 걷어치우고, 야만시하던 북쪽 유목민족의 짧은 소매 상의와 홀쭉한 바지를 도입했던 나라 말이다. 이 조나라의 뿌리는 산시라고 해도, 그들이 터전을 잡고 활동했던 무대는 허베이 남쪽이다.
차이나 대륙 20개 주요 지역 인문 여행기- 중국이 두렵지 않은가, 유광종 저, 페이지 317

호복기사(胡服騎射)는 중국 전국시대 때 조 무령왕이 기원전 306년부터 실시한 군제 및 복제개혁이다.
전국시대 때 조나라는 흉노와 북쪽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흉노는 기병이 강했고, 한편 진나라와 산동의 다른 5국은 창보병이 강했다. 조나라에는 말은 많았지만 그 말들로 기병을 편성하지 않고 전차 운전에만 말을 사용했다. 조 무령왕은 흉노 기병과 충돌하면서 기병의 강인함과 기동성을 이해했다.
전국칠웅의 기병은 무거운 갑주를 갖추었는데, 반면 흉노 기병은 비교적 경장갑으로 여럿이 움직이며 빠르게 치고 빠지는 기동전을 구사했다. 그래서 이런 흉노의 장점을 반영한 개혁을 하기로 했고, 비의를 비롯한 대신들이 참여했다. 개혁의 일환으로 소매통이 좁고 바지를 착용하는 호복과 기마궁술을 도입했다. 무령왕의 개혁의 결과 조군은 점차 강해져서 중산국을 멸망시키고 임호와 누번을 무찔렀다. 이렇게 조나라는 전국칠웅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중국사에 진정으로 유의미한 기병이 탄생한 것은 이 호복기사가 처음이라고 평가된다. 다만 이 때는 등자가 없었기 때문에 기병이 완전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때문에 기병의 역할은 정찰이나 교란으로 한정되었고 고대 중국의 주력은 여전히 보병이었다.
호복기사를 도입한 조 무령왕(趙 武靈王, 기원전 340년 ~ 기원전 295년)은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의 왕이다. 성은 영(嬴), 씨는 조(趙), 휘는 옹(雍, 사기색은에는 거據), 숙후(肅侯)의 아들이다. 기원전 307년, 무령왕은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서 호복기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호복기사는 그때까지의 중화 세계의 귀족 전사의 전통적인 전술 즉 세 명의 전사가 마부와 활쏘기, 과라는 창을 사용한 백병전을 분담하던 전차전과는 달리, 북방 유목 민족의 특수한 훈련을 받은 전사 한 사람이 직접 한 마리의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아 대는 전법이었다. 또한 당시 대부들이 입던 소매가 길고 아랫부분이 치마처럼 생긴 옷은 말을 타는데 무척 불편했는데, 호복기사에는 유목민들이 말을 타는 데 적합한 바지 형태의 복장 즉 호복(胡服)을 입을 필요가 있었다.
무령왕이 이를 신하들에게 하문했을 때, 파의는 바로 찬성했지만 무령왕의 삼촌이었던 공자 성(成)은 반대했다. 중화사상의 견지에서 유목민을 '오랑캐'라 깔보면서 직접 말에 타는 것을 야만스러운 짓으로 여겼던 당시 무령왕과 파의를 지지하는 사람은 적었고 공자 성의 반대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무령왕은 끈질긴 설득을 통해 조에 호복기사를 도입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중국의 다른 나라에서도 기병 기술이 실시되었다. 이 해에 진(秦)에서는 무왕(武王)이 죽고 연에 있던 공자 직(稷)이 송환되어 진의 군주가 되었다. 이가 소양왕(昭襄王)이다.

조나라 무령왕을 보면 목수와 포병부사관으로까지 가장했던 표트르 1세가 생각이 난다. 표트르 1세(Пётр I Алексеевич, 1672년 6월 9일 ~ 1725년 2월 8일)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재위 1682년 ~ 1725년)였다. 표트르 대제(Пётр Великий 표트르 벨리키)로 불리기도 한다.
표트르 1세는 서구화 정책과 영토 확장으로 루스 차르국을 러시아 제국으로 성립했다.표트르1세.png
표트르는 오스만 제국의 압력에 맞서 좀 더 강력하게 대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외국과의 동맹을 계획했다. 이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서유럽 여러 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했고, 이때부터 서유럽의 기술도 배워올 수 있도록 사절단에 젊은 귀족들을 포함시켰다. 표트르 자신도 표트르 미하일로프라는 가명을 쓴 채 이 사절단에 합류하여 행동을 같이했다. 표트르는 프로이센에 가서 포병 부사관으로 가장하여 프로이센군 고위 지휘관에게 대포 조작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네덜란드로 가서는 목수 신분으로 선박 건조 기술을 익혔으며 영국에 가서는 수학과 기하학을 친히 배웠다. 그는 곧 여러 분야에 걸쳐 지식을 쌓게 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실제 그 일에 종사하는 전문가보다 더 뛰어나기까지 했다. 또한 관심의 폭을 넓혀 해부학과 응용과학에까지 손을 뻗쳤다.
그는 아직 몽골의 잔재가 남아 있던 러시아를 서유럽화하는 것을 중히 여겼는데, 서유럽보다 발전이 늦은 러시아를 근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표트르는 서유럽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여성에게는 러시아 전통의상인 긴 치마를 서유럽식으로 짧게 자르라고 했고, 무도회에 나와 술을 마시게 했다. 동양의 영향으로 긴 수염을 기르는 사람에게는 수염세를 매겼다. 또한 무질서하고 비능률적인 러시아의 전체적인 행정기구를 그 기능상 좀 더 효율적인 임무 수행이 가능하도록 개혁하기 위해 유럽의 여러 제도를 면밀히 조사하도록 한 뒤, 스웨덴을 모델로 삼아 상설 행정 기구(12행정원, 군무성, 해군성 등)를 만들고 관리들의 관등을 정한 관등표를 제정했으며, 성문법전을 만들었다. 또한 서구의 발달된 학문을 러시아에 소개하고 번잡하던 키릴 문자를 간소하게 개혁해 문자를 쉽게 익힐 수 있게 하는 한편, 학술원을 세워 학문을 장려했다. 또한 젊은이들은 유럽으로 유학 보내서 서유럽의 학문을 익히게 했고, 유럽인을 초빙하여 유럽의 문화와 기술의 도입에 힘썼다.
수염과 옷 복장등에서부터 선진 문화를 도입한 측면이 이채롭다. 원래 귀족이나 양반은 노동을 천시하기 때문에 복장이 늘어지는 도포등을 입고 짧은 소매옷이나 반바지등을 입지 않았다. 예전에 귀족여성의 치마복장을 보면 일상생활이 불편할 정도로 만들어 일을 못하게 만든 것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현대는 노동이 억지로 미덕이 되어 복장이 편리하게 되어 반바지나 짧은 미니스커트 차림으로도 일하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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