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산화된 장부처럼 나눠 보관된 윤동주의 시집중 정병욱 선생 글과 블록체인 기술

in #kr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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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윤동주

                                                        정병욱(1922~1982)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가 즐겨 거닐던 서강 일대에는 고층 건물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창냇벌을 꿰뚫고 흐르던 창내가 자취를 감추어 버릴 만큼, 오늘날 신촌은 그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 달 밝은 밤이면 으레 나섰던 그의 산책길에 풀벌레 소리가 멈춘 지 오래고, 그가 사색의 보금자리로 삼았던 외인 묘지는 계절 감각을 상실한 지 오래다. 그가 묵고 있던 하숙집 아주머니는 어쩌면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세월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마는 것이지만, 동주에 대한 나의 추억은 조금도 퇴색하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내가 동주를 처음 만난 것은 1940년,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에서였다. 오똑하게 솟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일(一)자로 굳게 다문 입, 그는 한 마디로 미남이었다. 투명한 살결, 날씬한 몸매, 단정한 옷매무새, 이렇듯 그는 멋쟁이였다. 그렇지만 그는 꾸며서 이루어지는 멋쟁이가 아니었다. 그는 천성에서 우러나는 멋을 지니고 있었다. 모자를 비스듬히 쓰는 일도 없었고, 교복의 단추를 기울어지게 다는 일도 없었다. 양복바지의 무릎이 앞으로 튀어나오는 일도 없었고, 신발은 언제나 깨끗했다. 이처럼 그는 깔끔하고 결백했다. 거기에다, 그는 바람이 불어도, 눈비가 휘갈겨도 요동하지 않는 태산처럼 믿음직하고 씩씩한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나보다 두 학년 위인 상급생이었고, 나이는 나보다 다섯 살 위였다. 그는 나를 아우처럼 귀여워해 주었고, 나는 그를 형처럼 따랐다. 신입생인 나는 모든 생활의 대중을 그로 말미암아 잡아 갔고, 촌뜨기의 때도 그로 말미암아 벗을 수 있었다. 책방에 가서도 그에게 물어 보고 나서야 책을 샀고, 시골 동생들의 선물도 그가 골라 주는 것을 사서 보냈다. 오늘날, 나에게 문학을 이해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인생의 참뜻을 아는 어떤 면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오로지 그가 심어 준 씨앗의 결실임을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그러기에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가 내 곁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는 달이 밝으면 곧잘 내 방문을 두드려서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는 나를 이끌어내어, 연희의 숲을 누비고, 서강의 뜰을 꿰뚫는 두어 시간의 산책을 즐기고 돌아오곤 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입을 여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이다. 가끔은 "정 형, 아까 읽던 책 재미있어요?" 하는 정도의 질문을 했는데, 그것에 대해 내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뚜렷이 생각나지 않지만, 그는 "그 책은 그저 그렇게 읽는 겁니다."라고 하기도 했고, 어떤 때에는 "그 책은 대강 읽어서는 안 돼요. 무척 고심하면서 읽어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책입니다."라고 일러주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독서의 범위가 넓었다.
문학, 역사, 철학, 이런 책들을 그는 그야말로 종이 뒤가 뚫어지도록 정독을 했다. 이럴 때, 입을 꾹 다문 그의 눈에서는 불덩이가 튀는 듯했다. 어떤 때에는 눈을 감고 한참 동안을 새김질을 하고 나서 다음 구절로 넘어가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공책에 메모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읽는 책에 좀처럼 줄을 치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만큼 그는 결벽성이 있었다.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자, 일본의 혹독한 식량정책이 더욱 악랄해졌다. 기숙사의 식탁은 날이 갈수록 조잡해졌다. 학생들이 맹렬히 항의를 해 보았으나, 일본 당국의 감시가 워낙 철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1941년, 동주가 4학년으로, 내가 2학년으로 진급하던 해 봄에, 우리는 하는 수 없이 기숙사를 떠나기로 했다. 마침, 나의 한 반 친구의 알선이 있어서, 조용하고 조촐한 하숙집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매우 즐겁고 유쾌한 하숙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숙집 사정으로 한 달 후에 그 집을 떠나야만 했다.
그 해 5월 그믐께, 다른 하숙집을 알아보기 위해, 아쉬움이 가득 찬 마음으로 누상동 하숙집을 나섰다. 옥인동으로 내려오는 길에서 우연히, 전신주에 붙어 있는 하숙집 광고 쪽지를 보았다. 그것을 보고 찾아간 집은 문패에 '김송'이라고 적혀 있었다. 설마 하고 문을 두드려 보았더니, 과연 나타난 주인은 바로 소설가 김송, 그분이었다.
우리는 김송 씨의 식구로 끼어들어 새로운 하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우리는 대청에서 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고, 문학을 담론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성악가인 그의 부인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의 생활은 알차고 보람이 있었다.
동주의 시집 제 1부에 실린 많은 작품들이 그 해 5월과 6월 사이에 쓰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비록 쓸모는 없었지만, 마음을 주고받는 글벗이 곁에 있었고, 암울한 세태속에서도 환대해 주는 주인 내외분이 있었기에, 즐거운 가운데서 마음껏 시를 쓸 수 있었으리라.
동주의 주변에도 내 주변에도, 별반 술꾼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술자리에 어울리는 일은 별로 없었다. 가끔 영화관에 들렀다가 저녁때가 늦으면 중국집에서 외식을 했는데, 그 때 더러는 술을 청하는 일이 있었다. 주기가 올라도 그의 언동에는 그리 두드러진 변화가 없었다. 평소보다 약간 말이 많은 정도였다. 그러나 비록 취중이라도 화제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그의 성격 중에서 본받을 점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본받아야 할 것의 하나는 결코 남을 헐뜯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술이 들어가면 사람들의 입에서는 으레 남에 대한 비판이나 공격이 오르내리게 마련이지만, 그가 남을 헐뜯는 말을 나는 들어 본 기억이 없다.
1941년 9월, 우리의 알차고 즐거운 생활에 난데없는 횡액이 닥쳐왔다. 당시에 김송 씨가 요시찰 인물이었던 데다가 집에 묵고 있는 학생들이 연희 전문학교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를 감시하는 일제의 눈초리는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일본 고등계 형사가 무시로 찾아와 우리 방서가에 꽃혀 있는 책 이름을 적어 가기도 하고, 고리짝을 뒤져서 편지를 빼앗아 가기도 하면서 우리를 괴롭혔다. 우리는 다시 하숙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마침, 졸업반이었던 동주는 생활이 무척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진학에 대한 고민, 시국에 대한 불안, 가정에 대한 걱정, 이런 가운데 하숙집을 또 옮겨야 하는 일이 겹치면서 동주는 무척 괴로워하는 눈치였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중요한 작품들을 썼다.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서시' 등은 이 무렵에 쓴 시들이다.
동주는 시를 함부로 써서 원고지 위에서 고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즉, 한편의 시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주일, 몇 달 동안을 마음속에서 고민하다가, 한번 종이 위에 옮기면 그것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의 시집을 보면, 1941년 5월 31일 하루에 '또 태초의 아침', '십자가', '눈 감고 간다' 등 세 편을 썼고, 6월 2일에는 '바람이 불어'를 썼는데, 동주와 같은 과작의 시인이 하루에 세 편의 시를 쏟아 놓고, 이틀 뒤에 또 한 편을 썼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머릿속에서 완성된 시를 다만 원고지에 옮겨 적은 날이라고 생각할 때에야 비로소 수긍이 가는 일이다. 그는 이처럼 마음속에서 시를 다듬었기 때문에, 한 마디의 시어 때문에도 몇 달을 고민하기도 했다. 유명한 '또 다른 고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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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라는 구절에서 '풍화 작용'이란 말을 놓고, 그것이 시어답지 못하다고 매우 불만스러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그대로 두었지만, 끝내 만족해하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자기의 작품을 지나치게 고집하거나 집착하지도 않았다. '별 헤는 밤'에서 그는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로 첫 원고를 끝내고 나에게 보여 주었다. 나는 그에게 넌지시 "어쩐지 끝이 좀 허한 느낌이 드네요". 하고 느낀 바를 말했었다. 그 후, 현재의 시집 제1부에 해당하는 부분의 원고를 정리하여 '서시(序詩)'까지 붙여 나에게 한 부를 주면서 "지난번 정 형이 '별 헤는 밤'의 끝 부분이 허하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끝에다가 덧붙여 보았습니다." 하면서 마지막 넉 줄을 적어 넣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이처럼, 나의 하찮은 충고에도 귀를 기울여 수용할 줄 아는 태도란, 시인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임을 생각하면, 동주의 그 너그러운 마음에 다시금 머리가 숙여지고 존경하는 마음이 새삼스레 우러나게 된다.
동주가 졸업 기념으로 엮은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의 자필 시고는 모두 3부였다. 그 하나는 자신이 가졌고, 한 부는 이양하(李陽河) 선생께, 그리고 나머지 한 부는 내게 주었다. 이 시집에 실린 19편의 작품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수록된 시가 '별 헤는 밤'으로 1941년 11월 5일로 적혀 있고, '서시'를 쓴 것이 11월 20일로 되어 있다. 이로 보아, 그는 자선 시집을 만들어 졸업 기념으로 출판하기를 계획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시고를 받아 보신 이양하 선생께서는 출판을 보류하도록 권하였다 한다. '십자가', '슬픈 족속', '또 다른 고향'과 같은 작품들이 일본 관헌의 검열에 통과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변에 위험이 따를 것이니, 때를 기다리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실망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선생의 충고는 당연한 것이었고, 또 시집 출간을 서두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집 출판을 단념한 동주는 1941년 11월 29일에 '간(肝)'을 썼다. 작품 발표와 출판의 자유를 빼앗긴 지성인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달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노여움이 가라앉으면서 1942년 1월 24일에 차분히 '참회록'을 썼다. 어쩌면 이것이 고국에서의 마지막 작품이었을지도 모른다. 1942년,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그는, 이듬해인 1943년 7월에 독립 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2년 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조국광복을 불과 반 년 앞둔 1945년 2월 16일, 감옥 안에서 28세의 젊은 나이로 원통하게 눈을 감았다.
이제, 동주는 세상을 떠나고 없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즐겨 외는, 그의 대표작 '별 헤는 밤'의 끝 넉 줄은, 단순히 시구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그의 고향인 북간도 용정에 있는 동산 마루턱에 묻힌 그의 무덤 위에는 이 봄에도 파란 잔디가 자랑처럼 돋아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주는 멀리 북간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시 속에 배어 있는 겨레 사랑의 정신은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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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학 기행: 방민호 교수와 함께 걷는 문학도시 서울
누상동 9번지 하숙집의 룸메이트였던 윤동주와 정병욱. 바로 이 시기에 윤동주는 자기 시 열여덟 편이 담긴 원고 세 부를 손수 필사합니다. 그렇게 만든 수기원고 한 부는 자신이 갖고, 나머지는 함께 하숙하던 정병욱 은사인 이양하 교수에게 각각 한 권씩 선물하지요. 이양하 교수에게 수기원고를 준 것은 출판을 주선해 달라고 한다.

1941년 12월 27일,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학교 4학년을 졸업하게 된다.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작품을 모아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본래 예정했던 시집 제목은 병든 사회를 치유한다는 상징인「병원」이었으나 「서시」가 씌어진 후 위와 같은 제목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윤동주는 같은 시고집 3부를 작성하여 가장 존경하는 교수인 이양하 선생과 친한 후배 정병욱에게 1부씩 증정하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제의 검열에 의해서 시가 통과되지 못할 것이라는 이양하 교수의 권고에 의해 윤동주는 출판을 단념하게 된다. 정병욱이 받게 된 시고집 1부는 정병욱이 학병으로 끌려가기 전에 자신의 집에 소중히 보관해 달라고 어머니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윤동주의 시를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정병욱 보관본에 의한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생전에 출판되지 못하고 지인 강처중, 정병욱 등이 윤동주의 자필본을 기초로 1946년에 출판했다. 세간에는 정병욱(1922~1982)이 이 시집 출간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아니고 경향일보 기자 강처중이 주도적이었다. 거기에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 등이 합세. 원래 19수의 시만 있던 시집(1946)이 31편의 시집(1948)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이 시집을 간행할 적 경향일보 주필이던 정지용이 도움을 주었으며 추천사를 써준 것도 정지용이었다. 그러나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 정지용과 강처중은 각각 납북, 월북 등의 사정으로 1980년대 후반까지 이름을 언급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바람에 정병욱 교수만이 도움을 주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윤동주의 7살 터울 여동생 윤혜원씨가 1948년 12월 고향 집에서 윤동주의 미발표시(85수)들을 품에 안고 내려와 현재의 116편의 시가 실려 있는 시집이 되었다. 그 밖에도 윤동주는 2권 분량이 될 시를 남겼으나 스승 이양하(1904~1963)에게 이걸 전해 주었는데 여러 사정으로 분실되어 사라졌다고 한다. 범우사(윤동주 시집)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가 남은 이유는 필사하여 여러 3사람에게 나누어 주었고 동생과 여동생까지도 시를 가지고 있었던 덕분이다. 아마 시 별헤는 밤에도 나오는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 ” 죽음을 예감했는지 자신의 시를 남기기 위한 분산화된 방법을 고안한 듯하다. 그 덕분에 겨우 보존이 되어 아름다운 시를 읽게 되었다. 흡사 조선왕조 실록이 임진왜란때 다 타버렸는데 전주사고본만 남아서 조선왕조 실록이 보존되고 남은 것과 비슷하다.
승정원 일기는 한 부 뿐이라서 중간에 소실된 것과 많은 것과 대비된다.
모든 문서기록은 카피를 하고 백업을 해서 남겨야 한다. 블록체인 기술이면 자연적으로 해결이 된다. 블록체인 자체가 분산화된 장부처럼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한 컴퓨터가 폭격을 맞던 불에 타던 유실되던 절대 데이터가 사라지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윤동주 시정도 가치가 있는 것은 정부에서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 보관을 해야 한다. 또한 기술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블록체인 기술 뿐만 아니라 블록체인으로 만들어진 코인 암화화폐에 대해서도 진흥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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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e post thanks for sharing...

이건 놀라운 시야. 좋은거야.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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