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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황제권의 주요 기반은 군대였다. 황제 금고에서 봉급을 받았던 군단 병사들은 해마다 황제에 대한 충성 서약(sacramentum)을 했다.[9] 황제가 죽으면 위기 상황이 닥치기도 했다. 규칙상으로는 원로원이 새 황제를 선출해야 했지만, 거의 대부분의 황제는 자신이 후계자를(보통 자신의 혈족) 지명하였다. 새 황제는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신속히 황제권을 인수해야 했다. 근위대와 군단의 충성을 얻지 못하면 황제는 권좌를 지킬 수 없었다. 이들의 충성을 얻기 위해 여러 황제는 이들에게 군대 포상(donativum)을 지급하였다.
제정 이후에도 로마의 민회는 존속하였으나 실권은 모두 원로원으로 넘어갔으며, 원로원의 결의(senatus consultum)는 법적인 효력이 있었다.[10]
이론상 황제는 원로원과 동등한 정부 기관이었지만, 원로원의 실권은 거의 없었고 주로 공화정의 탈을 쓴 제정을 위장하기 위한 기구에 불과하였다.
거의 대부분의 황제는 오래된 정치 기구인 원로원을 존중했지만, 이를 우습게 보는 황제들도 있었다. 원로원 회의시 황제는 두 집정관 사이에 앉아[11] 회의 주재자처럼 행세하였다. 서열이 높은 의원이 낮은 의원보다 먼저 발언하는데, 황제는 언제든지 발언할 수 있었다.[11] 3세기에 이르면 원로원은 실권은 전혀 없는 명예직, 또는 시의원 정도로 격하되고 만다.
군사
하드리아누스 시대 로마 제국. 기원후 125년 당시 로마 군단의 위치를 보여주고 있다.
로마 군단, 보조군, 로마 해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군단
내전기와 이후에 옥타비아누스는 비대해진 규모(60개 이상)의 군단을 해산하고, 국방과 유지에 적절한 규모(28개 군단)로 줄였다.[12] 여러 군단들, 특히 충성심이 의심되는 군대는 완전히 해산되었다. 어떤 군단들은 합병되기도 했는데, '게미나'(gemina 쌍둥이[*])[12] 란 군단명을 보면 알 수 있다. 기원후 9년 게르만 부족들이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3개 군단을 궤멸시켰다. 이 재앙으로 군단의 수는 25개로 줄었다. 군단 수는 나중에 다시 늘어, 이후 300여년 간 30개 안팎 수준이었다.[13] 아우구스투스는 근위대도 창설하였는데, 9개 대대로 구성된 이 군대는 이탈리아에 주둔하며 표면상 치안 유지 기능을 맡았다. 군단보다 더 후한 봉급을 받은 근위대는 복무 기간도 짧아, 일반 군단병의 복무기간 20년과 달리 이들은 기간이 16년에 불과하였다[14].
보조군
보조군은 군단보다는 유명하진 않았으나, 로마의 중요한 군대였다. 군단병과 달리 보조군은 非시민 가운데서 선발하였다. 대대 병력 정도의 작은 단위로 조직되었으며, 군단병보다 봉급도 적었으나, 25년의 복무 기간을 마치면 로마 시민권을 얻었으며, 시민권은 자손에게 대대로 이어졌다. 타키투스에 따르면,[15] 보조군 병력은 군단과 유사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각각 약 5,000여명으로 구성된 25개 군단이 있었으므로, 보조군 병력의 총 수는 125,000 명 정도로 볼 수 있으며, 대략 250개 보조군 부대가 있었을 것이다.[16]
해군
로마 해군(classis 함대[*])은 군단의 보급과 이동을 보조할 뿐 아니라, 라인강이나 도나우강의 국경 방어도 지원하였다. 또 해적에 대비하여 해상 무역로를 지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로마 해군은 지중해 전역, 북대서양 일부 해역(히스파니아, 갈리아, 브리타니아 해안)을 순항하였으며, 흑해에도 해군이 있었다. 그러나 해군보다는 육군이 더 상위에 있고 인정받는 병과였다.[17]
속주
공화정 시대에 속주 총독은 전통적으로[18] 원로원 계급의 몫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개혁으로 이 관행을 바꾸었다.
황제 속주
아우구스투스는 황제 속주를 창설하였다.[18] 황제 속주는 대부분 얼마 전에 정복하거나 국경과 가까운 지방이었다. 따라서 국경에 주둔하는 절대다수의 군단이 황제의 직접적인 통솔하에 있었다. 가장 중요한 곳은 아이깁투스(이집트) 황제 속주로, 로마 제국의 주요 곡창지대로써 이곳을 통해 수입하는 곡물은 로마 시의 대중을 먹여살리는데 매우 중요하였다. 이 지역은 황제의 개인 소유지로 여겨졌으며, 원로원 의원은 이 지역에 들어올 수 없었다. 아이깁투스 속주 총독과 이 지역 군단 사령관들은 원로원 계급 출신이 아니라, 기사 계급 중에서 황제가 선택한 사람이 맡았다.
원로원 속주
원로원 속주에서는 전통적인 정책이 주로 변하지 않았다. 변경과 떨어져 있으며 오랫동안 로마의 지배를 받아온 이곳 속주는 대개 평화롭고 안정 상태였다. 원로원 속주 한 곳에 일개 군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아프리카 속주(오늘날 알제리 북부)의 제3 아우구스타 군단이었다.
각 속주의 지위는 원로원 관할에서 황제 관할로, 혹은 그 반대로 변할 수도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다.[18] 또 새로운 속주가 많이 설치되었는데, 대부분은 기존 속주를 분할한 것이고, 새로 정복한 지역을 속주로 삼기도 하였다.
종교
기원전부터 4세기까지의 초기 로마는 그리스 신화를 이어받아 종교로 공인되었다. 그러다 로마 제국이 이집트와 중동 지역을 정복하고 나고서는 이집트 신화나 중동 지역의 신화를 믿기도 했고, 나중에 들어온 기독교는 처음에는 박해를 받았다가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을 반포 한 뒤에는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황제 숭배
황제에 대한 충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제국 주민은 황제 숭배에 참가하도록 불려가서 황제와 황가의 일원을 신으로 모셨다. 황제 숭배의 중요성은 조금씩 커져서, 3세기의 위기에 정점에 이르렀다. 특히 제국의 동부 지역에서는 황제 숭배가 널리 보급되었으며, 황제 숭배 시설은 로마의 여러 도시 내 생활에서 중요한 장소였다. 또 황제 숭배는 로마화의 주요 기관이기도 하였다. 황제 숭배는 기존의 신전에서 치르는 의식에 부가되거나, 공중 목욕탕의 특별실에서 관련 의식을 치르기도 하였다.
황제 숭배를 얼마나 진지하게 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떤 로마 사람은 황제가 살아있는 신으로 여겨진다는 생각을 우습게 보거나 황제가 죽은 뒤 신격화되는 일을 비웃기도 하였다. 소 세네카는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호박으로 만들기(Apocolocyntosis divi Claudii)라는 풍자시에서 황제 신격화를 풍자하기도 하였는데, 여기서 멍청하게 묘사되는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신이 아닌 호박이 돼버린다. 사실 신랄한 비판은 54년 클라우디우스의 장례에서 일어난 바 있다.
기독교
기독교에 관한 제국의 박해가 시작된 것은 네로 황제 시절부터였고, 2세기~3세기에 이르러서는 전국적인 대박해가 여러 번 발생한다. 4세기에 이르러서 311년에 서방 정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존의 종교들로는 로마 제국을 하나로 뭉치지는 못하다는 것과 황제의 권위를 강화시키는데 기독교가 적합하다는 것을 깨달고 동방 정제 리키니우스와 함께 A.D313년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기독교를 인정하였고, 이후 급속도로 퍼져나가 이단 논쟁에도 불구, 테오도시우스 1세는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다. 이로써 다신교적 다양성을 기반으로한 로마적 종교관,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 그자리에 점차 기독교가 대체하기 시작한다.
언어
주로 사용하는 언어는 라틴어로, 로마 제국의 모든 관청과 대부분 지역에서 이 언어를 활용하였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대단히 광대한 영토를 소유한 나라였기 때문에 전 국민을 라틴어로 말하도록 할 수는 없었다. 대개의 지역은 토착어를 그대로 활용하였으며 특히 아테네를 포함한 헬라스 지역에서는 거의 라틴어를 쓰는 경우가 없었다.
한편 지식인들은 라틴어를 사용하기보다는 학술언어로써 그리스어를 사용하곤 하였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유명한 저서 <명상록>을 그리스어로 썼다.
건축
건축 기술
로마시대의 건축 기술은 로마 제국 이전에 로마 땅을 점령하고 있던 에트루리아의 건축 기술력과 그리스의 헬레니즘이 토대가 되어 형성되었다.
콘크리트
로마 시대 때는 거푸집을 이용한 방식과 돌을 쌓고 그 사이에 접착제의 역할을 콘크리트로 하는 오푸스 세멘티쿰(Opus cenmenticum)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하였다. 로마 시대의 콘크리트는 소석회 반죽과 포촐라나(pulvis puteolanum)와 인근 화산에서 가져온 가벼운 부석(浮石), 주먹 크기의 돌들로 만들어졌다. 지금의 콘크리트와 유사하지만 그 당시에는 방수능력이 뛰어나지 못하였기에 방수의 목적과 외장의 목적으로 거푸집을 이용해 벽을 세운 뒤 겉에 작을 돌이나 바위로 마무리를 하였다. 오푸스 세멘티쿰은 초기 불규칙한 돌을 불규칙하게 쌓는 오푸스 인케르툼(Opus incertum)에서 네모난 돌을 규칙적으로 쌓는 오푸스 콰드라툼(Opus qudratum), 오푸스 테스타케움(Opus testaceum) 장식적인 효과를 주기 위하여 돌을 마름모형태로 쌓은 오푸스 레티쿨라툼(Opus reticulatum)까지 발전하였다.
문학작품
HBO의 TV 드라마, "Rome" 시즌1의 DVD 세트 [1] 에미상 다수 수상.
콜린 매컬로(Colleen McCullough)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Masters Of Rome)시리즈.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 The First Man in Rome - 2. Grass Crown - 3. Fortune's Favorites - 4. Caesar's Women - 5. Caesar - 6. The October Horse - 7. Antony and Cleopatra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