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와 시작된 그날
메마른 사람들에 지쳐갔던 여름이 시작되던 인사동 좁은 골목 술잔이 침묵을 강요했던 그 자리는 구름 같은 사람들이 바람이라고 우겨대던 윽박의 공간이었다 그렇게 이성이 배반당하는 시간이 오히려 고된 억압의 해방구였을지도
배반과 질시와 조롱이 독사의 혓바닥처럼 날름대던 순간 네가 내 앞에 반달눈으로 웃고 있었기에 내 안의 퇴폐는 더 이상 소돔이 될 수 없었고 내 이성은 고모라처럼 침몰할 수 없었다 그렇게 넌 어느새 선배라는 하릴없는 호칭으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난 울지 못하는 벙어리 매미였고 이치에 어두운 청맹과니여서 목 놓아 부르지도 멀리 날아가자는 말도 할 수 없었고 무엇 하나 올바르게 보지 못했다 사실 세상을 등진 남자에게 여자란 금지된 유혹 거추장스럽지도 불편하지도 않았지만 가난한 능력마저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운 존재였음을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 그레트헨과 헬레나를 얻었지만 내겐 귀신조차 탐내지 않을 고단함만 내면을 가득 메워 너를 가까이 할 수 없었다 오랜 시간 지친 삶이 엉덩이를 걷어 찬 탐탁지 않은 오후 네가 나를 찾아왔고 그렇게 너와 시작된 그날 사탄에게 내가 가진 한 가지를 팔았다.
내 거래의 목록은 그때까지 나를 지탱했던 세상에 대한 지독한 불신이었고 내가 받은 저주는 단단한 믿음이었다 벗어날 수도 매듭을 풀 수도 없는 견고한 결계 바로 한 사람을 영원히 사랑해야만 하는 구속 그로 인해 냉철한 이성은을 잃었지만 따뜻한 감성을 얻었다 이것이 내가 너와 시작된 그날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