멱라수에 몸을 던진 굴원과 약속을 믿은 초나라 회왕의 바보스러움 암호화폐 신용DAICO
굴원(屈原, 기원전 340년 ~ 기원전 278년)은 중국 전국 시대 초나라의 시인 · 정치가다. 성은 미(羋), 씨는 굴(屈), 이름은 평(平)이다. 초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나 초나라의 회왕 때에 좌도(보좌관)에 임명되었다. 학식이 높고 정치적 식견도 뛰어난 정치가였으며, 회왕의 상담역으로 국사를 도모하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으나, 다른 이의 모함을 받아 신임을 잃고 끝내 자살하였다. 그는 이러한 아픔을 시 이소(離騷)에 담아 내었다. 이소란 '우수에 부딪힌다'는 뜻이다.
진나라의 소왕은 초 회왕의 진나라 방문을 요청하였다. 굴원은 반대하였으나, 회왕은 막내 아들 자란의 권유에 따라 진나라에 방문하였다가 억류당한 채 병사하였다. 큰아들 경이 경양왕으로써 왕위에 올랐고, 회왕의 막내 아들은 영윤으로 임명되었다. 굴원은 자신의 뜻이 반영되지 않고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되자 낙담하였다. 마침내 양왕은 자란과 상관대부의 중상모략에 불구하고 굴원을 강남으로 추방하였다.
다음은 회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이소의 한 부분이다.
일월은 홀연하여 멈추지 않고
봄과 가을은 어김 없이 바뀐다
초목이 영락하는 것을 생각하고
미인이 늙어감을 두려워 한다
굴원은 멱라(汨羅江)에 돌덩이를 품에 안고 몸을 던져 죽었다. 굴원의 시 회사부를 통해 굴원이 투신한 때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초나라는 이후 나날이 영토를 진나라에 빼앗기다가 50여년 뒤 결국 진나라에 멸망당했다.
멱라(汨羅)는 후난 성 상수(湘水)의 지류로 동정호로 흘러들어간다.
굴원을 이해하려면 초나라 회왕의 진나라를 믿은 바보스러움을 알아야 한다.
초 회왕(楚 懷王, ? ~ 기원전 296년)은 중국 초나라의 제37대 군주(재위: 기원전 329년 ~ 기원전 299년)이다. 이름은 괴(槐)이다. 그는 초나라의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인 초 의제의 서고조부이다.
기원전 329년 초나라의 왕으로 보위에 올랐다. 그는 진나라와 초나라와 위나라에서 활약을 한 당대 화제의 모사였던 장의가 자행을 한 감언이설(甘言利說)과 변설(辨說)과 궤계(詭計)와 간책(奸策)에 놀아나 초나라의 국력을 낭비로 소진하였다. 끝내 진나라의 계략과 조나라의 배신에 휩쓸려 기원전 299년 초나라의 왕의 자리에서 폐위된 후 그의 아들이 초나라의 군왕 보위를 이어받았으며, 왕위에서 폐위된 지 3년 후 기원전 296년 쓸쓸히 죽었다.
그의 직계 서고손자인 초 의제는 초나라 왕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초 회왕 16년(기원전 313년), 초나라는 제나라와 함께 진(秦)나라의 곡옥(曲沃) 땅을 쳤으나 진나라의 반격으로 그 계책은 실패했다. 그리고 진나라가 장의를 보내 상오의 600리의 땅을 주겠으니 제나라와 우호를 끊으라고 했는데, 초 회왕은 제나라 사람인 진진이 간하는 말을 듣지 않고 장의의 말을 그대로 믿고 제나라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하면서까지 우호를 끊었다. 그러나 장의는 나중에 입을 쓱 닦고 "저는 600리 땅을 주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제 봉토 6리라도 가져가시겠습니까?"라고 하여 초 회왕을 열 받게 했다. 그리고 초 회왕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진나라와의 우호를 끊고 진나라를 치려 했다.
초 회왕 17년(기원전 312년), 결국 진나라의 반격을 받게 되었고, 초나라는 단양에서 패하고, 한중 땅을 잃고 남전에서 보낸 초군도 진나라에게 패하고 말았다.
초 회왕 18년(기원전 311년), 진나라는 초나라의 소릉 땅까지 빼앗았다. 같은 해에 진 혜문왕은 한중의 절반을 나누자고 했는데, 초 회왕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다른건 다 필요 없고 장의 그놈을 원한다! "
그래서 진 혜문왕은 머뜩치 않은대로 장의를 보냈다. 그러자 초 회왕은 장의를 장의사 부르게 하고 죽이기 위해 날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장의는 미리 초 회왕의 측근 근상과 초 회왕의 정실이자 총애하는 부인인 정수를 매수해 그들의 힘으로 장의는 살아 돌아왔다. 탄식해마지 않으며 장의를 잡아 죽이라고 했다. 이에 마음이 변한 초 회왕은 장의를 추격하게 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초 회왕 30년(기원전 299년), 진나라는 진 소양왕이 맹약을 맺자는 이유로 불렀다. 초 회왕은 처음에는 의심하고 가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은 소저의 설득으로 군대를 거느리고 갔다.
그러나 송양공과는 달리 군대를 끌고 갔다고 하나 진나라가 속임수로 억류하는데는 어쩔 수 없어서 결국 초 회왕은 송 양공보다도 처참한 꼴을 당하고 말았다. 결국 억류되어 진나라에 나오지 못하고 끝내 다시 돌아가 초나라의 왕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된다.
진소양왕은 검중 땅을 내놓으면 풀어주겠다고 했으나 초 회왕은 듣지 않았다.
초나라 회왕은 600리 땅을 준다는 말에 속아 제나라와 관계를 단절해 6리만 얻었다. 또한 동맹을 맺자는 약속에 또 속아서 갔다가 납치되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쓸쓸하게 사망을 했다. 이렇게 믿음이 땅에 떨어진 이유는 말세인 전국시대였기 때문이다.
중이가 초나라에 갔을 때 초나라 성왕은 중이를 정중히 대접하며 중이에게 “만약 당신이 진나라로 다시 돌아간다면 내게 어떻게 보답하겠소?”하고 물었다. 이에 중이는 “훗날 진나라와 초나라가 전쟁을 하게 된다면 제가 왕께 90리를 물러 양보하겠습니다” 그후 중이가 진나라로 돌아가 왕이 되고 초나라와 “성복의 전투“를 하게 되었다. 중원의 패권을 다투는 싸움이었다. 이 전투에서 진문공은 약속대로 90리를 물리고 싸움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이겨 진문공은 중원의 두 번째 패자가 될 수 있었다.
진나라에서 소자 은(憖)을 제나라에서 국귀보(國歸父)를 보내, 진 문공과 송 성공과 함께 성복에 주둔했다. 이즈음 극곡이 죽어 선진이 상군 대장이 되고 서신(胥臣)이 하군을 보좌했다. 초나라는 자옥이 중군을 맡고 자서(子西)가 좌군을, 자상(子上)이 우군을 맡았다. 서신은 말에 범 가죽을 씌우고 초나라의 우군에 속한 진나라와 채나라 군대를 공격했다. 진나라와 채나라 군대는 달아났고 초나라 우군도 붕괴했다. 한편 호모는 군용 깃발의 일종인 패(斾)로 퇴각 신호를 보냈고, 난지가 수레에 섶을 실어 거짓으로 달아나는 체 했다. 초나라가 이를 보고 뒤쫓자 진나라 중군인 선진과 극진이 초나라 군대의 측면을 습격했고 호모와 호언도 함께 자서를 공격했다. 이렇게 초나라 좌군도 패퇴했다. 초나라의 양 날개가 모두 패배하자 자옥은 남은 군사들을 모아 진나라의 진격을 저지하고 물러났다.
이 전투의 승리로 정나라는 즉시 진나라에 귀순했고, 채나라와 진나라와 허나라도 진나라에 복종했다. 진 문공은 자신을 따르는 제후들을 모으고 주나라 왕을 모셔 천토에서 회맹을 주최해 패업을 이룰 수 있었다.
춘추시대 5패는 약속을 하면 무조건 지키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다. 하지만 전국시대에 가면 전쟁을 밥먹듯이 하고 식언을 하니 구두 약속은 정말 그냥 약속일 뿐이다.
전쟁과도 같은 현대에도 사실 한 말을 뒤집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대통령, 국회의원등이 많은데 당선만 되면 그전의 약속을 모른체한다.
비탈릭 뷰테린은 2018년 1월 ICO가 중앙화된 조직에 의해 이뤄지는 것을 문제점으로 진단했다. DAICO 다이코는 탈중앙화 자율조직을 뜻하는 DAO(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와 ICO의 합성어로, 두 모델을 병합해 위험성을 최소화하도록 설계됐다. 다이코를 처음 시작하는 것은 개별 개발팀이지만 스마트 계약에 의해 이 조직이 프로젝트의 방향을 자신의 이익에만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끌지 않도록 방지할 수 있다.
또 다이코 매커니즘은 토큰 보유자가 프로젝트 내에서 이뤄지는 의사 결정에 투표로 참여할 수 있게 한다. 토큰을 가지고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의 투표권에 ‘게임이론’을 적용해 51% 공격 가능성을 제거한다.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국민 소환제를 통해서 뱀의 혀바닥을 놀리면서 공산주의, 파시즘 독재를 펼치려고 한 자들을 끌어내야 한다.
필자는 우선 헌법 119조도 안지키면서 푸틴이나 시진핑처럼 자기 장기개헌하려는 현재 대통령에 대해서 박근혜처럼 당하지 말고 임기를 마치지 않고 그냥 대통령직을 하야 하기를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