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요약-50개의 키워드로 읽는 자본주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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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개의 키워드로 읽는 자본주의 이야기
김민주 지음
미래의창 / 2015년 6월 / 368쪽 / 16,000원
▣ 저자 김민주
트렌드 및 마케팅 컨설팅 회사인 (주)리드앤리더 대표이다. 대기업ㆍ정부기관ㆍ비영리기관을 대상으로 경영 컨설팅 활동을 하고 있으며 경제ㆍ사회ㆍ문화ㆍ환경ㆍ기술 이슈를 넘나들며 다양한 주제로 강의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분야를 매크로 마케팅이라 부른다. 서울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한국은행과 SK에서 근무했고, 건국대학교 경영대학원 겸임교수와 국회 입법조사처 자문위 원으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시티노믹스』, 『하인리히 법칙』, 『마케팅 어드벤처』, 『Must Know 세계 100대 기업』, 『경제법칙 101』, 『북유럽 이야기』 등이 있으며 대표 역서로는 『트래픽』, 『깨진 유리창 법칙』, 『은밀한 갤러리』 등이 있다.

  1. 자본주의의 특성
    자유 시장경제
    자본주의라는 용어는 19세기 중반 서유럽의 사회 및 경제제도를 비판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그래
    서인지 소위 우파들은 자본주의라는 말보다 ‘시장경제(market economy)’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시장경 제란 시장에서 상품 수요자와 공급자가 서로 만나 가격을 지불하고 거래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자 주 가는 백화점, 할인점, 전통 재래시장처럼 상품을 사고파는 곳도 시장이고, 증권 거래소, 곡물 거래 소, 외환 거래소, 선물 거래소처럼 증권, 곡물, 외환, 선물을 사고파는 곳도 시장이다. 이처럼 시장은 다양하고 규모가 크다. 시장이 없는 자본주의는 아예 생각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시장의 자유로운 조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자유주의(liberalism)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매우 중시하는 사상으로, 최고의 정부는 가장 작은 정부라고 믿 는다.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를 기본 이념으로 하고 있는 자유주의를 특히 자유지상주의
    (libertarianism)라 부른다. 자유주의는 18세기에 존 로크가 주장하고 애덤 스미스가 이를 발전시켜 고전 파 경제학이 탄생되었으며 나중에는 신고전파 경제학으로 발전되었다.
    자유 시장경제는 국가의 경제 개입을 가능하면 최소화하려는 것이지만 현재 자유 시장을 철저하게 옹 호하는 미국 외에는 국가가 어느 정도 시장에 개입하는 혼합경제(mixed economy)를 채택한 나라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혼합경제에서는 국영기업의 수가 많고 도로, 항만, 교육, 금융, 통신 같은 사회 인프라를 국가가 건설, 관리하며 의료보험이나 연금보험 같은 사회보장제도도 국가가 관장한다. 한마 디로 말해 국가의 규제ㆍ개입이 늘어나 경제 전체에서 정부의 입김이 많아지는 것이 혼합경제다. 자 유 시장 자본주의와 국가 사회주의의 타협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전 세계의 많은 국가들, 특히 선진국을 보면 자유 시장경제보다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이 혼합경제에 가깝다. 역사를 살펴보면 민간의 자율에 맡겼을 때 서로 조정이
    되지 않아 시장실패(market failure)가 발생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공교육, 교통 인프라, 사회 보장이 대표적이다. 또 경제운영에서도 민간의 자율에 맡겨두면 호황, 불황의 사이클이 너무 빈번하게 발생하고 게다가 그 폭이 너무 깊어서 정부가 재정 정책이나 금융 정책을 통해 실업이나 물가를 조절 해야만 했다.
    물론 시장경제와 국가 개입 간 혼합의 정도는 국가에 따라 다르다. 미국은 혼합 정도가 매우 적은 편
    이고 유럽 국가는 높은 편이다. 북유럽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혼합의 정도가 높 은 것으로, 가격 결정은 민간에 맡기되 사회보장 측면에서는 정부의 개입이 늘어나는 시스템이다. 북
    유럽 국가는 국민과 기업에 높은 세금을 부과하지만 그 대신 높은 수준의 복지와 친기업 정책을 제공
    한다. 그리고 기업은 개인에게 안정적인 고용을 보장하고 개인은 별다른 노사 분규 없이 양질의 노동
    을 제공한다. 이렇게 정부ㆍ기업ㆍ개인 등 사회구성원들이 높은 신뢰 수준에서 원만한 합의를 이루고있다는 점이 북유럽 모델의 큰 특징이다. 스웨덴은 1932년 이후 2015년까지 83년 중 65년간 사회민주 당(사민당)이 집권했다. 한 정당이 장기 집권을 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할 수 있으나 스웨덴 사민당에 서는 훌륭한 지도자들을 계속 배출하여 국가를 안정적으로 운영해왔다. 물론 한때 지나친 복지로 인 해 경제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세율과 복지를 일부 낮추면서 연착륙에 성공했다.
    1960년대에 서독 총리를 했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는 이런 화두를 던진 적이 있다. 독일은 앞으로 ‘큰 스웨덴’이 될 것인지 ‘작은 미국’이 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국가의 경제 규모와 경제 사회 체제 측면에서 본 것인데, 그는 독일이 작은 미국보다는 큰 스웨덴이 되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이런 화두는 지금의 우리나라에도 적절한 질문이다.

  2. 자본주의의 주요 이슈
    세계화
    오늘날에는 국민과 국가 간의 양적 교류의 확대를 넘어, 정치ㆍ경제ㆍ문화 등 사회 여러 분야에서 교
    류가 증대해 개인과 사회 집단이 하나의 세계 안에서 삶을 영위해가는 세계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세계화 이후 한국에서는 KFC, 맥도날드, 도미노피자 등 다국적 기업의 음식을 즐기고, 나이키나 아디
    다스 등 세계 유명 브랜드의 옷을 입으며 세계 곳곳의 뉴스를 인터넷에서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고,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전 세계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K-팝과 우리나라 드라마,
    한식 등은 전 세계에 한류 열풍을 일으키며 우리 문화를 세계에 전파하고 있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지구가 마치 하나의 나라인 것처럼 느껴지는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전 지구
    적 세계화가 가능하기까지 역사적으로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우선 1 세기 몽골이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유라시아 제국을 형성하자, 교통의 안전성이 확보되어 기
    존에 있던 비단길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당시 베이징에서 헝가리까지 편지를 보내는 데 겨우 7일이
    걸렸다고 한다. 길 중간중간에 파발이 있어서 우편배달부가 말을 바꿔 타며 고속으로 질주했기 때문
    이다. 육지에만 비단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바다 비단길도 생겨 처음에는 범선으로, 나중에는 내연
    기관으로 움직이는 기선으로 많은 물량의 물품을 수송할 수 있었다. 육지에서는 19세기 중반에 철도
    가 생기고, 19세기 후반 들어 자동차가 나오면서 육지를 통한 이동과 대량 수송이 가능해졌다.
    교통의 발달에 따른 국가 간 이동은 무엇이 이동하느냐에 따라 노동력 이동, 상품 이동, 자본 이동으
    로 나눌 수 있다. 그중 노동력 이동에는 먼저, 사람을 강압적으로 특정 지역으로 보내서 노역을 시키
    는 경우가 있다. 이른바 노예 무역을 통해 노동력을 이동시키는 것인데,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원주민
    을 남아메리카로 보낸 것이 그 시초다. 두 번째 노동력 이동은 해외 근로를 위한 이동이다. 1970년대 대한민국이 서독에 광부와 간호원을 보낸 것이나 중동에 건설 인력을 보낸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세 번째 노동력 이동은 이민이다. 이민은 아예 국적을 바꾸는 것이다. 본국에서 살기가 힘들어 고용 기회 가 많고 살기 좋은 곳으로 생활 터전을 바꾸거나, 결혼을 하기 위해, 혹은 자연 환경 악화나 전쟁으로
    인해 난민이 되어 이민하는 등 이동의 이유는 다양하다.
    상품 이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화되었다. 세계 무역의 완전 자유화를 주장하는 세계무역기구 의 출범과 국가 간 자유무역협정의 활발한 체결의 영향이 컸다. FTA는 체결 국가 간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모든 무역 장벽을 완화하거나 제거하는 협정으로, 과거에는 협정의 대상 범위가 상품에국한되었다면, 최근에는 서비스 부문과 교육 부문, 지적재산권 등 다양한 부문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 는 추세다. FTA 체결의 장점은 시장의 규모가 커져 무역 이익이 늘어날 수 있고, 국내 기업은 외국 기업과 경쟁을 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2004년 칠레와 최초로 FTA를 체결한 이후 53개국과 FTA를 체결ㆍ발효했다.
    원료나 상품 이동, 노동력 이동이 어려운 경우에는 자본 이동, 즉 해외 투자가 이루어진다. 19세기 해
    외 투자를 가장 많이 한 나라는 영국이었고, 20세기 들어서는 미국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해외 투자
    가 활발해지면서 자체 공장이 없어도 해외 기업과 제휴하여 현지 생산을 하고, 본사에서는 상품 기획
    과 마케팅만 하는 플랫폼 기업이 크게 확산되었다. 애플, 나이키가 대표적이다. 최근 들어서는 중국이
    경제력이 커지면서 아프리카를 비롯하여 해외 투자를 크게 늘리고 있다.
    노동력 이동, 상품 이동, 자본 이동이 경제적 차원의 세계화를 가져왔다면, 초국적 조직의 등장은 정
    치적 차원의 세계화를 촉진했다. 국가 간 교류의 증대로 기존의 국민 국가 틀 내에서는 해결하지 못
    하는 문제들을 담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제 연합, 국제통화기금 등의 정부간 조직과 국제사면위원회, 그린피스 등의 비정부조직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국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서 정치ㆍ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교통ㆍ통신ㆍ과학 및 환경 영역에서 발생하는 초국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개 별 정부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문화의 세계화 또한 통신 기술의 발달 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세계화가 가져온 풍요와 편리 이면에는 여러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먼저 경제적 차원의 문제
    로는 초국적 자본의 세계 경제 지배와 그에 따른 지구적 수준의 불평등 심화를 들 수 있다. 다국적 기업의 상품은 제3세계 자원을 무분별하게 채굴하고, 노동자들을 착취함으로써 생산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노동자 중에는 어린이도 포함되어 있어 인권문제도 발생한다.
    또 해외 투자에 유입되는 국제 금융자본은 각 나라의 기업을 좌지우지하고, 이익이 되지 않을 경우
    투자를 중단하여 노동자를 거리로 내몰기도 한다. FTA의 경우, 발전된 기술과 가격 경쟁력을 가진 선
    진국이 싼값에 농ㆍ축산물을 대량으로 수출하면 후진국의 영세 농민들은 큰 피해를 입는다. 후진국의 농ㆍ축산업이 무너지면 식량이 무기화될 가능성이 있고, 이는 후진국이 선진국에 경제적으로 종속되 는 결과를 낳는다.
    문화적인 종속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다. 그중 특기할 만한 것은 미국화 경향이다. 오늘날 어느 나라
    건 할리우드 영화와 팝송, 디즈니랜드로 대표되는 미국식 대중문화와 생활양식의 영향을 받고 있다.
    문화적 세계화의 문제는 기존에 존재하던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문화가 미국 문화로 대표되는 서구 문
    화에 잠식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세계화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추세로, 자국의 경제나 문화를 보호한
    다는 명분으로 무역이나 국가 간 교류에서 폐쇄적인 정책을 펴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태도다. 또한
    세계화에는 전 지구적으로 불평등을 강화시키는 측면도 있지만, 시장을 확대하고 경제나 문화적 삶을 향상시키는 기회로서의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 따라서 세계화에 대한 더욱 포괄적이고도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며, 공정한 무역, 인간다운 근로 조건 약속, 국가의 복지와 인권 보장, 아프리카 등 가난 한 나라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어린이 보호, 환경 보호 등에 대한 국제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3. 자본주의를 만든 혁명
    농업 혁명
    오늘날 세계 인구는 72억 명이 넘는다. 1800년 초만 해도 10억 정도였던 것이 무려 7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식량이 풍부했을 때 인구가 급증했다는 것은 역사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18세
    기 후반 청나라에 고구마가 들어오면서 곡물 재배가 어려운 지역에 고구마 재배가 늘어났고, 식량 사
    정이 넉넉해지자 중국 인구가 1억에서 4억으로 늘어났다. 반대로, 1845년부터 7년간 이어진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으로 인해 800만이었던 아일랜드 인구 가운데 4분의 1이 아사했고, 남은 사람들도 먹을 것을 찾아 신대륙으로 이민을 떠나는 바람에 결국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인류는 수렵 채취와 농경, 야생동물의 가축화 등을 통해 점진적으로 식량 문제를 해결해왔다. 오늘날
    과 같은 인구 폭발 시대에 이 많은 인구가 먹고살 수 있게 된 것은 몇 가지 중요한 농업 혁명을 거쳤
    기에 가능했다. 농업 혁명은 식량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인구 혁명을 촉발시
    켰다. 농업 혁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오늘날 세계 인구는 이 정도로 늘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경제
    발전 또한 매우 더뎠을 것이다.
    원시시대에 사람들은 들과 산에서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을 채취해서 사는 수렵채취 생활을 했다. 기
    원전 1만 년경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온난해지고 인구가 점차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주위 초원에서
    자라는 야생 식물에 주목했다. 소아시아 지역에서는 보리를, 황하 지역에서는 강아지풀에서 시작된 조 를 재배ㆍ수확해 먹게 되었다. 정착 생활을 하면서 인간은 집에서 가축도 기르기 시작했다. 소, 염소, 양, 돼지, 말, 개 등의 동물을 가축화함으로써 큰 혜택을 받았다. 고기 및 유제품은 먹는 데 사용했고
    가죽과 털은 입는 데 사용했다. 또 물건을 나르고 땅을 경작하는 등 운송과 농사에 사용했다. 동물의
    분뇨는 땅을 기름지게 하는 비료로 사용했다.
    15세기 후반 이후 지리 혁명의 결과, 신대륙의 식물이 유럽과 아시아로 퍼지기 시작했다. 멕시코의 옥 수수, 고추, 고구마가 유출되었고 안데스에서는 토마토, 감자가 유출되었다. 그리고 볼리비아에서는 담 배, 땅콩이 나왔고 아마존에서는 카카오, 파인애플이 나왔다. 고구마는 중국, 일본, 한국으로 건너가 가뭄이 졌을 때 구황작물로 큰 역할을 했다. 유럽에 들어온 감자는 처음에 유럽인들에게 인기를 끌지 못했다. 감자의 울퉁불퉁한 모양이 종양을 연상시키기도 했고, 발아 직후의 싹에 독이 들어 있었기 때 문이었다. 하지만 17세기 들어 30년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해지자 프러시아는 감자 재배를 독려한다.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많고 수확하는 부분이 땅속에 있어 냉해를 잘 입지 않기 때문이었다.
    성공적인 농사를 위해서는 농업의 전 과정에서 혁신이 필요했다. 곡물 품종이 좋아야 했고, 땅을 잘
    개간한 다음, 씨를 알맞게 뿌려야 했으며, 물과 비료도 적절히 줘야 했다. 자연적인 조건이나 동물의
    힘을 이용하는 것 외에, 기술의 발달을 통해 다량의 곡물을 수확할 수 있게 된 것은 농기계가 개발되
    어 농업의 기계화가 가능해진 이후였다.
    곡물의 풍족한 수확을 위해서는 농업의 기계화 외에도 땅의 비옥도를 높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19 세기까지 농부들은 땅을 비옥하게 만들기 위해 음식물 쓰레기, 재, 가축의 배설물을 이용했다. 가축이
    많지 않은 지역에서는 인간의 배설물을 거름으로 사용했다. 배설물을 그대로 이용하지 않고 화학적으 로 처리한 화학 비료를 처음으로 상품화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영국의 존 베넷 로즈였다. 그는 뼈에함유된 인을 용해하는 방법을 찾아내 1843년 공장을 세워 과인산 비료를 대량생산하기 시작했다. 그
    후 질소, 칼륨, 인 등 식물 재배에 필요한 영양소를 분리하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화학 비료는 농업 생
    산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다.
    농업 혁명에 크게 기여한 또 하나의 요인으로는 육종 기술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요한 그레고르 멘델
    은 사제로 있으면서 수도원 정원에서 8년 동안 완두콩을 심으면서 다양한 품종을 교차재배해 유전법
    칙을 발견한다. 1921년 들어 육종 기술로 개발된 잡종 밀이 판매되기 시작했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잡 종 밀의 생산량은 크게 증가하여 1960년에는 밀 전체 생산량의 96%나 차지하게 된다. 비슷한 방식을
    통해 가지, 사탕무, 배추, 오이, 호박, 시금치, 강낭콩, 멜론, 조, 양파, 수박, 수수, 토마토 등 거의 모든
    곡물, 채소, 과일의 잡종 종자가 탄생하고 상품화된다.
    살충제의 개발도 농업의 생산성을 급격히 증진시켰다. 사람이 재배하는 곡물, 채소, 과일에 해를 끼치 는 곤충을 죽이기 위한 살충제는 1870년대부터 꾸준하게 개발되어 살포되었다. 그중 살충 효과가 매 우 강력했던 DDT는 1940년 스위스에서 특허를 받은 이후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지만, 인체에 미치는
    유해성ㆍ부작용이 1960년대 들어 알려지면서 현재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사용이 금지되었다. 한편, 환 경과 건강을 중시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친환경 농산물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
    이처럼 농산물 대량생산을 가능케 한 농업 혁명이 일어나게 된 데에는 농기구의 기계화, 화학 비료,
    육종 기술, 살충제 개발이 크게 기여했다. 여기서 나아가, 농산물 보관 기술이 발달하면서 쥐 같은 동
    물에 의한 피해나 열에 따른 부식을 막아 농작물을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발효 기술의
    발달은 농산물을 다른 형태로 변형시켜 오랫동안 상하지 않게 만든다. 결정적으로, 농작물을 가공하여 진공포장을 통해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통조림의 발명은 식량보존의 혁명을 가져왔다.

산업 혁명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1760∼1830년의 기간을 근대 경제 사회로의 급격한 역사적 전환 과 정이자 산업 혁명이 일어난 시기로 인식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당시 많은 국가 중 왜 하필 영국에
서 시작되었을까?
첫째, 정치적 안정을 들 수 있다. 국가적으로 내전이 있거나 외국과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으면 인력이 나 자원이 경제 분야에 제대로 투입되기 힘들다. 영국은 일찍부터 왕과 귀족 간의 투쟁 끝에 권력의
추가 왕에서 귀족으로 넘어왔다. 청교도 혁명과 명예 혁명을 거쳐 1714년 하노버 왕조가 시작되면서
왕은 명목상의 군주로 군림만 하고 통치는 하지 않게 되었다. 한마디로 1700년경부터 영국은 정치적
안정기에 돌입했다. 반면에 프랑스에서는 1649년에 영국의 찰스 1세가 처형당한 지 150여 년 후인
1793년이 되어서야 루이 16세가 처형당하며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된다. 왕권과 귀족에 의해 지탱되는
절대 왕정이 오래 지속됐다는 것은 시민 계급, 특히 부르주아지 계급이 취약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
리고 영국은 지방의 영지에서 나오는 농작물, 제조물에 기반을 둔 정부의 재정을 점차 정규적인 직접
세와 간접세로 부과해 물납이 아니라 금납 형태의 세금을 늘려 정부 재정을 강화시켰다.
둘째, 지리와 자원 요인이 있다. 영국은 섬이기 때문에 해안이 많고, 내륙이라 하더라도 강을 따라 배
로 진입하기가 쉬웠다. 또한 필요하면 운하를 뚫어 주요 지역 간에 배로 많은 물량을 운송할 수 있었
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지리적 이점은 영국에 좋은 품질의 석탄이 많다는 것이다. 1700년 영국은 전세계 석탄 채굴량의 무려 80%를 차지했다.
셋째, 법과 제도 요인이 있다. 왕권이 강한 프랑스와 달리 영국은 관습법 체제가 빨리 정착되어 기업
설립을 장려했고, 상업 이해당사자의 재산권 보호를 비롯하여 계약권을 보장해주는 등 채권자들을 더
잘 보호했다. 정부 규제도 유럽 대륙 국가에 비해 적은 편이었고, 1824년에는 주식회사 설립이 허용되
어 기업 설립이 용이해졌다. 1694년 영란은행을 비롯하여 금융시장이 발달하자 돈이 남는 사람과 돈
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간에 돈의 흐름이 원활해진 것도 주요 원인이다. 기술자가 발명한 것에 대한
특허를 주는 제도도 일찍 정립되었다. 영국은 유럽 대륙보다 장인 중심의 길드가 세력을 크게 키우지
못해 기술 이전이 상대적으로 쉬웠고 대량생산의 매력이 더 컸다.
넷째, 지식 전파 요인이 있다. 당시 영국에서는 학회, 학술지, 심포지엄, 공개강연, 기술학교, 커피하우 스, 살롱, 클럽 같은 공간이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특히 런던의 왕립협회, 버밍엄의 루나 소사이어티, 맨체스터의 문학과 철학 협회는 그런 기능을 제대로 수행했다. 천문학, 물리학, 광학, 의학 등의 분야 에서 이루어진 과학 혁명 지식은 이런 채널들을 통해 급속히 확산되었다. 인쇄 혁명 이후 책이나 팸
플릿 형태의 출판 활동이 활발했고, 다른 언어 자료를 번역하는 활동도 왕성했다.
다섯째, 기업가 요인이 있다. 영국에는 모험을 무릅쓰고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다
수의 사업가들이 있었다. 이들은 수요가 높은 인도의 면직을 국산화하기 위해 방적 분야에서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냈고, 나무가 부족한 상태에서 석탄으로 품질 좋은 철을 만들기 위해 유황 성분을 줄이
는 기술 혁신을 일구어냈다. 당시 종교 혁명 이후 탄압을 받은 유럽 대륙의 신교도들이 대거 영국으
로 이주했는데 그 가운데 기능공들이 많았던 것도 영국 산업 혁명의 불씨를 지피는 데 큰 역할을 했
다. 영국의 산업 혁명은 증기기관, 방적기, 방직기, 가스조명, 철강기술 같은 거시 발명이 동시다발적
으로 일어나고 이를 보완해주는 미시 발명이 나란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는 사회제도적 요인과 기업가적 요인들이 서로 맞물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여섯째, 해외 식민지 요인이 있다. 해군력과 금융자본시장이 강했던 영국은 상대적으로 손쉬운 전비
조달로 식민지를 많이 확보하여 자원과 인력의 공급을 늘리고 상품을 판매하는 수요처로 식민지를 활 용했고 특히 아프리카와 서인도 제도 간에 노예무역을 통해 많은 수익을 챙길 수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요인들이 서로 시너지를 낸 결과, 영국의 1인당 경제 성장률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또한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난 후 1인당 소득의 지속적 증가는 영국이 맬서스 트랩(인구가 증감
을 거듭하다가 정체 상태에 머물 것이라는 이론)을 탈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경제학계에서는 이를
대분기라고 부른다. 소득 증가로 사람들이 영양분을 충분히 섭취한 결과 사람들의 평균 키도 지속적
으로 늘어났다. 산업 혁명 기간 중 발생한 지속적인 기술 진보가 생산성 향상, 일인당 소득 증가, 영
양분 섭취 증가, 신장 증가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1851년, 런던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는 영국 산업 혁명의 놀라운 성과를 전 세계적으로 과시하는 자리
였다. 하이드 파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는 유리와 철골로만 만들어진 거대한 조립식 건물에서 수많은
산품을 전시하여 관람객의 탄성을 자아냈다. 이 만국박람회와 함께 영국의 산업 혁명은 벨기에, 프
랑스, 미국, 독일 등으로 확산되면서 전 세계는 예전과는 다른 자본주의 열풍에 휩싸이게 된다.

  1. 자본주의를 만든 핵심 산업
    백화점
    백화점의 역사는 1852년에 아리스티드 부시코가 파리에 봉 마르셰라는 근대적 백화점을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프랑스어로 봉은 good, 마르셰는 market을 의미하므로 봉 마르셰는 ‘좋은 시장’ 혹은 ‘잘 샀다’를 의미한다. 부시코는 백화점 건물을 마치 궁전이나 오페라 극장, 대성당처럼 꾸몄고 건물 내부 도 화려하게 장식했다. 봉 마르셰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던 상관행(商慣行)을 도입했다. 예를 들어, 부티크 같은 고급 상점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던 것에 반해 백화점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다.
    또 흥정에 의해 가격이 달라지지 않고 미리 정한 가격에 파는 정가제를 채택했다. 정가제이긴 했지만,
    부티크 같은 고급 상점보다는 상품 가격이 저렴했다. 게다가 때때로 할인 판매를 하여 고객이 더욱
    저렴한 가격에 상품을 살 수 있도록 했다.
    손님은 상품을 직접 만져보고 고를 수 있었고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품을 할 수도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 백화점에 올 수 없는 고객을 위해 우편으로 상품을 팔기도 했다. 봉 마르셰에는 독서실
    이나 그림 전시장도 있었고, 정기적으로 클래식 콘서트가 열렸다. 단지 상품만 파는 곳이 아니라 쾌적
    한 문화 공간으로도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혁신적인 판매 기법을 도입한 봉 마르셰의 인기는
    하늘 높이 치솟았다. 1852년에 문을 연 봉 마르셰 백화점은 첫해 12명 직원으로 45만 프랑의 매출을
    올렸으나 1883년에는 2,370명 직원으로 1억 프랑의 매출을 올렸다. 현재 봉 마르셰는 갤러리 라파예트
    나 프랭탕에 비해 규모가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세계 최초의 백화점으로서 여전히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봉 마르셰의 별관은 고급 식품관으로도 유명하다.
    미국 최초의 백화점은 1826년에 문을 연 로드앤드테일러다. 1870년대 뉴욕에 A.T. 스튜어트, 필라델피 아에 워너메이커, 시카고에 마셜필드가 오픈했다. 미국에서 백화점이 급속도로 확산되는 데는 여러 요
    인이 작용했다. 먼저 제조업 발달로 소비재의 대량생산이 가능했다. 더구나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었
    고, 국민 소득도 크게 증가했다. 기차 같은 교통수단이 급속도로 퍼진 것도 한 이유였다. 또 돈만 있
    으면 누구나 자유롭게 상품을 살 수 있는 미국의 민주적 사회 풍토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 후 1900
    년 들어 미국에는 딜라드나 노드스트롬 백화점이 생겨났다. 영국에서는 영국 왕실에 납품하는 것으로 유명한 해러즈 백화점을 비롯하여, 셀프리지, 마크앤드스펜서, 리버티, 존루이스 등이 생겼다.
    최근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결합인 옴니채널의 시대가 열리면서 일대 유통 혁명이 일어나고 있으나 오 프라인 혹은 아날로그 시대의 상징인 백화점은 계속해서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온라인으로 클 릭만 하면 내가 원하는 제품을 바로 살 수 있는 시대지만 백화점의 문화 파워는 여전히 살아 있기 때 문이다. 백화점은 유통의 꽃으로 계속해서 그 생명력을 이어갈 것이다.

  2. 자본주의를 만든 인물
    유대인
    유대인 하면 보통 수전노, 머리가 좋은 사람, 자부심이 강한 사람, 선민의식, 아우슈비츠, 아인슈타인,
    로스차일드, 이스라엘, 골드만삭스, 키신저, 베니스의 상인, 디아스포라, 탈무드, 안식일 등 다양한 주
    제가 머리에 떠오른다.
    과거 역사적인 사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대인과 관련된 경우가 상당히 많음을 알 수 있다. 이탈리 아 르네상스, 영국 청교도 혁명, 흑사병, 중상주의, 칼뱅의 종교 개혁,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영국의 발권 은행인 영란은행, 나폴레옹 전쟁, 미국의 철도 버블, 드레퓌스 사건이 모두 유대인과 연관되어
    있다. 금융계만 보더라도 JP 모건체이스, 시티은행, 골드만삭스 같은 거대 금융 기업의 창시자는 물론, 앨런 그린스펀, 벤 버냉키, 재닛 옐런, 로버트 루빈, 래리 서머스, 티머시 가이트너 같은 금융인은 모 두 유대인이다. 또한 노벨상을 받은 유대인 역시 다수인데, 1969년부터 시상하기 시작한 노벨경제학상 의 경우 역대 수상자 중 약 40%가 유대인이다. 생리의학상은 28%, 물리학상은 26%, 화학상은18%, 문학상은 11%, 평화상은 10%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왜 이렇게 똑똑한 것일까? 유대인 이 다른 민족에 비해 유달리 똑똑한 데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이유들이 있다.
    첫째,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것을 철저히 믿는다. 고대 사람들은 다신교를 믿었던 반면, 유대인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숭배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자식으로 선택되었다 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가정과 공동체에서의 교육으로 견고해진다. 유대인들은 3∼4세 때부터 모세 의 5경에 뿌리를 둔 기본 경전인 토라를 비롯하여, 탈무드 교육을 받으며 대화와 토론을 통해 사고와 판단력을 배양하고 유대인 간의 끈끈한 공동체 의식을 키워나간다.
    둘째, 유대인들은 문맹률이 아주 낮다. 가톨릭에서는 신도들이 글을 읽으면 교회에 나오지 않고 성경
    만 읽거나, 신도들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왜곡된 교리를 전파할 것을 두려
    워했다. 따라서 신도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금했고, 그 결과 중세 가톨릭 신자의 문맹률은 98%나 되
    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자녀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기원전부터 글을 가르쳤다.
    셋째, 유대인들은 공동체 의식이 강해서 유대인 간에 지혜와 정보를 나누고 도움을 주는 것을 매우
    중시한다. 이들은 다른 유대인들을 돕기 위해 자선을 권장하고 사업 자금을 무이자로 지원해주기도
    한다. 유대인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각 지역의 정보를 교환함으로써 대단한 정보력을 갖
    게 되었다. 또한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은 귀족이나 영주, 기사, 농민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유럽인들
    이 맡기를 꺼리는 직업을 택할 수밖에 없었고, 언제 배척당할지 몰랐던 그들은 아무 데서나 정착해
    먹고살 수 있도록 항상 자신의 머리를 활용하는 직업을 택했다. 물건이나 농산물을 직접 생산하는 것
    보다는 물품을 유통시키는 행상인, 무역업자, 배급업자와 같은 직업이었다. 이러한 관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현대의 유대인들은 단순 노동보다는 두뇌를 쓰는 변호사, 교수, 의사, 금융인, 공증인, 회계사, 기자 같은 전문 직종에 몸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현대에 들어 유대인들이 주로 종사하는 직종이 점차 각광을 받게 되면서, 유대인의 파워는 더욱 커졌다.
    넷째,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이 선천적으로 우수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전 세계적으로 지능지수
    조사를 해보면 홍콩, 한국, 일본의 IQ가 제일 높은 것으로 나온다. 이스라엘은 이보다 낮은 것으로 나
    오는데,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아랍인을 제외하면 실제로 유대인들의 지능지수가 세계에서 제일 높다 는 말도 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공동체 의식이 매우 돈독하고 생존력, 검약성이 몸에 배었기 때문에 돈을 많이 축
    적하게 된다. 부유한 유대인들 가운데는 거주 지역이나 국가에 대출을 해주는 채권업자들이 많았는데, 이들에게 빚을 갚기가 부담스러워진 국가는 유대인들을 강제로 추방하곤 했다. 유대인들은 1 세기 영 국, 14세기 프랑스, 15세기 스페인, 16세기 이탈리아, 17세기 독일에서 매몰차게 추방당했다. 그런데흥미로운 사실은 유대인들을 추방한 지역의 경제는 몰락하는 반면, 그들을 받아준 지역은 융성해졌다 는 점이다. 1290년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영국에서 추방당한 유대인은 지금의 벨기에인 플랑드르의 브 루게로 넘어가 고급 모직물 산업을 일으켰고, 덕분에 브루게는 중계무역 도시로 발돋움했다. 그 후 브 루게가 항구 기능을 상실하자 유대인들은 벨기에의 또 다른 도시 안트베르펜으로 옮겨 그곳을 다이아 몬드 유통 중심지로 만들고 유럽 최대 무역 도시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한다.
    유대인의 이런 뛰어난 재능은 각국에서 반유대인 정서를 반복적으로 만들어냈다. 제2차 세계대전 당
    시 유대인 600만 명이 살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1939년 독일 점령지에는 유대인830만 명이 살고 있었으니, 1939~1945년 동안 무려 72%의 유대인이 희생된 셈이다. 유대인에 대한 학대는 히틀러 치하에서만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은 1 ~15세기에 걸쳐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으로부터 추방을 당해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로 이주해야만 했다.
    웬만한 민족이라면 이러한 냉대와 학대를 제대로 견디지 못하고 그 나라에 적응해 종교를 바꾸고 귀
    화를 하게 된다. 하지만 유대인은 5,000년의 역사 동안 자신들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민족이라는 신 념을 잃지 않고 엄격한 가정교육과 계율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켰다. 여기에는 유대인들이 가 장 중시하는 책자인 탈무드가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탈무드는 유대인들이 5,000년간 축적해온 지적,
    사회적, 민족적, 종교적인 생활 규범을 담은 책이다. 유대인들은 서기 73년 로마에 의해 지금의 이스 라엘 지역에서 쫓겨나 1948년 이곳에 다시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기까지 거의 1,900년간 탈무드를 지 키고 배우면서 그들의 전통과 지혜를 유지해왔다. 탈무드는 원래 ‘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인간에게 필요한 거의 모든 지혜가 담겨 있다.
    유대인은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이다. 이스라엘 귀환법 제4B조를 보면 “유대인이란 유대인 어머니에게 서 태어난 사람, 혹은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 중에서 다른 종교에 속하지 않은 자”로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혼인 등의 사정이나 개개인의 신념에 의해 이교도가 유대교로 개종할 경우는 순종 유대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자식은 순수 유대인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유대인 아버지와 비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순수 유대인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유대인 사회에 서 이런 모계사회 전통이 생긴 이유는 과거 오랜 기간 박해를 받으면서 남성이 많이 희생되었고 어머 니가 집에서 가정 경제와 아이 교육을 책임지게 되면서 여성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2009년 기준 이스라엘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유대인 인구는 1,342만 명으로 전 세계 인구의 0.19%를 차지하고 있다. 국가별로 보면 이스라엘에 592만 명이 거주하여 가장 많고, 그다음으로는 미국에 528 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미국 내 유대인 비중은 1.7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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