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열놀음

in #kr6 years ago

서열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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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학교 입학식 때 교장 선생님이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여러분은 명문 00중학교에 들어온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어느 학교든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지만, 나는 유독 이때 들은 말이 기억에 남는다. 처음으로 학교 서열이라는 개념을 알게 해준 말이기 때문이다. 이후 명문이라는 최면은 끊임없이 학생들을 괴롭혔다. 사실 중학교 수준에서 국제중 정도를 제외하면 의미 없는 것인데도 그러했다. 일차적인 목표는 고등학교처럼 보였다. 지역에서 명문이라고 불리는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게, 공부 잘 하던 학생들의 소명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분명한 건 결국 목표는 명문대학교였다. 대학을 위해서 중학교 때 부터 서열 싸움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내 삶과 직결된 문제처럼 보였다. 아무리 서울대 진학률이 낮아진다고 하더라도, 고졸 취업이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대학을 가지 못하게 되면 사회에서 영원히 낙오된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 덕분에, 여러 사정으로 외국어 고등학교 진학에 실패했을 때, 나는 정말 슬펐다.

(2)

그러나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고등학교라는 새로운 전선에 투입되었다. 대학이라는 목표가 차차 현실로 다가올 시기인 2학년 때 한 선생님이 수업 도중에 이런 주문을 외우셨다.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건동홍 국숭세단 광명상가 한서삼 인가경......”

대학에 무지한 사람이라도 서연고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 주문이 무엇인지 대강은 알 수 있다. 한때 유망주였던 핸드폰 브랜드였던 SKY가, 그저 하늘을 뜻했던 SKY가, 그 선생님이 주문을 외울 때부터 너무 높게 보이기 시작했다. 원래 가기 힘든 곳이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먼 이야기로 느껴졌던 게, 이제 바로 앞에 있는 벽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나도 친구들과 같이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대학에 관심 없고 진학하지 않았던 이들도 이 주문을 들어볼 정도로 열심히 외웠다. 우리는 반드시 이 라인을 타야 한다고 결의했다. 그러면 세상이 망하는 것처럼, 치열하게 공부했다. 하지만 우리의 기반은 초라한 것이었다.

어떤 날 친구와 나는 학교가 다소 일찍 끝났던 날에, 교실 구석에서 수박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면서 서럽게 울었다. 전국에 대학이 이리도 많은데, 어째서 우리에게는 갈 곳이 없는가. 왜 공부를 하지 않았나. 자기에 대한 분노와 연민을 이렇게 한꺼번에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주문은 길어졌다. 성적이 나오지 않을수록, 명문대의 범위는 넓어졌고, 최면은 깊어졌다. 학교에서는 담임과 부모가 타협에 타협을 거듭해야 했다. 힘들었지만, 이 단계만 거치면, 최대한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한국인이 이 부분만 넘어도 반은 성공하는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입시 신화를 믿었다. 그리고 나는 기적적으로 원하던 대학에 붙었다.

(3)

이제 또 끝인가. 진정 최종 목적지인 대학에 왔으니, 서열에서 탈피되었나?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강해졌다. 주문은 다른 형태로 우리를 짓눌렀다. 누군가는 기업의 서열을 외우고 있었고, 어떤 이는 이 라인도 약하다면서 학교를 탈주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차차 현실이라고 여겼던 장소에서 탈피하게 되었다. 새로운 현실 앞에 마주했다. 넘었다고 생각했던 벽은 더 높아져 있었다.

누군가는 이것이 필요 없다고, 여러 사례를 열거했다. 그리고 노력으로 극복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당장 느끼는 압박감을 해결하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또한 그 사례들에 반하는 경우도 워낙 많아서 여전히 서열이라는 부질없는 것을 붙잡을 수 밖에 없었다. 요즘도 이런 현실을 떠돌아다니고 있다. 마치 귀신처럼 말이다.

(4)

누군가는 이런 상황에 열병이 났다. 그들은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면서 치열하게 서열 싸움을 부추겼다. 대학 이름에 하버드를 합성해 부르는건 흔한 일이었다. 내가 이 현실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그들은 아예 약에 더 취해버린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건 너무 쉬운 도피처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쪽으로 도망치는 게 적어도 정신에는 더 이로울지도 모른다.

특목고와 명문고를 가지 못했다고 우울하던 내가, 학교의 주장처럼 우리 또한 명문이라고 떠든 것처럼. 내 능력과 대학 지원을 타협하는 순간에도 명문의 기준을 낮추던 것처럼. 이 서열놀음 속에서 고통받느니, 이렇게라도 즐기면서 살아가는 게 당장에는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약에서 깨고 나면, 결국 현실은 그대로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우리가 제일 잘 알지 않는가? 현실은 바뀌지 않았고, 약은 한계가 있다. 우리는 이 불우한 서열놀음이 판치는 나라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 그것이 인생을 결정한다. 민주시민 육성이니 뭐니 하는 것은 허황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선택지는 세 가지뿐이다. 한계가 있어도 계속 약에 취하던가, 열렬히 이 체제의 수호자가 되던가,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가던가. 선택은 자유다. 하지만 결과는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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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싫은데, 현실에선 강요하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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