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읽은책 #3] 소크라테스 최후의 13일-모리모토 데츠로

in #kr7 years ago

소크라테스 최후의 13일-모리모토 데츠로

읽은 날: 2018년 4월 29일-2018년 4월 30일


 『소설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의 어린 시절부터 아테네라는 게으른 말의 등에로서 지혜를 추구해온 책이라고 하면 『소크라테스 최후의 13일』은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선고받고 감옥 독방에서 죽음을 기다리기까지의 소크라테스의 삶을 다룬다. 소크라테스는 잘못된 신을 섬기고 아테나이의 청년들에게 잘못된 것을 가르친다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원래는 아테나이에서 사형 선고가 내려진 당일에 집행에 들어가지만 테세우스의 제사가 진행되고 델로스 섬의 아폴론 신전으로 사제를 파견하는 중요한 행사가 있어 그 집행이 미루어졌다. 이는 소크라테스에게는 육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영혼이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는 날을 미루는 불행한 일이었겠지만 소크라테스 이후에 태어난 사람의 입장에서는 조금이나마 소크라테스가 더 많은 사색을 하고 우리에게 더 다양한 지식을 전달해줄 수 있었던 고마웠던 일이라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는 독방에서 친구 크리톤, 글라우콘, 플라톤 등을 비롯해 아테나이의 많은 청년들과 수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유명하다. 그는 부정의하다고 생각되는 사형 판결을 받고 감옥에 수감되었고 당시 아테나이의 상황은 무엇이든 돈으로 다 되는 사회였다. 크리톤을 비롯한 그의 친구들이 소크라테스의 탈옥을 위한 모든 제반 준비를 끝내놓은 상태에서 소크라테스에게 끊임없이 탈옥을 권유한다. 끊임없는 친구들의 설득에도 소크라테스의 논리를 꺾지는 못한다. 소크라테스의 논리는 간단하다. 부정의에 부정의로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크라튀로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정의란 부정의한 것에 대한 투쟁에서 나온다는 주장을 들며 부정의한 판결에 저항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토록 그를 부추긴다. 그러나 그는 정의란 만물이 유전하는 것처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꽃과 음악이 그 모습을 잃어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미'는 항상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의는 상주하는 로고스라고 말한다.

 이 죽음은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본인이 추구해온 삶의 마지막 단계일 것이다. 부정의에 부정의로 대응하지 않음으로써 항상 존재하고 상주하는 정의를 지킨다. 이를 현대 사회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현대 사회에는 부정의에 부정의로 대응하는 것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이것이 정의라고 보는 것이다. 예컨대, 정당방위는 상대방의 부정에 부정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응하는 부정을 부정의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적법하다고 판단 내려진다면 정의로울 수 있다.

 이와는 별개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비참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오직 본인의 일곱 가지 부덕을 다 못 찾아낸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는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의 육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영혼으로 여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무에서 유가 만들어질 수 없듯이 영혼도 신체가 죽는다고 해서 없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했기에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앞두고도 초연할 수 있었다.


 이 소설에서는 인도에서 온 한 현자가 나와 소크라테스에게 여러 가지를 알려준다. 아폴론 신전에 적혀 있는 ‘너 자신을 알라’가 인도에서 왔다거나 디오니소스도 인도의 신에서 왔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것 이외에도 플라톤의『국가』에서 나왔던 부분도 다수 나오는데 가장 관심이 갔던 대목을 위주로 글을 써보고자 한다. 이 책의 제8장에서 인도에서 온 현자는 한 우화를 글라우콘에게 들려준다. ‘언어’와 ‘마음’이 싸우는데 어느 쪽이 더 위대하냐를 가지고 싸웠다. ‘마음’은 ‘언어’에게 자기가 모르는 것을 너가 어떻게 아느냐고 말하며 자신이 더 우위에 있다고 한다. 이에 ‘언어’는 애당초 너가 아는 것은 내가 가르쳐 준 것이기 때문에 내가 더 우위에 있다고 말한다. 이 우화에서 프리자파티라고 불리는 창조주 브라흐마나는 ‘마음’의 승리를 판결했다. 글라우콘이 그 판결의 이유를 묻자 신의 판정이라서 그 이유를 모르지만 아마 ‘언어’로 ‘마음’을 설명할 수 없기에 ‘언어’에 집착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인도에서 온 현자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는데 소크라테스 본인은 평생을 혼의 본질을 탐구해왔고 그것을 위해서 개개의 언어를 정확히 정의하고 언어로 도리를 추구하면 혼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고민을 하던 소크라테스는 ‘언어’와 ‘마음’의 주장은 모두 타당하므로 둘의 승부를 무승부로 결론 내린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언어는 혼이라고 생각했기에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굽히지 않았고 탈옥을 거부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또한, 어떤 것에 대해서 생각할 때 언어의 엄밀한 정의에서 시작해야 하고 언어를 제멋대로 사용하지 않고 그 뜻을 음미하면서 사용하는 버릇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마음이 승리했다는 판결을 수용한다면 언어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여야 한다고 말한다. 늑대와 염소의 우화를 하나 떠올리며 안전한 집에 있는 염소는 늑대를 놀릴 수 있었지만, 그 염소는 집이 없었다면 그런 말을 못 했을 것이다. 장소와 상황에 따라서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은 한쪽이 진실이면 다른 쪽은 거짓이고, 또는 둘 다 진실이거나 거짓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장소나 상황에 좌우되지 않는 ‘언어’도 있으니 언어라는 것을 신중히 다루어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소크라테스의 언어에 대한 생각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은 언어에 대해 그렇게 접근하지 않는다. 언어를 신중히 다루지도 않고 언어가 가진 힘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말한다. 언어는 영혼을 갈고 닦을 수 있는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대인들의 언어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영혼을 타락시키고 더럽히고 있다. Hate Speech라는 것이 있다. 특정한 인종이나 국적·종교·성별·인종 등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는 발언을 일컫는 것이다. 이런 말들을 내뱉는 자들은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처럼 입이 있어도 입을 닫고 있는 편이 좋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고 자신의 영혼 수행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말들은 좋지 않다. 혹자는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민주 정체에서 참주 정체로 넘어가는 과정을 묘사하며 과도한 자유가 어떻게 국가를 망쳐놓는지를 보여준다. 넘쳐나는 자유는 법률도 아랑곳하지 않게 만들어 사회를 무질서로 만든다. 이는 참주 정체로 이어지고 참주 정체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이 일어나고 계속된 무질서가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언어를 다시 한번 곱씹어보고 언어의 중요성을 마음 깊이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너 자신을 알라’는 실제로는 아폴론 신전의 기둥에 적혀 있던 글귀이다. 저자는 인도에서 온 지자(知者)의 입을 빌려 소크라테스가 신탁소 앞에서 보고 깨달음을 얻은 '너 자신을 알라'가 무슨 뜻인지 설명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글라우콘처럼 ‘너 자신을 알라’를 자신의 분수를 알라라고 하는 처세술 정도로 잘못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인도 사상에서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진정한 자기자신, 아트만이라고 불리는데 외부의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으로는 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잡혀 있는 자기자신이 되어 잡으려 했던 자기자신을 영원히 잡을 수 없는 상태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트만은 좋음의 이데아처럼 존재하며 인식과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인간은 자신의 혼을 돌봄으로써 자신을 알아갈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인간뿐 아니라 식물, 동물 등 다른 사물에도 아트만이 있으며 인간의 혼은 윤회를 겪게 된다. 혼에는 전생에서 얼마나 열심히 지혜를 탐구했으며 올바로 살았는가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델포이 신전에서 내려진 신탁은 그에겐 수수께끼와 같았다. 자신은 무지한데, 신탁은 그를 가장 지혜로운 자로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신탁소 앞에서 본 '너 자신을 알라'는 그에게 평생의 숙제였다. 자신을 아는 것은, 사색의 출발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모르는가를 안타깝게 여긴 그는 자신과 타인의 혼을 돌보는 이가 되기로 결심한다. 다이몬의 목소리는 그가 혼의 조각가, 혼의 산파가 되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는 올바른 혼의 형상을 조각하고, 그 올바른 혼에 다다를 수 있도록, 남자의 몸에서 지혜가 출산되는 과정을 돕는 산파의 일생을 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평생을 혼을 보살피고 지혜를 낳는 일에 전념하였지만 이 때문에 독방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무지자를 자처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나를 되돌아본다면 무지자가 되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이 된다. 살아가다보면 무언가를 배우게 되고 어느 정도 관심을 쏟아 공부하다보면 어느 순간 내가 이 분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궤도에 올랐다고 자만하게 된다. 이는 너무나도 본능적인 생각이라 조심할 겨를도 없이 생겨나는 생각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이겨냈거나 이성으로써 눌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무지자를 자처할 수 있었고, 끊임없이 지혜를 갈구하여 성인의 위치에 다다른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 플라톤 『국가』의 7권까지를 공부했고 이 책을 읽으며 같은 책의 8권과 9권을 공부할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2000년이 더 넘은 과거의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말한 것은 여전히 현대 사회에서도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국가(Kallipolis)를 위한 생각을 끊임없이 하였다. 아름다운 국가를 위해서 인간은 어때야 하는지, 국가는 어떤 체제여야 하는지 등을 생각했다. 특히 8권과 9권에 걸쳐 소크라테스가 설명하는 정치 체제와 사람에 관한 것은 현재에의 시사점이 크다고 생각한다. 현재 대부분의 국가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과두 정체적인 국가를 넘어서 민주 정체적인 국가가 되면 자유가 넘쳐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살던 페르시아 전쟁 이후의 아테나이와 비슷하다. 소크라테스는 당시를 “젊은이들은 경박하고, 화려하고 사치스러우며, 전통을 무시하고 노인은 젊은이들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그들을 따라하고, 학생은 선생과 맞먹으며, 선생은 권위를 잃은 모습들이 팽배해 있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다 이 자유가 사람들을 무질서 또는 무정부상태로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참주가 등장하고 참주 정치체제가 등장한다고 말한다. 한국의 사회와 너무 비슷하다. 전통을 무시하고 교권은 추락했다. YOLO를 빙자한 사치가 넘쳐나고 욕망으로 가득한, 돈벌이에 눈이 먼 참주 정체적인 사람들이 넘쳐난다. 우리는 그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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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팅 드리고 갑니다~ 앞으로 좋은글 부탁드려요~ ^^

네 감사합니다~

일교차가 큰 날씨에요 감기조심하세요^^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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