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을 가르치는 엄마, 인생을 가르치는 아빠

in #kr7 years ago (edited)

아이가 초등 5학년때 이야기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오늘 학교에서 시리아 난민에 대해 배웠다고 했다. 자기는 부자가 되어 난민들을 도울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기특했다.
그런 생각은 어디에서 배웠냐고 물었다.
"아빠"한테 배웠다고 했다.
그럼 엄마한테는 무엇을 배웠냐고 물었다.
"수학"을 배웠다고 했다.

충격이었다.
여태 내가 가르친게 고작 수학이었다니.
한편으로는 이해도 가는 바였다. 그 수많은 주옥같은 가르침들(내 기준이다!)중 대부분이 잔소리에 묻혀 버릴 가능성이 높다는걸 알고 있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과하면 탈이 나고 좋은 말도 반복되면 듣기 싫은 법이니까. 반면에 아빠는 잔소리 대신 굵직한 몇마디의 강의로 아이들을 제압한다. 무엇보다 화를 내지 않는다. 그냥 필요한 몇마디를 간혹 던질 뿐이다. 나의 육아법은 강약 조절의 실패, 양 조절의 실패, 감정 조절의 실패가 보여주는 결과라고 받아들였다. 또한 내가 아이의 좋은 벗이 되었는가, 닮고 싶은 인생의 선배가 되었는가, 아이눈엔 내가 멋진 존재인가를 따져봤을 때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할수는 없었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라는 말을 통해 알수 있듯이 '아이는 엄마의 거울'이 분명하다. 아이의 행동에서 문득 문득 나의 모습이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습관, 말투, 반응, 삶을 대하는 방식과 감정 등이 모두 나를 닮았다. 유전자 뿐 아니라 환경이 미치는 영향이리라. 그래서 아이에게 안 좋은 습관이 보이기라도 하면 금세 자괴감에 빠져버린다. 한때 깊이를 알수 없는 자괴감의 동굴에 빠진적이 있었다. 아이를 정말 잘못 가르쳤나라는 생각과 내가 나쁜 엄마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가 사춘기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평소 나는 아이에게 "산과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세상을 너의 가슴에 품을수 있는 큰 사람이 되어라고. 풉! 생각해보니 얼마나 황당한 말인가. 미성숙한 데다가 아직 세상이 무언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세상을 품으라고 하는 엄마의 주문이 아이에게 과연 얼마나 다가갔을까. 지금이라도 내가 정신차린게 얼마나 아이에게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산으로 아이와 함께 여행을 갔었다. 모자의 감정의 골이 깊어져 눈만 마주치면 싸우던 시절이었다. 산 정상에 오르면 근사한 몇마디를 아이에게 던져줄 요량이었다. 자! 보이느냐! 이것이 네가 품을 너의 세상이란다! 블라블라~ 장시간의 운전과 애꿎은 날씨로 어렵게 정상에 올라 발 아래를 바라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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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구글)

산은 높고도 컸다. 산맥이 여러개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기골장대했다. 이 정도 사이즈면 아이가 세상을 품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는 걸 알고도 남을 거라고 흐뭇했다. 그러나 흐뭇한 미소는 잠시잠깐이었다. 산밑에 흐르는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강이었다. 산맥을 구비구비 돌아 흘러가는 거대한 강줄기. 순식간에 압도당했다. 내가 서 있는 이 세상을 떠 받치고 감싸안아 아우르는 모습이었다. 아! 이렇게 기골장대한 산이 있으려면 저렇게 유유자적한 강이 지탱을 해줘야 하는구나. 나는 아이의 양분이 되고 생명수가 되고 쉼터가 되어야 한다. 나는 그뿐이다.

아들아!
살다가 고달프거나 목이 마르거든 나에게 와서 물을 마셔라!
나는 늘 이곳에 있으리라!
나는 고요히 내 자리를 지킬 것이고,
나는 너를 가르치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너를 변화시키지 않을 것이며,
나의 기준을 너에게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마음이 고요해지고 넉넉해졌다. 그리고 아이에게 말을 했다.
"난 지금부터 저 강과 같은 엄마가 될거야!"

.
.
.



아이들과 마찰이 있을 때면 들여다보는 박노해 시인의 글이 있다. 수년째 내 핸드폰 메모장을 차지하고 있고 나는 어느새 그곳을 찾는 단골이 되었다. 아이와 지구별 위를 잠시 "동행" 한다는 글귀가 아주 마음에 든다.


내가 부모로서 해줄 것은 단 세 가지였다.

첫째는 내 아이가 자연의 대지를 딛고 동무들과 마음껏 뛰놀고 맘껏 잠자고 맘껏 해보며 그 속에서 고유한 자기 개성을 찾아갈 수 있도록 자유로운 공기 속에 놓아두는일이다.

둘째는 '안 되는 건 안 된다'를 새겨주는 일이다. 살생을 해서는 안 되고 약자를 괴롭혀서는 안 되고 물자를 낭비해서는 안 되고 거짓에 침묵 동조해서는 안 된다. 안 되는 건 안 된다는 것을 뼛속 깊이 새겨주는 일이다.

셋째는 평생 가는 좋은 습관을 물려주는 일이다. 자기 앞가림을 자기 스스로 해나가는 습관과 채식 위주로 뭐든 잘 먹고 많이 걷는 몸생활과 늘 정돈된 몸가짐으로 예의를 지키는 습관과 아름다움을 가려보고 감동할 줄 아는 능력과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홀로 고요히 머무는 습관과 우애와 환대로 많이 웃는 습관을 물려주는 일이다.

그러니 내 아이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유일한 것은 내가 먼저 잘 사는 것, 내 삶을 똑바로 사는 것이었다. 유일한 자신의 삶조차 자기답게 살아가지 못한 자가 미래에서 온 아이의 삶을 함부로 손대려 하는 건 결코 해서는 안 될 월권행위이기에 나는 아이에게 좋은부모가 되고자 안달하기보다 먼저 한 사람의 좋은 벗이 되고 닮고 싶은 인생의 선배가 되고 행여 내가 후진 존재가 되지 않도록 아이에게 끊임없이 배워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저 내 아이를 믿음의 침묵으로 지켜보면서 이 지구별 위를 잠시 동행하는 것이였다.

-박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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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꾸준한 포스팅을 응원합니다.

텀블님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헉. 저 너무 충격받았어요. .. 에빵님이 어머니셨다니!
지금까지 아버지라고 생각했답니다.. 헉 .

글을 읽으며 제 어머니를 떠올렸어요. 늘 바쁘셨던, 저보다는 일이 소중했던 사람이라 늘 애증의 관계였던 어머니였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제가 어머니의 나이로 갈수록 점점 그녀를 이해하게 되네요.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저를 바라봐준 어머니이지만 지난날들을 후회하며 가슴아파하는 일이 없기를 늘 바란답니다.
:-) 그나저나 에빵님 너무 좋은 어머니시네요. 정말로 아드님이 부럽습니다.ㅎㅎ

ㅎㅎㅎ 언젠가 댓글로도 그렇게 말씀하신것 같았는데,,, 남자인줄 알았다고 ㅋㅋㅋ
저는 딸이 없어서 늘 친구같은 딸이 갖고 싶은데요. 어머니하고 친구가 한번 되어드려보세요. 너무 좋아하실것 같아요!

헉 그랬나요 ㅋㅋㅋㅋ ㅠㅠ 죄송해요.. 에빵님ㅋㅋ
어머니랑은 친구처럼 지내요. 가장 좋은 친구같아요 이젠.

어멋! 아니예요. 코코님! 미안해요. 다른 분이 그러셨는데 헷갈렸어요. 미안해서 어쩌죠? 오늘 지난 댓글 다 뒤져서 찾아냈어요. 코코님하고 똑같이 남자인줄 알았다는 분이 계시더라구요. 아구 쏘리~ 미안해서 보팅 꾹!

저는 난중에 어떤 아빠가 될까 걱정이 되네요ㅜ
흑흑 에너자이저님 맛있는저녁드시고 편안한밤되세요^^

다정하고 좋은 아빠가 되실것 같아요 ㅎㅎ 우부님도 즐거운 저녁 되세요~

역시 부모는 너무 대단하면서도 쉽지 않은 역할이네요-
많은 생각 하고 갑니다!

우리 부모님 보면서 그런 생각했는데 이젠 제가 부모가 되었네요 ㅎ

아이들에겐 그 나이에 맞는, 그 나이에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보여 주는것이 참 중요할듯 합니다!
공부하란 잔소리보다 책을 읽는 부모의 모습, 부모의 바른 행동들...
지금의 생각만으로도 아이는 충분히 잘 자라리라 생각됩니다^^

마구 찔리고 막 ㅠㅠ 바른 모습을 보여줘야는데 엄마는 가끔 들짐승이 되고 맙니다 ㅠㅠ

부모 노릇이 참 쉽지 않습니다. 전 아이한테 대놓고 그랬어요. 너도 인생 처음 살지만 나도 아빠 노릇은 태어나 처음이다. 너나 나나 시행착오가 많을테니 서로 도와가며 해보자. 애가 황당해 하더라는...

아무래도 아빠의 사랑은 엄마보다는 좀 둔탁하고 무책임하고 엉성하죠. 엄마 입장에서는 좋은 역할은 남편이 다 하고 악역을 떠맡는 서운함이 생길 것 같습니다. 암튼, 저는 부모가 아이한테 꼭 해줘야 할 건 성인이 될 때까지의 안전과 즐거운 기억 정도라고 생각해요. 뭐 지금이 일제시대도 아니고 우리 나라가 빈곤국도 아닌데, 굳이 이 아이가 나라를 구하거나 집안을 일으킬 인재가 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공부는 대충 시켰습니다. 나중에 아이가 아빠를 원망할지도 모르지만 변명거리는 있으니까요. 나도 처음..

정확하게 이야기해주셨어요. 엄마는 왜 항상 악역을 자처하는건지... 솔직한 아빠덕에 아이가 마음을 많이 열었을것 같네요. 가족간에도 소통이 중요하더라구요. 대한민국 아빠들 화이팅입니다!

그러니 내 아이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유일한 것은 내가 먼저 잘 사는 것, 내 삶을 똑바로 사는 것이었다.

심한 공감을 합니다.
결국 나를 보고 그대로 배운다는.....^^

맞아요. 애들은 따라쟁이여요 ㅎ

아이가 예쁘게 잘 클거 같아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제발 그래야죠.

박노해 시인의 글에는 울림이 있죠! 잘 봤습니다.

잘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난 지금부터 저 강과 같은 엄마가 될거야!"

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데요. 반응에 따라 장르가 확 바뀔 타이밍인데... 시트콤으로 끝났을지 감동적인 성장드라마로 끝났을지...

반응은요.... 에궁 그게 말이죠.
(힐끔 쳐다보며) 뭔개소리???
(바로 꼬리내리며) 깨강깨강

리얼리즘의 정수군요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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