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동(牛耳洞)의 놀

in #kr8 months ago

나는 승려이므로 많은 길을 걷는다.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고 들길을 걷는다. 문명이 발달하고 나이가 더해 가고 도시에 머무르게 되면서부터 내 발로 땅을 딛고 걷기보다는 택시를 타고 가는 횟수가 더 많아졌으나 그 '탄다'는 사실도 여전히 나에게는 '걷는다'라는 말로 번역되고 있다. 젊은 날에 너무나도 많이 그 '걷는 일'을 되풀이했기 때 문일 것이다.
이 세모에 생각나는 일은, 조계종(曹溪宗)을 탈퇴한다는 폭
탄적인 선언을 하고 선학원(禪學院)에서 도선사로 들어가던
날의 긴 보행이다. 그날 나는 저녁 6시경에 선학원에서 택시 를 잡아타고 도선사로 향했다. '도선사 입구'라는 표지가 붙 은 우이동의 골짜기에서 내려 홀로 비탈길을 올라갔다. 저녁 은 아름다웠다. 나뭇가지에 닿는 바람소리, 골짜기의 물소
리, 그리고 일대를 물들이고 있는 붉은 놀……
산사람들에게 놀처럼 정겹고속세를 그립게 하는 것은 없 다. 그것은 정진의 길에서의 그 어떤 의지라기보다는 그 어 떤 분위기였고 인간적인 것의 정경이었다. 그러므로 놀이 내릴 때 산사람들은 가장 많이 동요된다고 한다. 그날 내가 그 렇게 흥분된 상태에서 그 놀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은 조계종을 탈퇴했다는 평면적인 사실보다는 뭐라고 말하면 좋을 까, 지금까지 내가 믿고 걸어왔던 길, 그것이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마는 듯한, 너무도 심한 좌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조계종을 탈퇴했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나에게 가장 큰 타격이다. 나의 반생이란 그 조계종을 반석 위에 올려 놓으려는 단심(丹心)의 생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날 만난 친지들, 홍종인 씨라든지 황산덕 교수 등은 나의 처사가 한국
국 불교를 위해서는 이로운 일이 못 된다고 나무랐던 것이
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충고를 뿌리쳤다. 한국 불교의 백년 대계가 이런 식으로는 결코 세워질 수 없다는 나의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
백년대계를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혁이 한국 불교의 내부 에서 일어나야 한다. 불교란 세종(世尊)만을 모시고 개인의 영욕을 취하는 종교가 아니다. 그런 종교였다면 세존은 우루 베라 촌(村)의 보리수 아래서 그의 정각(正覺)을 가짐으로써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세존은 그 정각을 가짐으로써 오히려 세속으로 내려와 사해대중(四海大衆)들과 만났다. 그의 정각 은 세속인을 깨우치고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데에 뜻이 있었 다. 세존이 사해대중을 만났다는 사실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서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되풀이해서 이야기하자면 세존 은 대중을 만나기 위해서 그의 정각을 가졌고, 그러므로 오 늘의 불교 역시 대중을 만나기 위해서 그의 정각을 가져야 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정각이란 인생(人生苦)를 벗어 버리는 문제의 해결이다.
이 문제의 해결 속에 오늘의 불교의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
다. 이런 말을 하면서 나는 일찍이 종사(宗師)들이 경계하였 던 바를, 승려들이여, 사상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점과 말을 위한 말을 경계하라는 가르침을 명심한다. 중요한 것은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름다울 수도 있고 어리 석을 수도 있으며 지혜로울 수도 있다. 각 사람은 그 사상에 동의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고 묵살할 수도 있다. 모든 불교의 진리란 지식을 구하는 자를 위하여 세계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다. 즉 세계의 비애를 해탈하려는 것이다. '지식을 경계하라'는 말과 '세계의 비애를 해 탈하라'는 말 사이에 있어야 하는 것은 '행동하라'는 말일 것이 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각을 얻기 위해서 행동하라. 그리고 그것을 얻은 다음에도 행동하라. 행동하기 위해서는 그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고, 어느 하나를 배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취하는 길은 곧 버리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불자(佛子)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버리고 얻는 데 허위 나 외면으로 택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세존의 정신을 따르는 일까지도 그러하다. 우리들은 세존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려고 했던 일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저 '세계의 비애의 해탈'인 것이다. 결국 오늘의 세대가 불안
에 떨고 불교가 분규로 날을 새우는 것은 그러한 정신, 즉 정 각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얻는 길은 자 기 자신의 가장 깊은 곳, 자기의 선과 자기의 악까지 찾아 들 어가는 일이 될 것이다. 나 또한 입으로만 부르짖고 있는 불 교 유신의 길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나의 깊은 곳까지 찾아가 도록 언제나 힘써야 할 것이다.
길은 사람이 존재하는 한 언제나 있고, 그러므로 그 길은 영원하다. 인간의 정각 역시 마찬가지다. 완성이란 없다. 완성은 죽음뿐이다. 그리고 그 죽음도 다만 전변(轉變)에 지나 지 않는다. 부운(雲)과 같은 우리들의 생은 끊임없이 나아 가고 있을 뿐이다. 그 길에 어느 때는 저토록 붉은 놀이 내리고 눈이 내리고 인간의 외로운 발자국이 남겨지리라. 그 길은 나에게서 젊음을 빼앗아 갔다. 사랑을 빼앗아 갔다. 이름과 성까지도 빼앗아 갔다. 그러나 그 길은 더 많은 것을 나에 게 주었고, 그 길은 더 많은 것을 나에게 요구하고 또 주겠다 고 약속하고 있다. 이번의 탈퇴 역시도 그 길이 요구한 것이 었으리라. 내일의 한국 불교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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