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암호화폐와 미디어 세계

in #kr7 years ago (edited)

(매우 길고 전문적이지 않습니다. 저의 아직 부족한 지식에서 써진 글이기에 무시하셔도 무방합니다.)

대학교 1학년 첫 학기에 제가 들었던 수업은 '예술의 미학'이었습니다.
그 수업의 주 교재는 진중권 교수님의 저서 미학 오딧세이 전권이었지요.

미학 오딧세이 가장 첫 부분에 나오는 내용은 시뮬라크르에 대해서입니다.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이 낯설게 느껴지실 분들을 위해 운을 띄워보자면
'원본의 복제, 원본을 상회하는 복제'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가 1981년 그의 저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 쓴 표현이지만 그 개념은 저 옛날 플라톤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이데아라고 하는 완벽한 세상의 그림자라고 한다면, 그 안의 불완전한 존재들은 시뮬라크르이지요.
'우리'는 착한 복제이고, '우리의 사본'은 나쁜 복제입니다.

시뮬라크르에 대해 다루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대표적으로 영화 '매트릭스'가 있습니다.
매트릭스 안의 세계는 기계들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와 환상에 불과하지만 그 안을 사는 인간들에겐 무엇보다도 더
'리얼'한 현실이지요.

앤디 워홀의 팝아트는, 원본의 복사를 수만장으로 또 복사한 후 그것을 열거하는 것으로 유명하죠. 마릴린 먼로의 얼굴 사진 수천장을 복사하여 늘어놓습니다. 일반 대중들은 한 번도 눈앞에서 마릴린 먼로를 본 적도 만진 적도 없지만, 미디어가 낳은 마릴린 먼로의 사진이 뇌리에 박혀, 이제 실제 그녀의 얼굴은 사라지고 사진 속 그녀의 얼굴이 '진짜'가 되죠.

인상파 이전의 미술이 주로 '재현'에 중점을 두었다면 인상파들은 그것 자체를 깨부수고, 자신이 바라본 대상의 '이미지'를 재현하려 합니다. 즉 눈 앞의 사과가 빨갛고, 둥그렇다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자신이 사과를 바라보았을 때 느낀 '인상'을 캔버스에 담으려 하죠. 더 이상 캔버스에 그려진 사과는 현실 속 사과를 전혀 닮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은 그것을 위대한 작품이라 칭송하고 사과라고 부르게 되죠.

이제 우리네 세상엔 수많은 시뮬라크르가 존재합니다. 사실 시뮬라크르에 의해서 세상이 흘러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동전과 지폐는 실질적입니다. 손으로 만지면 촉감이 있지요. 그것이 화폐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장에 입금하면 어떻게 될까요? 실질적인 동전과 지폐는 사라지고, 액정 화면과 통장 잔고에 데이터가 됩니다.
데이터는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돈이지요. 자본주의를 확실하게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우리를 지배하고 인생을 판가름 하는 것이 데이터인 것이지요. 이제는 지갑에 지폐를 넣고 다니는 사람도 드뭅니다. 카운터에서 카드를 긁어 데이터만 전송될 뿐인데 물건을 살 수 있고 모든 걸 할 수 있죠. 데이터가 이미 화폐의 기능을 상회했고 화폐는 그 기능이 다했습니다.

미디어 속의 이미지들은 사람들의 행동과 심리를 교묘히 조종합니다. 수많은 광고들은 단순히 제품을 판매하려는 목적 같지만, 더 나아가 사람들에게 일정한 패턴을 강요합니다. 한국의 맥주 광고는 더 이상 자신들의 '맥주'에 대해 광고하지 않습니다. 맥주를 마시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것을 청춘이라고 묘사하는 이미지들, 힘든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맥주로 속을 푸는 풍경. 맥주의 맛, 품질, 가격에 대해선 이제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맥주를 마시는 이미지'자체만을 광고하죠. 그것을 바라본 사람들은 무의식 속에서 '힘들고 지칠 땐 나도 저렇게 해야겠구나.' '젊음을 즐기기 위해선 다같이 모여 저 맥주를 마셔야 하는 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더 이상 맥주는 맥주가 아닙니다. 맥주는 하나의 이미지가 됩니다. 우리가 그 이미지 안에 들어가기 위해선 맥주를 소비해야 겠지요.그렇게 맥주회사가 돈을 법니다.

뉴스 속 전쟁과 테러, 사고와 재앙. 그러나 우리는 그 참혹한 현장 안에 있지 않습니다. 티비 화면을 통해서, 저 멀리 어딘가의 극동 아시아에서 오늘 또 자살 테러가 일어났구나, 몇명이 죽었구나. 하고 알게 되지요. 어느 지역에서 교통사고가 크게 나 몇명이 다쳤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 그 상황에 있던 게 아닙니다. 티비에서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지요. 뉴스에서 어느 나라가 쏜 미사일 화면이 나오면, 그 궤도가 어떻고 어떤 미사일이었다. 전문가가 나와 이러이러하다고 말합니다. 저화질로 촬영된 무언가 핵스러운 물건을 만지는 장면이 자꾸만 되감기 되고, 핵미사일이 발사되는 모습이 비쳐집니다. 뉴스를 보는 이들은 전쟁의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공포는 분명하게 누군가에겐 이득이 되고 누군가에겐 손해가 됩니다.

미디어는 이미 현실을 상회했습니다. 사람들은 눈앞의 현실보다 미디어를 더 믿게 되었지요. 자신이 듣고 싶은 소식, 듣고 싶은 뉴스만을 즐겨찾기 하고,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의견은 뮤트해버립니다. 그러면 자신이 원하는 세상이 되지요. 아주 간단합니다.

장 보드리야르가 경고한 것은 바로 이런 것에 대해서였습니다. '시뮬라시옹'이란 '복제가 원본을 상회하고, 원본이 그 기능을 상실하는 것, 복제가 원본을 대신하는 것 또는 복제를 통해서 원본을 떠올리는 것'이지요.

이제 단순히 계좌 속 데이터를 뛰어넘어, 암호화폐가 등장했습니다. 대한민국이 들썩이고 있습니다. 미디어에서는 암호화폐에 대해서 다루기 시작합니다. 커뮤니티에서는 항상 비트코인에 대해서 떠들썩합니다. 버스에 암호화폐거래소 광고가 걸리고, 너나나나 이젠 암호화폐에 대해서 논의하기 시작합니다.

과연 암호화폐는 이제 더 나아가, 현금의 기능을 상회하게 될까요?
암호화폐의 중요성이 더 대두되면 미디어는 어떻게 이것을 다루기 시작할까요? 대기업들은 또 이것을 어떤 식으로 이용하려 할까요? 미디어는 암호화폐를 어떤 식의 이미지로 소비하기 시작할까요? 그리고 그것이 대중에게 고스란히 미칠 영향이란 무엇일까요.

암호화폐와 미디어. 이 둘 중 무엇이 플라톤이 말하는 착한 복제이고 무엇이 나쁜 복제일까요.
그러나 사실, 화폐 자체도 결국 집, 음식, 도구를 교환하기 위한 시뮬라크르에 불과합니다. 종이 한장이 실질적인 물건 하나보다 더 가치가 있어졌으니까요. 암호화폐는 진짜 화폐의 복제가 아닌, 서로 똑같은 복제였던 것이죠:)

시뮬라크르가 넘치는 시대에서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무엇이 착한 복제이고 무엇이 나쁜 복제인지 검열해야 하는 위치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새벽 감성에 두서없게 쓴 글을 지금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저는 전문가나 이쪽 전공이 아니다보니 쓴 내용 중 틀린 부분, 비약된 부분이 많음을 인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게 주시는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혹 불쾌하게 받아들이시는 분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수필처럼 가볍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이런 미래를 모두 예측한듯한 장 보드리야르 아저씨가 대단할 따름 ㅋㅋㅋㅋ 지금까지 제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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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화폐는 전혀 새로운 개념이 아닙니다.
금본위제가 철회된 이후의 모든 화폐는 가상의 것이었습니다.
다만 종이화폐에 비해 좀 더 날것의 형태로 다가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본문의 비유에 따르자면 매트릭스에서 빨간약을 먹어버린 것이지요.

대중의 심상에 그려진 화폐란 그림이 더 또렷하게 다시 그려졌을 뿐입니다.

PS. 가상화폐란 용어는 crypto currency의 오역입니다. 암호화폐란 표현이 더 부합합니다.

맞는 말씀이네요, 한 번 더 배우게 됩니다.(앗 그 부분도 수정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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