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SIK / ⟪금강경⟫ 이야기 #9 (마지막) "좋은 것도 내려놓자" - 과거심도, 현재심도, 미래심도 찾을 수 없다
⟪금강경⟫의 끝없는 반복구, 중복되는 이야기들을 모두 걸러내고 새로운 주제들만으로 이야기를 전개했지만, 여전히 그말이 그말 같다. 노파심과 잔소리는 질문자인 수보리와 답변가인 부처님 두 사람 모두 상당했지만, 그 정도의 반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쩌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이 ⟪금강경⟫인지도 모르겠다.
수보리가 맨 처음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손을 들고 부처님에게 질문을 할 때를 이제 되돌아 보아야 한다. 분명 ⟪금강경⟫은 “보살이 어떤 마 음으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하자면 “어떤 마음으로 사는 이가 보살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그런데 수보리 입장에서는 사람들을 대표해서 질문을 했으니 이 이야기를 완성시키려면 이후, 그러니까 지금이⟪금강경⟫을 읽고 있는 우리들이 이 내용을 이해하기는 조금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래서 그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어떻게든 이해를 하겠는데, 이후의 사람들이 이 난해함을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한다. 부처님의 대답은 분명하다.
如來滅後 後五百歲 有持戒修 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 實 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 佛所 種諸善根 聞是章句 乃至 一念生淨信者
[석가모니라는] 여래가 사라진 후 5백년이 지난다 해도 계율을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으니 이 가르침의 구절에 대해서 이해하고 믿는 마음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이 사람은 한분, 두분, 세분, 네분, 다섯 분의 부처님께 [가르침을 듣고] 선행의 씨앗을 [심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천만 부처님께 [가르침을 듣고] 온갖 선행의 씨앗을 [심은] 사람이어서 이 가르침을 듣고는 단번에 올바르게 [이해하고] 믿을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분명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해하는 사람은 이미 오랫동안 공부를 하고 복을 닦은 사람이니 아무나 이해하지는 못할거란 역설이다. 그렇다. 쉽지 않다는 말이다. 여기서 계율과 복덕이란 부처님이 보통사람들에게 쉽게 설명한 대목이다. 출가한 제자들에게는 어려운 이야기들을 많이 했지만, 보통사람들, 그러니까 재가불자들 대부분에게는 사회윤리와 사회봉사를 열심히 하라고만 말씀했다. 당시 출가자란 불교에 있어서 전문가를 의미했고, 재가자란 생업에 종사하는, 그러니까 불교를 전문적으로 공부할 만한 현실적인 여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니 이 대목에서 계율을 지키고 복을 닦으라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던 부분이다. 이제 오늘날 재가불자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은 아니다. 오늘날은 재가와 출가자가 상관없이 불자들은 불교의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 시대이다.
이 ⟪금강경⟫을 부처님한테 듣지 않아도 이해를 할 사람들은 이미 그 내공이 어느 정도 쌓여야 가능한다는 말이 되겠다. 그리고 그 내공이란 그냥 쌓인게 아니라 자그마치 천만 부처님들을 거치며 배운 수준이다.
如來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 無量福德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여래는 이와 같이 [그의] 복덕이 헤아 릴수없음을 모두 알고, 다 보니, 왜냐면 이런 중생은 다시 나라는, 중생이란, 사람이란, 수명을 가진이란, 법의 형태가 없다거나, 법 아닌 것의 형태도 없다고 하는 고정된 모습/모양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금강경⟫을 이해하 는 엄청난 수준의 사람은 부처님이 다 볼것 이라니, 지난번 부처님에게 존경받는 제자가 될 것 이란 말 다음으로 부처님에게 듣고 싶은 말일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더 잘이해하게 되면 나를 부처님이 존경하고, 내 공덕이 엄청남을 당신이 봐 준다고 약속했으니 우리가 상상하는 실제 부처님을 만나려고 할 필요도 없고, 어떤 복을 쌓아서 그 공덕을 챙기려고 할 필요도 없다.
대개 우리는 상대를 판단하면서 그 내공이 얼마나 되는지를 저울질 하려하고, 나도 높은 내공의 소유자가 되려 하지만 별로 자신의 삶을 업그레이드 시키려 하지 않는다. 1년, 5년, 또 10년이 지난 후에 어떤 기억나는 한 순간의 과거가 분명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의 영역보다 더 작아보여야 하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은 깊어지고 마음이 넓어지는데는 끝이없다. 몇 년 전의 이해하지 못하고, 품지 못했던 것을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면 삶이 어떻게 나아졌는지는 몰라도 혹 마음이 빈곤한 것은 아닌가. 업그레이드란, 대개 무엇을 얻어서 가능하다고 여기지만, 더 내려놓고, 벽을 허물 때 이루어진다.
불자로 살아온지 10년, 20년, 30년이 지난 사람들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흔히 하는 말로 신심도 한없이 깊고, 그동안 읽은 경전, 앉아서 명상했던 시간, 만나본 큰스님들, 절을 하기 위해 구부렸던 무릎의 횟수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 불자들을 우리는 수없이 봤다. 무언가 도를 얻은 초연한 사람처럼 행동하기도하고, 걸림이 없는 것 같이 모든 경계에서 자유로운 것 같기도 하고, 또 목소리에서 기품이 여겨지기도 하고, 눈빛이 그윽하기도 하고, 뭔가 알 수 없는 고차원적인 말을 던지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저 사 람은 마음 쓰는게 역시 오래된 불자구나”라고 느낌을 준 사람은 만나기 어렵다.
그것이 비단 우리에게 볼 수 있는 눈이 없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불교를 접하면서 뭔가 많은것을 얻기는 했는데 여전히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 아닐까.다운로드만 받아두고 설치가 이루어지질 않았다. 불자라면, 이해관계에서 벗어나고, 때로는 옳고 그름이란 나름의 기준도 휙 던져버릴 수 있어야 한다. 이득과 손실, 옳고 그름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을 때 그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넓고 깊어질 수 있을까.
⟪금강경⟫은 종국에 ⟪금강경⟫마저 던지고 부처님의 말씀도 던져 버린다. ⟪금강경⟫을 설하면서 부처님 당신이 직접하는 이야기다.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以 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 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 況非法
그러니 진리도 붙잡지 말고, 진리 아 닌 것도 붙잡지 마십시오. 이런 이유로 여래는 항상 그대들 비구들은 나의 설 법에 대해 마치 땟목의 비유하는 것과 같이 알라고 거듭 말하는 것입니다. 진 리도 오히려 버려야 하니, 하물며 진리가 아닌 것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고정된 틀로 다가오는 여러 상들, 고집들, 이게 아니면 안된다는, 이것만이 옳다는 그 돌처럼, 엿처럼 굳어버린, 그것을 상이라고 하고 그게 어떻게 산산히 부서져야 하는지를 계속해서 이야기 해 왔다. 그리고 다시 그런 진리, 부처님 말씀, ⟪금강경⟫조차도 역시 하나의 상이니 다 읽었으면 붙들고 있지말라는 이 가르침은 글쎄, 개인적으로는 ‘신심 돋는’데 독자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결국 부처님은 당신의 설법이 우리의 인생에 해줄 수 있는 것은 강을 건너게 해 주는 작은 배정도에 지나지 않으니 그렇게 강을 건너면 거기서 더 걸어가라고 말씀한다. 강 건넜을 때 타고 온 작은 배에 대해서는 과감히 잊어버리고.
이게 성자의 스케일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당신이 평생 진리라고 사명처럼 전달했던 그 가르침조차 가볍게 배쯤으로 스스로 치부해 버리고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해주는 스승이 대체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붙잡지 말라, 그게 진리든, 진리가 아닌 것이든”
於意云何 如來得阿 多羅三 三菩提耶 如來有所說法耶
須菩提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 名阿 多羅三 三菩提 亦無有 定法 如來可說 如來所說法 皆 不可取不可說非法非非法所 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 法 而有差別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래가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습니까? 여래가 설법하였습니까?
제가 부처님의 설법한 뜻을 이해하 기로는 그 어떤 진리라고 정해진 것도 없는 진리를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또는 정해진 것이 없는 진리라고 부를 뿐입니다. 여래께서 말씀하기를 여래가 설한 진리에 대해서는 모두 잡을수도, 말할수도 없고, 진리도 아니며, 진리가 아닌 것도 아니니, 모든 현인과 성인은 모두 무위법으로 구분될 뿐입니다.
그 스승에 그 제자, 수보리는 이 대목에서 이미 완전히 종지부를 찍는다. ‘무유정법無有定法’ 뭔가 정해져 있는 거라면 그것은 절대 진리일 수 없 다. 움직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진리다.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이 진리니 어떤 정해진 상을 들이밀고 틀에 끼울려면 안되는 것이다.
무위無爲, 불교에서 무위는 '번뇌가 없다'는 의미이며 번뇌를 통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란 의미이다.
번뇌란 결국 좋아함이 지나치고, 증오가 지나치고 갈등하고, 잠못 이루는 마음의 어떤 상태를 말하는게 아닌가. 그러니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해지면 그게 무위, 열반이다. 성인이 부처님이라면 현인은 약간은 부족한 사람을 의미한다. 합쳐서 현성이라고도하고.
여튼 중생과 부처를 가를 수 있는것은 마음이 고요하냐 그렇지 않으냐의 차이밖엔 없다.
나도 사라지고, 진리도 사라지고, 금강경도 사라졌다. 무슨 의미일까? 중생과 부처와 시비를 가르는 모든 기준을 다 빼란 말이다. 그 기준과 구분은 세상의 원래 기준이 아니라 우리가 임의로 했던 것이니, 그야말로 모든 물이 바다로 흘러가면 바다란 이름과 짠맛 말고 강의 흔적이란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 생각조차, 마음조차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금강경⟫은 버려야 한다. 수없는 반복된 붓다의 당부가 그렇다. 이 금강경을 버리지 않는한, 금강경은 완성되지 않는다.
過去心 不可得 現在心 不可得 未來心 不可得
과거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고, 현 재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으며 다가올 마음도 붙잡을 수 없습니다.
(금강경 이야기를 꾸준히 구독해주신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안녕하세요 @bulsik 님!!
우선, 포스팅과는 동떨어진 댓글을 달게되서
정말정말 죄송합니다. ㅠㅠ
(알려드릴 방법이 없어서요;;;ㅠㅠ)
사실, @himapan님께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주셔서,
전달드리고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
himapan님께서 이 글을 통해서 '고마움'만 표시하고 싶다고 하셔서,
이렇게 대신 따듯한 마음만 전달드리러 들렸습니다. ^^
다시 한번 갑작스럽게 댓글을 작성하게된 점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멋진 것 같습니다. 하시는 프로젝트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추운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좋은 한 주 되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