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SIK / ⟪금강경⟫ 이야기 #7 "'부처'와 '중생'이 다르다고" - 이름이 중생, 이름이 무상정등각

in #kr7 years ago (edited)

지난번에 공덕을 크고 작다고 말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크다작다 하려면 뭔가 손에 잡히는 모양이 있어야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니까공덕은 그 크기를 잴 수 없는 것이맞다.


여전히 내가 베푼 선행과 보시가 얼마나 큰 공덕으로 부풀어서 돌아올까라는 막연한 기대는 ⟪금강경⟫을 여기까지 읽어오신 분들은 이제 살짝 초월해주셔야 하는 시점이 온다. 이번에는 그 '공덕을 짓는다'고 하는 '중생의 상相'도 버려줘야 한다.

혹시 '깨달음 지상주의'와 같은 말을 들어본 불자라면 알 것이다. 우리나라의 불교가 그동안 얼마나 '깨달음'이란 허상에 매달려 왔는지.그러니 저런말까지 나온다. 이제는 ‘깨침’과 ‘깨달음’이란 말이 다르다고 하는 이론까지 등장했다.


경전에는 ‘번뇌의 소멸’이 깨달음이라고 나온다. 깨달음은 경험의 영역이지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고 늘 주장하면서도 ‘깨달음’을 어떤 것을 얻는다거나, 어떤 단계에 올라서는 높은 경지의 것이라고 해놓았다. 그러니 거기에 올라가려고 바둥거리고, 그것을 얻지못한 사람을 '중생'이라고 생각하니 거기에 마음들이 죄다 매달려 있다.

법륜스님이 최근 동국대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토크콘서트를 하다가 다음일정에 밀려 먼저 자리를 뜨면서 계속 토크를 이어나갈 젊은 스님들의 말에 집중하라고 청중들에게 요청한다.

"늙은 스님의 이야기는 들을 게 별로 없어요. 왜냐하면 늙으면 저절로 알아지기 때문이에요"


불교의 가르침이 인생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과욕과 분노가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그렇게 마음이 호수처럼 고요해지고 따뜻해지면 그 순간을 이름붙여서 ‘깨달음’이라고 할 뿐이다. 그걸 ‘깨침’이라고 해도 좋고.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그것을 거듭 강조하신다. 만약 깨달음에 목적이란 것이 있다면 이른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행복해지는 것일텐데, 그럴려면 가장 먼저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으면 안된다.


누구는 끝없이 불행하고 누구는 그 불행을 밟고 그 위에서 행복하면 그게 어디 제대로 된 것이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잘못된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것이 바로 차별이다. 종교, 계급, 학력, 재산, 성별, 정신적 수준 등등.다르거나 없는 사람들은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비 판한다.


그래, 노력을 더 해서 더 나은 것들을 얻을 수 있다고 치자. 그럼 노력을 통해서 얻을 수 없는 피부색, 인종, 외모는?


까마귀는 나쁜 새고, 백로는 좋은 새인가? 근묵자흑 近墨者黑. 그런데 먹이 흰색이면 글자가 보이겠는가? 그런 잘못된 가치기준 계급, 차별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부처님은 가르쳤다. 그런데 여기와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과 얻지 못한 사람이란 구분을 더하는 것이, 그래서기를 쓰고 그 깨달음이란 걸 얻기 위해 바둥거리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불교의 방식인가?

깨달음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수없이 찾아오며 그것이 보통 사람이건, 불자건, 스님이건 상관없이 온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순간들조차도 스스로의 삶에 영속적인 변화를 끼칠 때만 의미가 있다. 그러니 깨달은 스님, 깨닫지 못한 스님, 도가 높은 스님, 큰스님, 청정한 스님, 영가를 보는 스님, 미래를 알아 맞추는 스님, 내 전생을 아는 스님, 영이 맑은 스님...


세상에서 경험 할 수 없는 뭔가 특별한 것을 추구하는, 뭔가 어떤 그런것.‘더러운’속세와 구분되는 뭔가 그런것. 그것이 정말 불교가 추구하는 것일까.


須菩提 菩薩 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 如來說 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 一切衆生 則非衆生
수보리여, 보살은 중생의 이익을 목적 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여래가 모든 모양이 정해진 것은 '사실은 모양이 아니라'고 말한 것처럼,또 모든 [부처에 상대적 개념으로] '중생'이라고 정해진 것은 중생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금강경⟫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전들 속에서 유독 우리에게 특별한 경전으로 기억되는 것은 물론 선종스님들이 이 금강경에 주목했다는 역 사적 사실도 있겠지만 불교가 말하는 깨달은 부처와 깨닫지 못한 중생의 경계를 허물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중생이란 상을 강조 하면 강조할 수록 부처란 상은 더 강해지고, 그 권위도 한없이 올라간다. 부처님이 중생들에게

"그대들도 나와 같은 길을 걸어 부처의 삶을살아라"

라고 했지,

"나는 깨달은 자이니 그대들은 중생으로서 항상 나의 가르침에 복종하라"


라고 하지 않았다. 부처의 권위가 올라가면 힘이 세진 부처가 더 많은 공덕을 중생에게 내려주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부처의 권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중생과 그 거리가 멀어질 뿐이다. 중생이란 이름은 욕심과 분노가 과할 때의 모습에 붙여진 형식적 탈에 불과하고, 어느 순간 마음이 고요해 지거나 선행을 베풀때는 그 순간은 부처의 모습이된다.그때를 우리는 깨달음의 많은 순간중 하나라고 부른다. 그렇게 부처와 중생이 왔다갔다 하니 상대적 개념으로 ‘부처’다 ‘중생’이다 라고 구분해서 부르는 것이지 본질적으로 우리가 중생이라면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須菩提 白佛言 世尊 佛得阿 多羅三 三菩提 爲無所得耶
수보리가 세존께 말했다. 세존이여, 부처님은 더할나위 없는 최고의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지만 실은 그 어떤 [깨달음]도 얻은게 없으신 거군요?


수보리는 분명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자신이 대표질문자이기 때문에 청중들을 그렇게 안내하기 위해서 방금 이해한 것과 같이 말하는 액션을 취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부처님의 말의 정곡을 딱 반복해서 질문해주니 부처님은 수보리의 반문에 얼마나 기분이 좋으셨을까. 스승의 뜻을 딱집어 알아주는 것 만큼 좋은 제자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如是如是 須菩提 我於阿 多羅 三 三菩提 乃至 無有少法可得 是名阿 多羅三 三菩提
맞습니다. 맞아요. 수보리여, 내가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바른 깨달음’이나 혹은 '조그마한 어떤 진리'라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바른 깨달음’이라고 그렇게 이름 붙였을 뿐입니다.


"아눗따라삼약삼보리 anuttarasamyaksambodhi"

웃따라uttara란 ‘위’의 비교급이다. 위쪽 혹은 북쪽이란 뜻도 있다. 앞에 부정 어기 an이 붙었다. samyak은 올바르다란 뜻이고 삼보디sambodhi는 깨달음이다. 중국에서 대개 ‘무상정등정각’이라고 번역된 ‘깨달음’ 이란 용어이다. 수식어를 붙이다보니 그렇게 되었겠으나 사실 부처님 한테는 이 말도 좀 깝깝했지 싶다. ‘깨달음’ 그러면 될 것을 굳이 ‘더 이상 위가 없는 최고 최상의 바른 깨달음’이라고 표현해야 했으니.


옛날 책에서는 한문발음을 '뇩'이라 고 썼으나 근래에는 원음에 가깝게 ‘누’라고 발음한다. 중생이란 개념과 부처란 개념은 이렇게 알고보면 별로 의미없이 그어진 가상의 선에 불과하다. 또한 수없이 왔다갔다 넘어다니니 그조차 아무 의미가 없다. 중생과 부처를 내려놓지 않으면 중생에서 벗어날 수도, 부처가 될 수도 없다. 그래서 불교는 물에 빠진 사람에게 지푸라기라도 던져주는 가르침이 아니라 잡고 있 던 지푸라기조차 빼앗아버린다. 그리고 그것만이 살 길 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실은 착각이었음을 알려주는 가르침이다.

그러면 ‘부처님’이 설했다는 ⟪금강경⟫ 은 부처와 중생이 사라진 자리에서 어떻게 되는것인가. 물론 이미 저번 지면에서 ⟪금강경⟫의 거취문제(?)에 대해 알아보았지만 다음에서 한번 더 살펴보자.


須菩提 汝勿謂如來作是念 我當 有所說法 莫作是念 何以故 若 人言 如來有所說法 卽爲謗佛 不能解我所說故 須菩提 說法者 無法可說 是名說法
수보리여 여래가 “나는 진리를 설한적 이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누군가가 부처님이 진리를 설했다고 한다면 그는 부처를 비방하는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리를 설했다고 할 수없기 때문에 수보리여 ‘진리를 말했다’는 것은 [진정으로] ‘진리를 말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부처가 사라진 마당에 너무도 당연하지만 ⟪금강경⟫도 사라진다. ⟪금강경⟫이 설해지던 순간 분명 그 가르침이 있었고 누군가는 그 설법을 기억하지만, 지나간 자리에 더이상 ⟪금강경⟫은 없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라는 존재가 있고, 또한 그 부처가 설한 가르침이 실재한다고 이해했다면 그 사람은 여래를 비난하는 것과 같다는 강력한 어조로 부처라는 깨달은 존재에 대한 어떤 미련도 갖지말라고 부처님은 충고한다. 그러니 그 상대적개념인 중생 또한 우리가 만든 번뇌에 쌓인 중생이란 상정일 뿐이지 없다는 것이다. 결국 ‘부처’며 ‘중생’ 이며 하는 개념조차도 우리가 만들어낸 하나의 가정일 뿐이며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도, 깨달은 부처에 의해 제도되어야 할 중생도 실재가 아니다.

모든 관념은 우리가 만들어 놓고 그것이 실재인양 매달려 놀아나는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방향을 잃어버린 것도 원래 방향이란 것을 정해 놓으니 잃어버리는 일도 생긴다는 비유나, 현대의 심리학에서 역할극과 같은 것이다.


부처의 몸짓이 이루어지는 그 때‘부처’가 있고, ‘중생’의 행위가 있을 때‘중생’이며, 진리가 말해질 때 ‘진리’가 있다. 부처의 몸짓과 중생의 행위가 없을 때는 부처도, 중생도 없다. 그렇다면, 부처와 중생이란 상대적 개념이 사라진 이 순간. 대체 우리는 왜 역할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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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가르침이 마음에 와 꽃히는 법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과 달라 늘 마음속에 괴리가 있던 부분을 좀 확연하게 드러 내주는 말씀 이었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gaeteul님 항상 방문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너무나 좋은 말씀을 나눠주셔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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