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SIK / ⟪금강경⟫ 이야기 #6 "신심, 제대로 된 이해를 통해" - 금강경은 없다

in #kr7 years ago

성철스님의

산은 산, 물은 물

은 선어록에 나오는 말이다. 한 때 이 문장 속에 숨은 어떤 깊은 뜻이 있나 하는 막연한 추측에 한 때 유행어가 된 적 이있다. 그렇게 유명하다니 보니 그 유사한 말들도 함께 쏟아졌다.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어제 본 산 은 같은산이로되 오늘 보는 이 산은 어제의 산이 아니더라”
“산은 물이 요, 물은 산”

...

원래 깨달음을 밝혀가는 과정에서 산과 물을 비유로 들어 산시산-수시수, 산비산-수비수, 산시수-수시산을 거쳐 다시 산시산-수시수로 돌아오기는 한다만...

아무튼 어디서 나온 말들인지, 누가 만든 말인지 아류들이 그렇게 한동안 유행을 타고 있을 무렵, 아마 고창에 있는 선운사였던 것 같다.경내에 있는 염주파는 가게에서 조그만 다포를 하나 사려는데 그 다포에 새겨진 딱 한줄을 보고 ‘풉’하고 웃음이 났다.

“산이건, 물이건, 그대로 두라”

아, 이 시리즈에서는 최고의 경지다. 독자들은 어떻게 여길지 모르겠다.


한 달 전 쯤 @kimsunggil님께서 캘리그라피 이벤트를 하시기에 부탁드렸더니 예쁜 작품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

https://steemit.com/kr/@kimsunggil/bulsik


산이건물이건5.jpg


아무튼 지독하게 반복되는 지루한 금강경이 이제 이름이 등장한다. 이름이 붙여졌으니 오늘날 우리가 이 경을 ‘거시기’라고 안부르고 ‘금강경’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테니까 사실 이 부분은 후대의 독자들을 위한 수보리의 배려이다.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 云何奉持
"부처님, 지금 말씀하시는 이 가르침을 무엇이라고 해야하며 저희들이 [기억하고] 따르면 되겠습니까?”

是經名爲 金剛般若波羅蜜 以是 名字 汝當奉持 所以者何 佛說 般若波羅蜜 則非般若波羅蜜
"이 이야기는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하면 됩니다. 이 이름으로 그대들이 [기억하고] 따르면 됩니다. [이렇게 이름하는] 이유는 지혜바라밀이라는 것도 곧 지혜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 정말 우주최강 잔소리다.

금강경은 대체 이 말을 몇 번을 반복하는 것인가. 마치 엄마가 어린아이에게 했던 말을 수 없이 반복하는 것 처럼, 끊임 없이 뱉은 말을 부정하고 부정하고, 또 부정한다. 금강경에 나타나는 부처님 말씀의 노파심은 이런 수준이다.

그런데 왜 부처님은 금강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원래 금강은 '벼락'이나 '천둥'을 뜻하는 Vajra의 번역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의미가 '다이아몬드'로 바뀌었다. 그래서 영어로 이 금강경의 이름은 'Diamond Sutra'다. 이 금강경은 큰 반야경이란 책의 한 부분인데 원래 이름은 ‘능단금강분 能斷金剛'이다. 번뇌를 잘라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여러가지 번뇌 중 금강경이 말하는 번뇌는 ‘상相’이다. 그 상이라는게 실제로 있는 모양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모양이 영원불변한 진짜라고 믿는, 마음속에서 그려낸 상을의미한다.

변화와 소멸, 그리고 고통

왜 영원하다는 믿음을 부처님은 '동심파괴'하려고 했을까. 어차피 세월이 가면 누구나 다 알게 되는 그 사실을 굳이 굳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미리 알려두려고 했을까.

부처님은 누구보다도 정신적인 고통을 못견뎌 하던 분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에 고통을 준다는 사실, 그걸 밝히고 싶어했다. 그리고 당신이 밝혀낸 사실은 오늘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

여기엔 '변화'와 '소멸'이 모두 포함된다. 사랑하는 이의 나를 향한 마음도, 누군가를 사랑하던 내 마음도, 소유하고 있던 그 어떤 것들도 변하고, 부서지고, 소멸하고. 내 모습도. 내 마음도.

예쁜것은 예쁜줄 알면되고, 예뻐하면 된다.
좋은 것은 좋은 줄 알고 좋아하면 된다.
소중한 것은 소중하게 여기면 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언젠간 변하고 소멸할 것들이니 거기에 너무 마음을 묶어 두지 말라는 것

그것 뿐이다. 부처님은 사실 그게 진짜상이건, 가짜상이건 그것에 관심 있었던 것은 아니다. 괜스리 마음을 그 상에 온통 묶어 두었다가그것이 내게 고통을 줄 때 아파서 바둥거리게 되는 것을 걱정 했을 뿐이다.

그러니 보이는 상을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고 중얼거리며 가짜임을 상기시킨다고 해도 그것이 곧 ⟪금강경⟫을 제대로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그게 진짜냐 가짜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내 삶이 고통을 얼마나 받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치 자전거를 처음 타는 것 처럼 금강경을 타고 그 균형을 잡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수없이 ‘도리도리’하며 부정적인 측면을 끊임없이 강조하며 왼쪽으로 핸들을 돌렸다면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핸들을 꺾어보자.


若復有人 聞此經典 信心不逆 其福勝彼 何況書寫 受持 讀誦 爲人解說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가르침을 잘 이해한다면 이 복덕은 [재물로 보시한] 앞의 사람의 복덕보다 더 뛰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을 베껴쓰고, 지니고, 읽고, 누군가를 위해 설명해 준다면 [그 공덕이야 말로]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렇다. 이제 모든 것을 부정했고, 또 앞에서 이 가르침의 언어들은 이름일 뿐이라고 했지만,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만큼 많은 보시를 했던 사람보다도 이 가르침을 누군가에게 베풀어 준 사람에게 훨씬 큰 공덕이 있을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했다. “모든 상을 부정해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큰 공덕이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차차 논의하기로 하고,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그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엄청난 재물로 보시를 하게 된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의 생활고가 사라질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 많은세상이 있는데, 그 세상에 가득찬 보석들로 보시한다면 - 세상에 그만 큼의 보석이 있을지도 의문이고, 또 있다고 하면 보석의 가치가 얼마나 떨어질까 싶기도 하지만 - 생활고란 말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겠는가.

불교가 우리에게 쓸모와 의미가 있는가

그런데 인류의 생활고를 해결해 주는 것 보다 정말 ⟪금강경⟫이란 가르침이 더 큰 공덕이 될 수 있을까?
필자도 그 답은 잘 모른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적용 되는가 하는 것이 더 문제이다.


서울시내 지하철 역사입구나 식당카운터에서 공짜로 마구 나눠주는 인 터넷 머니가 있다. 지폐모양을 베낀 도안등에 10만원에서 100만원까지 다양한 금액이 적혀져있고, 그 금액만큼의 포인트를 실제로 인터넷에서 사용할 수도 있다. 물론 회원으로 가입해서 내 정보를 줘야한다. 하지만 일정부분 회원들의 정보를 모으고 나면 그 사이트는 폐쇄되어 버리거나 관리가 안되는 엉망진창으로 금방 변해버린다.


경전은 매우 가치있는 철학적 정보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해석도 적용도 되지 않고 비판적으로 보지 않는 이에게 그 경전이 가짜는 아니지만 마치 100만원짜리 인터넷 머니처럼 비싼 액면가의 종이쪽지가 되어버리지는 않을까. 결국 경전자체가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가의 여부는 독자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불교경전을 읽는 독자들이 날카롭게 의문을 제기할 때만 경전은 진리가 된다. 그걸 선종에선 '화두'라고 부른다.


흔히들 오해를 한다.

"‘신심, 믿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신심이 없다고 누군가를 핀잔하는 사람들도 있고, 스스로에게 신심이 없음을 한탄하는 사람도 있다. 마치 애국심이 없다고 누군가를 핀잔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불교를 공부하고 접하면서 무언가 작은 깨달음이나 마음의 반향이 있었다면 신심이야 절로 날것이다. 신심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를 배우고 이해하다 보 면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기쁨이고 신뢰일 뿐이다. 그런데 그게 없다고 한탄을 하거나 남에게 핀잔을 하고 앉아있는 바보들도 수없이 많다.


부처님이 뭔 말을 했는지에는 관심이 없고, 삶에서 자신이나 타인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지 않는 사람은 불자가 아니다. 부처님에게 달라고 빌어서 줄 복이었으면 빌고 떼쓰지 않아도 부처님은 벌써 주었을 것이고, 기도하지 않는다고 복을 주지 않았다면 그건 부처님이 아니라 나쁜놈이다.

자, 그러면 모든 상들을 부정하면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상은 받아들여도 되는가에 대한 최초의 질문에 대한 금강경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發阿多羅三葯三菩提心者 於一切法 應如是知 如是見 如是信解 不生法相 所言法相者 如來說 卽非法相 是名法相
최상의 바른 깨달음의 마음을 낸 이는 모든것에 있어서 이와같이 알고, 이와같이 보며, 이와같이 믿고 이해할 것입니다. 어떤 [정해진] 법의 모양도 존재하지 않으나 법의 형태를 이야기하는 것은 [정해진] 법의 모양이 아니라 그렇게 [정한] 법의 모양이 [있는 것 처럼] 이름 으로 있을 뿐입니다.


이 대목이 없다면, 앞 대목의 부처님 말씀은 틀린게 되어버린다. 분명이 금강경 내내 어떤상도 없다라고수 없이 반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 읽어보지 않아도 반드시 이렇게 진리라는 상조차도 부정하는 대목이 나와줘야 한다. 진작에 모든 복덕에 대해 모조리 부정해 버렸는데 복덕의 크고 작음을 말하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다만, 그만큼 보살에게 있어서 복덕이란 그 물질의 양과 모양으로는 가늠할 수 있는게 아니며 그걸 놓아버리고 다시, 놓아버렸다는 사실조차 한 번 더 놓아버림으로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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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_불식 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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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게 없는 세상에 인간이 자꾸 의미를 부여하고 따라오라 하지요. 정신줄 놓구 살아야 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정신줄은 살짝 놓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살짝 만요? 완전히 놓구 살아 버릴라고 하는데요!

오늘 글을 읽다보니, 일본의 겐고법사님(일본중세시대 스님이십니다 ^^)이 쓰레즈레구사(徒然草/초연사)라는 책에 남기셨던 말이 떠오르네요!

世は定めなきこそ意味じけれ。(요와사다메나키코소이미지케레/세상은 정해진것이 없기에 의미가 있다.)

오늘도 마음속으로 와 닫는 말씀 잘 듣고 갑니다 :D

정해진 것이 없기에 의미가 있다. 좋은 말이네요^^ @sleepcat님 일본에 대한 지식이 상당하신 것 같습니다. 불교에 대해서도 상당히 익숙하신 것 같고... 항상 들러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그냥 초파일에만 살짝 가서 등하나 올리고 오는 단순 날날이 불교도일 뿐입니다 ㅎㅎ 저야말로 항상 좋은 말씀 잘 보고 있습니다 :D

법문 감사합니다. 다른 법문도 좋았지만 '산이건 물이건 그래로 두라'는 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gaeteul님 방문에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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