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SIK / ⟪금강경⟫ 이야기 #2 "아, 사뜨바여!" - 네 가지 중생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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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지난 번에 수보리가 그 자리에 앉아있던 대중들을 대표해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과연 그가 어떤 질문으로 “이 고요한 정적을 깨뜨릴까?” 1,250명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의 입을 쳐다 보고 있는 것은 ⟪금강경⟫을 읽는 사람도 마찬가지겠다.


그가 어떤 말로 시작할지 궁금하지 않은 독자라면 아마 ⟪금강경⟫을 읽는 과정은 분명 지루한 여정이 될 것이다. 수보리의 모두발언에서 우리는 그의 수준을 알 수 있게 되고, 그가 그 자리의 다른 사람들을 어느 정도 고려하고 있는지, 제자들의 관심사가 여기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그 실마리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몇 가지 질문을 하고나면 아마 그 다음부터는 대부분 부처님이 질문의 주도권을 갖고 이야기를 이끌어 갈 것이 다. 그런데...
수보리는 엉뚱하게도 부처님을 앞에 두고 부처님에 대한 칭찬을 먼저 꺼낸다.

“당신은 보살들의 마음을 잘지켜주시고 감싸주는 분입니다”

에헤이...


만약 이 무대가 역사적인 배경을 고려하고 있다면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은 사실 ‘보살’이 아니라 ‘비구’이다. 즉, 스님들이다. 불교 교리에서 보살과 비구는 그 위상이 다르다. 비구란 출가해서 200조가 넘는 수의 계를 받고 교단에 머무는 스님들을 가리키고, 보살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한 이들은 모든 존재들의 이익을 위해 베풀고 버리는 삶, 6가지의 바라밀이란 삶을 기준으로 사는 이들이다.

그런데 보살은 스님이건(출가)와 아니건(재가)가 상관이 없다. 대개 스님이 전형적인 부처님의 제자라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스님이란 불교를 배우는 여러 가지 길 중에 하나일 뿐이다. 대승불교란 가르침에서는 출가인가 재가인가란 형식적 구분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서울로 올라 가는 중부고속도로에서 제1선을 타나 제2선을 타느냐가 큰 차이가 없듯 같은 목적지를 향하는 다른 길일 뿐이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는 원래 소승불교(이제는 잘 쓰지 않는 표현이지만)로 출가자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이기 때문에 출가자와 재가자가 명확하게 구분되지만, 대승불교권인 우리나라의 경우는 사실 불교도에 있어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 소승불교전통 역시 받아들였기 때문에 대승전통임에도 불구하고 스님이란 존재를 특별한 위상으로 받아들인다.

불자들은 재가나 출가자나 똑같이 보살계를 받으면서도, 스님들은 따로 스님들의 계를 받고 그 전통을 따르기 때문에 출가스님과 재가불자의 관계는 매우 모호하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공경’, ‘예의’니 하는 것들은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공경’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금강경⟫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출가한 스님이란 형식을 특정 카르텔이나 클래스처럼 받아들인다면 그건 분명한 오류이다. 그래서 대승불교전통에서 기록된 ⟪금강경⟫역시 ‘비구’스님들도 모두‘보살’로 보는 것이다. 즉 비구인 동시에 보살이다. 이런 이들을 ‘출가보살’이라고 부른다. 물론 재가불자님들은 ‘재가보살’이다. 이제 ‘1,250인의 비구들’은 ‘1,250인의 '스님보살'들 혹은 1250인 의 '보살스님'들로 알고 있도록 하자.


그런데 그 많은 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부처님 한 분을 모셔두고 그 앞에서 대놓고 “참 잘나셨습니다”란 칭찬은 우리가 보기엔 조금 낯간지러운 것이 사실이다.

다만 이것은 “보살은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 ⟪금강경⟫의 표현 방식으로 조금 바꾸자면, “어떻게 사는 삶을 보살이라고 하는가?”가 주제이니까 먼저 부처님은 보살이란 존재를 어떻게 여기는가 하는 것을 대중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나온 표현이라고 볼 수 있겠다. 동참한 모든 이들에게 부처님을 소개하는 수보리의 사회자 멘트인 셈이다.

아... 우리 석가모니 붓다께서는 그동안 보살들을 매우 잘 챙겨주시느라 항상 애쓰시는 분으로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은 이 부처님의 강의를 귀기울여 들으시면 보살로서 경력에 큰 도움이 되실겁니다. 네네...


또한 예전 사람들은 불경을 문자로 서술하거나, 논문을 쓸 때 불교도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칭찬을 맨 앞에 쓰고 시작했다. 거기에는 부처님이 중생들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 있으며 무슨 이유로 이런 설법을 했는지 그 이유를 쓴다. 그것을 인도말로는 ‘망갈라mangala’라고 하고 중국말로는 ‘귀경歸敬’이라고 했는데, 망갈라란 축복 혹은 인사의 의미가 있다. 어느 나라나 축복이나 행복을 기원하는 것이 인사가 아니던가. 버마(Burma/Myanmar) 사람들의 인삿말은 "밍글라와~" 바로 이 '축복', 망갈라에서 온 말이다. 귀경이란 공경한다는 뜻이다. 이는 기록문화에 있어서는 일종의 관례인 셈이다. 칭찬이란 고래만 춤추게 하는 것은 아니다.

경전에 많이 나오는 ‘선남자 선여인’은 주석문헌들에 ‘좋은 가문에 태어난 이들’이라고 되어있으나, 여기서는 진리를 공부하고 중생들과 함께 해탈하고자 마음을 낸 보살들을 의미한다. 우리가 아는 ‘선남선녀’는 자태가 고운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니 어감이 비슷해도 맥락은 좀 다르다. 그러니 수보리가 ‘선남자 선여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어보니 부처님은 ‘보살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그러니 시작되는 내용에서 알 수 있듯, ⟪금강경⟫은 ‘보살’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보살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대개 “내가 어떤 선행을 했다”고 내세우거나 자만심을 내지 않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대목에서 그런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확히 말해서는 하나의 선행이라는 관념적인 상을 만들고 그것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것이 좀 더 정확한 뜻이다. 그러므로 오해하기 쉽지만, 사실 불교집안에서는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보시하면 대중들이 그 보시자에 관한 정보를 분명 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어디에 사는 누가 대중들을 위해 무엇을 보시했습니다”

라고 공표하는 것이 전통이다. 대중들은 보시자가 마음을 내서 그 공양물이 내게 온 줄 알고 그를 위해 각자 마음으로 그 고마움에 대해 축원을 해 준다. 그것이 진짜배기 불교식 축원이다. 그러니 누가 베풀었는지 아무도 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소중한 재화나 노동력을 제공했으니 우리는 모두 그 고마움에 대한 감사를 해야하는 것이다.


다만 베푼이가 그 사실에 대해 오래도록 마음에 두고 집착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일 뿐이다. 베푸는 것에 있어서도 불교는 익명을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한 실명제다. 그러니 다음 대목에서 부처님은 당신 스스로

“나는 중생을 제도 했다”

고 말하고, 바로 다시

“나는 그런 적이 없다”

고 스스로 번복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선행과 마음에 남겨두는 방식은 대개의 상식과는 간발의 차이가 있다. 부처님은 당신이 지난 시간동안 온갖 종류의 중생으로 태어난 이들을 이끌어서 열반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그 자리에서 바로 딴소리를 하신다.

“한 중생도 내가 열반으로 이끈 적이 없다”

당신은 그렇게 살아왔지만, 오직 누군가를 해탈로 인도할 때만 해당된다. 그것이 중생을 인도하지 않고 있는 순간도 두고두고 여전히 유효하지는 않다고 스스로를 내려 놓으신다. 물론 당신은 앞으로도 할 수 있다면 하겠지만, 부처의 행위를 하는 순간들의 연속이기에 당신 은 부처이지 부처의 행위를 하지 않고 있을 때도 당신이 ‘부처라는 자아’를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당신이 부처의 행위를 함으로써 부처가되는 것이지 어떤 부처란 정해진 존재가 있어서 당신이 하는 모든 행위가 부처의 행위는 아니란 것이다. 마치 바람이 불기를 멈추는 순간 바람은 더이상 바람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불기 시작하는 순간 그는 다시 바람이라고 불린다. 그러니 ‘부처의 자아’와 ‘중생의 자아’가 따로 있다는 생각은 오해라는 부처님의 충고로부터 이 가르침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제는 과학이 발달해서 자세한 이 대목에선 크게 설명이 필요치는 않지만, 본문을 읽어보자면, 태어나는 종류에 따라 4생, 형태에 따라, 모습의 유/무, 생각의 유/무, 생각이 있는지 없는 지 조금 아리까리한 다섯까지 모든 종류에 따라 아홉가지를 ‘4생 9류’라고 표현하여 모든 ‘중생’의 카테고리를 구분한다.

‘중생衆生’이란 ‘살아있는 것들’ 정 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정이 있는-유정有情’이란 번역어도 있다. 이 표현의 원어가 산스끄리뜨 사뜨바sattva이다. 불교에서 모든 존재는 사뜨바이다. 심지어 보살도 사뜨바이다. 소리나는대로 음사하면 ‘살타薩陀’인데 이게 줄어서 보살의 ‘살’이다.그러니 보살도‘깨달음을 추구하는 중생’이란 뜻이다. 중생도 중생나름이다. 사실 사뜨바는 그냥 ‘사람’, ‘존재’, ‘~자’라고 번역해도 되니 ‘깨달음을 추구하는 중생’이 좀 어색하다면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라고 해도 좋은 번역이다.


누구나 선행은 행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심지어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 침조차도 “착하게 살라”는 단순한 가르침이니까. 하지만 늘 그랬듯이 부작용은 어김없이 나타난다. ‘착하게’란 ‘어떻게’일까. 밤에 일찍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선일까? 부지런하고 열심인 것은 선일까? 깨끗하고 분명한 것은 선일까?

A는 사람들에게 항상 친절하게 대한다. 부드럽고, 자애로우며, 앞장서고, 진취적이다. B는 항상 퉁명스럽다. 늘 뚱하고 표정없는 얼굴로 불편하게 사람들을 대한다. 대화를 해도 말을 툭툭 던진다. 어느날 어떤 집에 불이 났다. A는 발을 동둥 구르며 안에 사람들이 있다고 안타까워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B는 집안에 있는 사람을 위해 불난 집으로 뛰어들어가서 사람을 구해 나왔다. A, B 중 누가 좋은 사람일까?

두사람 모두 잘못을 한 것으로 보인다. A는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발만 동동거리는 이상의 용기를 보여주지 못했고, B는 평소 사람들의 마음을 늘 불편하게 했다. 하지만 A의 평소 모습이나 B의 용기있는 행동은 또한 선행일 것이다.

어떤 선행을 하는 그 순간의 그 사람은 선인이다. 그러니 99년을 착하게 살아도 1년을 악하게 산다면 그는 평생 좋은 사람으로 살아왔지만 악행을 하는 그 1년 동안 만큼은 분명한 ‘악인’이다. 즉, 선과 악은 있으되, 선인과 악인이란 존재는 없다.

사람은 가끔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와 선행을 내세우며 자신처럼 그것을 해내지 못하는 이들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부지런한 것은 게으른 것에 비해 좋다고 보인다. 그러면, 하루에 4시간을 자는 사람은 부지런하고, 그 이상을 자는 사람은 게을러서 나쁜 것인가? 깨끗하게 사는 것은 나쁠것이 없다. 즉 좋은 것이다. 하지만 자신만큼의 청결을 타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선도, 정의도 아니다. 깨끗한 사람이 깨끗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신이 불편해진다면 그 깨끗함이란 좋기만 한 가치일까.


그런데 먼저 ‘선’으로 정해둔 ‘깨끗함’이란 ‘상’ 때문에 깨끗함을 선호하는 이들은 깨끗하지 않은 이를 비난해도 되고, 그들이 그 더러움에 대해 비난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정의를 내세우면서 어쩌면 우리는 엄청난 폭력배짓을 일삼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은 늘 수퍼맨이라고 뿌듯해 하면서 사실은 깡패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타인 뿐 아니라 본인에게도 해당된다. 지금 우리는 자신에게 그런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들이대고 스스로를 압박하거나 괴롭히고 있지는 않은가?

바로 내 기준으로 정한 ‘깨끗함’이란 ‘선’이란 그 관념을 ⟪금강경⟫은 ‘상相’이란 말로 표현한다. 그리고5,149자로 이루어진 내용전개에서 대부분을 이‘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떻게 내려놓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금강경⟫이 가르쳐주는 철학은 오직 자신이 오래도록 옳다고 믿어왔던 것들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에게만 유효하다. ⟪금강경⟫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안타깝게도 별로 없다.


⟪금강경⟫의 4상이란 아-인-중생-수자 등 4개로 표현되었지만 실은 모든 것이 출발하는 그 하나의 상을 의미한다. ‘부지런한 사람’, ‘게으른 사람’, ‘좋은사람’, ‘나쁜사람’등 이렇게 그‘상相’을 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상’을 정하는 순간!

“보~살이 아니므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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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에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이 방콕 아시안 게임 태국전에에서 태국에게 역전 당해 졌던 그 경기장이 '라자 망갈라' 경기장이었는데 이게 태국 대표팀엔 축복의 경기장이었군요. 정말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이걸 매번 직접 타자를 치시는지요? 그 정성이 대단하십니다.

그렇군요. 신기합니다. 그럼 해석은 '왕에게 축복받은 곳', '왕에게 바쳐진 곳', '축복받은 왕의 장소'...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불식 편집부는 직업이 직업인지라 타이핑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미 발행된 지난 원고들이라 이미 있는 것들을 복붙하고 있습니다. 현재 진도가 15-16년에 쓰여진 것이라 내용에 약간의 수정과 교정, 내용추가는 하고 있습니다. 독자가 되어 주신데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gaeteul님 ^^ 항상 행복하십시오. with Maṅgalaṃ!

항상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sleepcat님 구독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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