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SIK / 이야기가 있는 불교 이미지 #011 "종교, 정의, 혹은 평화- 정해진, 마리아와 동자"

in #kr6 years ago

정해진, "마리아와 동자"

그림을 소개하고 싶지만, 저작권 문제를 대비하여 아래의 링크로 대신합니다.

http://www.beopbo.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83600


돌이켜보니 만 일년동안 불교이미지 연재를 멈추고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코너를 생각나게 한 것이 오늘 소개하는 ‘마리아와 동자’란 현대 작품이다. 이 그림은 조금 생소할 것이다. 이 작품은 ‘Annunciatio’, 성모희보聖母喜報 혹은 수태고지受胎告知라고 번역하는, 성모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장면이다.


고려불화를 관심 있게 본 사람이라면 금새 알 수도 있을 것이지만, 바로 고려불화 수월관음도의 구도를 그 그림에 중첩시키고 있다. 그리고 저 작은 크기로 표현된 동자. 즉 선재동자가 수월관음도와 같은 위치에서 성모 마리아를 바라본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관음보살일까. 아마도 그럴것이다. 동자는 그녀보다 비중이 작아서 작게 표현된 것도 아니고 ‘동자’, 어려서 꼭 작게 표현된 것도 아니다. 다만 불화를 그리는 이들이 깨달은 존재와 그렇지 않은 중생 의 크기를 나름 구분해서 표현한 것이다. 그걸 따라 그리다보니 이 작품에서도 동자는 작게 표현되었다. 고려불화에서 보면 선재동자는 관음보살의 발하나 크기 밖에 되질 않는다.


Screen Shot 2018-03-04 at 2.27.16 PM.png


고려불화 수월관음도의 선재동자 부분

이제 중생도 크게 표현할 수 있고, 불상앞에 마주 당당히 서서 예경을 해도 버릇없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도 예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들의 인식지평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한 프랑스 여성이 스리랑카의 한 절에서 불상에 키스를 하다가 징역형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헤드라인은 ‘충격’이라고 기사가 올라 왔다.


어떤 이들은 불상에 ‘감히’ 그런 짓을 했다는게 충격이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그렇다고 몇 달 짜리 징역형을 내리는 그런 대응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유를 들어봤어야 하지 않을까.

이 작품에 대해서도 가히 충격으로 느끼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관세음보살을 마리아로 바꾼 것이 충격일 수도 있을 것이고, 아마도 메신저 가브리엘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상대 적으로 작게 표현된 불화의 선재동자가 충격일 수도 있을 것 이다.
사실 이런 예가 처음은 아니다.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에 가면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스님이 성모 마리아상을 조성하는 이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조성한 관음보살을 만날 수 있다.


선재동자는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53명의 스승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서 하나씩 배움을 얻는다. 물론 그 스승들은 평등한 수준의 각자 가르침을 내리지만, 어쨌든 53명이 의미하는 것은 52층의 보살의 단계를 비유한 것이다. 한 때 이 화엄경의 구도기는 많은 이들을 설레게 했다. 한국에서도 화엄경 소설도 나오고 영화도 나왔는데, 영화 속 어린 선재가 피리를 부는 장면은 사실 ⟪화엄경⟫아니라 선종의⟪심우도⟫에서 차용된 것이다. 그리고 그 선재동자, 혹은 남순동자라고 불리는 이 아주 작은 형태로 표현된 구도자는 고려불화 수월관음도에서 백미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이웃종교로 가서 가브리엘의 역할을 대신한다. 물론 성모마리아는 우리에게 와서 관음보살의 역할을 해 주고 있다.

마치 문학적이고 수사적인 픽션에 지나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은 이런 상상이 불교, 혹은 종교의 본질에 더 가까운 의무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관음보살이란 존재는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지만, 사실은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역사적 관음보살들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의 본질은 스스로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는 몰라도 사람들에게는 행복한 삶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제시해주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자신들이 가진 목표를 강조하느라 정작 그것에 관심이 없는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가끔 우리는 잊어버린다. 왜 우리가 종교적인 삶을 살려는지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누군가가 만들어 둔 정해진 규칙과 요구사항을 잘 지키는 것에 따르는 것이 정말 좋기만 한 것인지 그걸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혹시 공존을 파괴하고 있지는 않은지.


어떤 특정한 종교를 믿는 사람들끼리 혹은 어떤 종교도 없는 사람과 어떤 특정한 종교에 대해 말하는게 실례가 되는 상황은 종교가함께 어울릴 수도 없고 편을 가르고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으로 만든 종교간의 갈등이다. 종교전쟁 을 말하는게 아니다. 아직도 많은 종교인들은 종교가 우리 삶의 필요한 하나의 요소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속세와 구분되는 어떤 특별하고 고귀한 존재라고 우기고, 그렇게 종교적 권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거기서 좀 더 특별 하고 고귀한 종교는 누구인가? 기독교? 개신교? 불교? 이슬람교? …

세상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다. 더럽고 깨끗하다는 분별심을 뛰어 넘을 수 있도록하는 것이 불교다. 그 간단하지만 우리가 쉽게 하지 못하는 것을 작가는 그림을 통해서 이루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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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분별심을 놓을수 있을지...참으로 궁금합니다.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가질 때 조금씩 갖듯, 내릴 때도 조금씩 내려놓으면 될겁니다.^^

길상사에 있는 그 조각상을 본 일이 있어요. 저도 만들어진 이야기를 듣고 법정스님이 참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을 했었지요.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

@thinky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알려고 해도 알 수 없기에 분별심을 터득하는 것은 즉,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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