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SIK / 명문감상 #010 "고통은 분별로부터" - 무의자 혜심, 아주 특별한 두 개의 시
... “외로움과 울분의 노래 孤憤歌”
......
或貧或富或貴賤 가난함과 부유함과 귀천이 서로 다르며
或 或醜緣何事 누구는 예쁘고 누구는 못난 것은 왜그런가
曾聞造物本無私 조물주는 원래 사심이 없다 하거늘
乃今知其虛語耳 지금 보니 그것은 틀린말이네
虎有爪兮不得翅 호랑이는 억센 발톱이 있어도 날개는 없고
牛有角兮不得齒 소는 뿔이 있어도 날카로운 이빨은 없네
蚊虻有何功 모기와 등에는 무슨 공로가 있어
旣翅而又觜 날개도 있고 뾰족한 주둥이까지 가졌나?
鶴脛長兮鳧脛短 학은 다리가 긴데 오리 다리는 짧고
鳥足二兮獸足四 새의 다리는 둘이지만 짐승 다리는 넷이지.
魚巧於水拙於陸 물고기가 물에서는 날아다녀도 뭍에서는 서툴고
獺能於陸又能水 수달은 뭍에서도 능하고 물에서도 능하지.
?龍蛇龜鶴數千年 용과 뱀과 거북과 학은 수천년을 살지만
蜉蝣朝生暮當死 하루살이는 아침에 태어나면 저녁에는 죽어야 하지.
俱生一世中 모두가 한 세상에 태어났는데
胡奈千般萬般異 왜 이렇게 수없이 서로 다른가?
......
“하늘과 땅을 대신해서 답변 代天地答”
萬別千差事 천차만별로 다른 것은
皆從妄想生 모두가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若離此分別 만약에 이런 분별을 내지 않는다면
何物不齊平 무엇인들 평등하지 않겠는가
무의자 혜심이 지은 조금은 장편의 시를 소개한다. 불식에서는 이미 그의 시를 한편 소개한 적이 있다. 그 때 혜심에 대한 이야기는 간략하게 기술해두었으니 참고 해주시면 될 것 같다.
고려 무신정권의 시대를 살았던 혜심스님은 시를 잘 짓기로 당대에도 이름이 날렸었는데, 이 시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던 기분을 오버랩해서 쓴 것인지 소개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외로움과 울분의... "란 제목에서도 벌써 비통한 감정이 살아난다. 너무 길어서 뒤를 생략하고 소개했지만 그 뒤에는 뭔가 답답함이 분명히 묻어난다. 그러면서도 동물과 벌레들을 등장시키며 글을 약간은 해학이랄까, 자연에 대한 관찰로 주제를 풀어간다.
가장 특이한 것은 스스로 그 글에 대한 답시를 스스로 짓고 있다는 점인데 이 답시가 바로 이어서 쓴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가진 지식을 통해 앞의 시의 조물주와, 천지에 질문하던 것을 이어받아서 그 제목을 "하늘을 대신해서 답하다"란 흥미로운 형태로 표현했다.
'인과'란 '인연업과因然業果'의 줄임이라고 볼 수 있겠다.어떤 원인을 만들어 놓으면 그게 하나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 그래서 불교는 인과법을 참 중시했지만
"전생에 업이 많아서... "
불교가전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일반적 인 상식으로 알고 있는 인과법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여전히 많다.
欲知前世因
今生受者是
欲知後世因
今生作者是.
전세에 어떤 일을 했는지 알고싶은가?
지금 받고 있는 그것이다.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지 알고 싶은가?
지금 짓고 있는 그것이다.
대장경에 나오는 글이기는 하지만 사실 정확히 누가 했는지 알 수 없는 이 글은 불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정의하는 명쾌한 구절로 오랫동안 애송되어 왔다. 미래의 나는 내가 지금 만들어 가고 있으니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또한 같은 방법으로 전생에도 그리했을 것이니 지금 어떤 고통을 받고 있다면 전생에 그리했겠지.
그러나 단순한 이 논리에는 몇 가지 문제가 존재한다. 불교가 인과법을 이야기 하는데는 나의 미래를 만들어가는데 촛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지 인과법 자체에 붓다는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 설마
"네가 싸질러 놓은 것이니 네가 기억은 못해도 네가 받는게 맞아”
라고 이야기해주는게 불교의 가르침 이라고? 부처님이 그렇게 말했다고? 헐!
그리고 불교는 스스로 그 기억하지도 못하는 그 옛날의 사건에 있어서 내 과오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불교는 권선징악의 종교가 아니다. 권선징악이란 시제와 상관없이
"'나쁜놈 벌주고 착한분 상주는’ 제도"
아닌가.거기에 굳이 불교가 더하고 보탤게 없다. 죄가 있는 자에게 상응하는 벌을 주거나 과거에 지은 악업에 대한 가책으로 고통받기를 권장하는 것은 불교의 방식이 아니다.
불교의 방식은 어떻게든, 다시는, 누구에게서도, 누구에게라도, 그런 일이 다시 반복적으로 일어나지 않게 하는데 노력을 기울인다. 그 일로 인하여 고통받는 사람이 없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받는 사람에는 당연히 '피고' 뿐 아니라 '원고'도 들어간다. 피고만 들어가는게 아니다. 그래서 야단치고 혼내는게 아니라 달래고 가르쳐서 이해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
"누가 죄없이 깨끗한 사람이 있다면 저 죄지은 사람에게 돌을 던져도 좋다”
이웃종교의 성인의 이 가르침, 불교의 철학과 분명 일치한다. 누군가가 잘못을 저지르면 사회와 법이 벌을 주는데 부처님까지 나서서
“네가 잘못했네, 혼나야겠지?”
이렇게 한다면 그건 웃긴 일이다. 부처님이 심심해서 견디지 못하는게 아니라면 지난 잘못으로 후회하고 고통받는 이에게 그 잘못을 상기시켜 줄 일이 없다.
잘못한 사람에 대해 비록 물리적으로 그의 사회적인 책임을 없애주지는 못하지만, 그가 더이상 죄책감으로 잠못드는 긴 밤을 고통속에서 보내지 않도록 도와주고, 그 잘못을 저지르게 된 조건들에 대해서 깨치도록 돕는 것이 이 동네의 방식이다. 어떤 잘못이 있어서 그 잘못만큼의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면 굳이 불교의 가르침이 왜 필요한가. 죄책감은 지은 잘못을 없애주지도 못하거니와 다시는 그 잘못을 범하지 못하는 방지책도 아니다. 그냥 자신이 자신에게 내리는 잘못에 대한 1:1의 벌일 뿐이다. 불교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에 대해서 일정한 무게를 지닌 실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是罪亦忘
죄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잘못써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니 잘못된] 마음이 사라지면 죄도 함께 사라진다.
이것이 불교에서 바라보는 잘못에 대한 전부이다. 그러니 '죄'를 갖고 사람을 판단하는 행위는 불교에서는 또 하나의 범죄인 차별이 된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이들에 대해 우리는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그렇게 태어났다고, 그게 불교의 인과법이라고 생각한다. 글쎄.
눈 두개의 세상에서 산다고 눈 하나인 사람이 순수하게 불편할까? 태어날 때 부터 하나의 눈으로 태어났는데 어떻게 불편하겠는가. 그 사람의 세계는 원래 눈 하나의 세계이다. 눈 하나인 사람이 불편한 것은 오직 하나, 눈 두개인 사람들의 시선일 뿐이다.
세상에서 선천적인 차별은 그가 전생에 지은 업 때문이 아니라, 현실에서 사람들이 그를 차별하는 구조적인 문제에 있다. 결국 모든 것이 개인의 문제이긴 하지만, 차별받는 개인의 ‘과거’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차별하는 개인들의 ‘현실’적인 문제에 있다고 이 시는 지적하고 있다.
생긴것, 가진것, 그리고 상대적 가치들을 수치화해서 쪼잔하게 수없이 많은 카스트를 만들고 차별하는 이 지독히도 '촌스럽고 찌질한 짓'을 우리는 얼마나 먼 미래에나 그만두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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