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SIK / 이야기가 있는 불교이미지 #003 "친구, 그리고 미륵보살"

in #kr7 years ago (edited)
이야기가 있는 불교이미지 [003] "친구, 그리고 미륵보살"

Screen Shot 2017-10-08 at 10.21.40 PM.png

마이뜨레야Maitreya란 중국에서 소리대로 번역할 때 미륵彌勒이라고 번역되었다. ‘자애慈愛’란 의미로 쓰여지고 있지만, 다른 형태는 미뜨라Mitra인데, ‘친구 友’를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웃 종교들에서 신도들이 서로를 지칭할 때 ‘형제’나 ‘자매’라고 부르는 것은 신의 자손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으로 보이는데, 불교는 불자佛子란 표현을 쓴다. 사실 이 표현도 종교적인 의미에서 부처님의 자손이라기 보다는 불법을 삶의 철학이나 가치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란 의미이다. 즉, 불자란 불교란 종교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불 교의 가르침이 좋아서 자신이 그 방식을 선택하고 그런 삶을 살려는 사람이다.


물론 현실적인 차원에서 불자의 의무란 일정하게 법회에 참여하고 불교 공부를 하고 삼보가 잘 운영될 수 있도록 일정한 지원을 하는 것이지만 절에 다니지 않더라도, 혹은 심지어 다른 종교에 귀의한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도 곧 불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럴 때 그 가치를 공유하고 그런 방식으로 사는 이들이 서로 ‘같은 길을 가는 사람 도반道伴, 혹은 ‘진리의 세계에서 함께 하는 친구, 법우法友’란 표현을 쓴다. 우리나라에선 주로 스님들끼리 도반이란 말을 쓰고 재가자들끼리, 혹은 나이어린 불자들에게 법우란 말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사실 모두가 함께 공유해도 도반이나 법우란 말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특히 우리나라 문화에서 '보살'이란 말의 어감이 이상해서 꺼려하는 이들끼리는 법우란 말은 좋은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에서 법우라는 호칭의 전통은 별로 오래되지는 않은 것 같다. 아주 오래 전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에서 스님들은 대체로 불자들을 ‘시주施主’라고 불렀다. 원래 초기에 스님들은 일체 일을 하지 않고 법문을 듣거나 들은 법문에 대한 토론, 암기, 명상수행,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노동, 즉 옷을 꿰멘다던지 - 물론 새실이나 천으로 만든 옷이 아니다 주로 버려진 천이나 시신의 옷을 벗겨오는 등 - 집을 짓는다던지, 그야 말로 그런 삶의 연속이었다. ‘불살생’과 ‘무소유’란 불교 뿐 아니라 당시 인도의 매우 일반적인 출가자 집단 - 불교 뿐 아니라 - 의 관행이었기 때문에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키우거나 하는 과정에서 많은 생명들을 상하게 하거나 가축을 소유하는 것이 금기시 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물론 이웃 종교였던 자이나Jaina의 보통 신도들은 장사나 유통업을 통해 삶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의 경우이다. 그렇게 생산활동이 전혀 없다보니 출가자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재가자의 몫이었고 출가자는 그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고 재가자는 물질적으로 출가자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분업이 잘 이루어졌다. 물론 그것도 오래되고 일반적인 관습이었을 당시의 이야기다. 오늘날 동남아시아도 그런 관습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탁발이 가능한 것이다.


중국에 와서 이런 전통은 현실을 고려하여 바뀌었는데, 사실 그런 변화를 체감하지 못했던 상당한 불교 종파들은 이를 핑계로 중국 국가 정책을 통해 엄청난 손실을 경험해야 했다. 종교인 과세 때문에 우리나라가 시끌벅적한 것도 사실 그것과 유사한 상황일 수 있겠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에 비해서 늦은 감은 있지만 문화적으로 가장 인도불교스러우면서 동시에 시공간적으로 우리에겐 이질적이었던 ‘탁발’이란 제도가 20 여년 전 종단의 정책에 의해 공식적으로 사라짐으로 해서 다른 국면을 맞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사실 여전히 종교가 직접 1차적 생산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불자들의 보시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시주란 ‘보시를 하는 사람’이란 의미인데, 그러니까, ‘시주한다’란 말은 좀 어색한 표현, 사실은 틀린 표현이다. 시주님이란 말은 조선시대에는 아주 늦게까지 쓰이다가 지금은 주로 여성들에겐 보살님, 남성들에겐 ‘거사居士’라고 부르면서 호칭이 점차 정리되었다. 한 때 남성들에겐 ‘처사處士’라고도 많이 불렀는데 이는 유가식 표현이다. 물론 기본적인 의미는 그렇게 다르지 않다. 거사란 집에 머문다는 뜻으로 재가자를 의미한다. 깨달음의 경지에서는 출가자나 재가자의 신분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차원에서 유명한 거사들이 역사속에 많이 등장한다. 물론 그 중에는 실제 인물도 가상의 인물도 있지만 잘 알려진 ⟪유마경⟫ 이란 경전에서 부처님의 직제자들이 유마거사Vimalakirti에게 꼼짝도 못하는 풍경이 연출되는 모습들에서 거사란 점차 단순한 재가자가 아니라, 비록 출가하지는 않았지만 불법을 공부하고 깨달음을 얻는데 있어서는 매우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유가식 표현인 ‘처사’란 출세와 은둔의 양갈래에서 은둔을 선택한 선비들을 가리킨 말이다. 출세란 말도 오늘날에야 뭔가 성공을 의미하지만 본디 입신양명, 세상에 나아가서 뜻을 펴고 남자로서 배우고 닦았던 것을 세상에 선보이고 벼슬도 하여 세상을 유교적인 가르침에 기반한 올바른 세상으로 만들어보고자 하는 것이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취직인 동시에 출마인 셈이다. 사실 '같은게' 아니라 ‘출마出馬’란 말 자체가 사실 인격을 갖추고 준비가 다 된 이가 (말을타고) 벼슬에 나간다는 의미이니, 세상에 나간다는 ‘출세出世’와 같은 말로 그때의 말을 지금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스님이 되는 ‘출가出家’도 뭔가 방향은 반댓길인 것 같은데 나간다는 차원에서는 다를게 없 지 않나 싶다. 하긴 따님이 시집가실 때도 ‘출가’라고 표현하고, 순서만 뒤집어 보면 집구석이 마음에 안들어서 나가시는 것도 ‘가출家出’이니, 이래저래 때가 되면 있던 자리를 박차고 어디로든 가야 하는건 사람의 운명인가보다.


그러나 아무리 나서봐야 세상은 그렇게 바뀌지 않고 출세하면 결국 부패하는 모습을 많이들 보이니 실력이 있고 의지가 있어도 다 내려놓고 학문이나 계속하면서 후학들이나 기르고 사는 좀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은둔선비들, 그들을 아마 처사라고 했을 것이다. 불교와 유교가 현실적으로 이론적으 로 대치되면서도 또 당시의 지식인 스님들과 유학자들은 토론하고 논쟁하며 어울렸고 아마도 그 때부터 스님들이 남성들을 처사라고 불렀던 것 같다. 뜻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오늘날은 점점 거사란 불교식 용어로 바뀌고 있지만 오랜 관습이라 처사와 거사는 혼용해서 부르기도 한다.


여성들에게만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도 뭔가 거기서 약간 무속적인 느낌이 들어서 이상하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고 심지어 성차별적 느낌을 받는 이들도 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약간의 오해가 있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의 샤먼인 무속에서 이 '보살'이란 말을 따라하는 바람에 황당하게도 장군보살, 처녀보살, 동자보살 등 희안한 이름의 보살이 등장했지만 사실은 그와 전혀 관련 없이 깨달음을 이미 이루었거나 추구하지만 결코 나머지의 사람들을 두고 깨달음의 세계 - 그런 세계가 따로 있다면 - 로 먼저 가지는 않겠노라 약속한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다. 비록 중국사람들이 중간에 한 글자씩 빼버리고 부르는 바람 에 인도 사람들이 들어도 이해못할 지경이 되어 버리긴 했지만.


깨달음을 의미하는 ‘보리bodhi’와 깨달은 사람이란 의미로 ‘살타satta’란 말을 중국 사람들이 뜻으로 번역할 때는 ‘대사大士’라고 번역했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매우 위대한 사람을 의미힌다.즉 거사란 말과 전혀 다른 뜻이 아니다. 유교전통에서 사士란 선비를 의미하는 것 같지만 사실 사란 그냥 ‘남자’란 뜻이고 그 의미는 ‘사람’이다. 말로는 사람의 기본값을 남성으로 잡은 언어적 방식이고 그렇게 써 온 일반적인 관례이니 그건 어쩔 수가 없다. 반대로 오늘날 보살이 여성으로 느껴지는 것은 친근감을 위하여 여성의 이미지로 굳혀 왔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렇게 현재는 불상 중에서도 보살상이 여성상으로 새겨지고 또 여성에게만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거사와 ‘보살大士’은 사실상 같은 의미이며 불자라면 출가자든 재가자든 모두 보살계를 받아야 하니까 사실 불교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은 출가자든 재가자든, 남녀노소 누구든 서로 한 길을 가는 보살이고, 거사이며, 도반이고, 법우다.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다시 친구로 돌아가자. 불교에서 친구란 말을 가장 먼저 쓴 것이 미륵보살이다. 원래 미륵이란 말의 어원을 두고 예전엔 ‘용’이니 ‘돌’이니 ‘미래’의 의미라는 등 한글과 한자를 두고 이런저런 논쟁도 많이 있었지만, 원래 미륵은 산스끄리뜨어 마이뜨레야Mitreya의 음사어이다. 그리고 마이뜨레야의 원어는 산스끄리뜨어 미뜨라mitra, 바로 ‘친구’란 의미이다. 이 용어는 빨리어에서는 메따metta라고 쓴다. 미뜨라를 마이뜨레야, 혹은 메따라고 쓰면 그 뜻은 ‘자애慈愛’라는 의미로 확장된다. 불교의 두 핵심이 지혜와 자비이니까, 사실 메따는 ‘자慈’만을 의미한다. ‘비悲’는 ‘까루나karuna’란 다른 표현을 쓰는데 불교에 서는 대체로 ‘자비’와 같이 하나의 단어처럼 써왔다.


대개 관세음보살을 자비보살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관세음보살은 그 중 ‘비悲’보살이다. 그래서 관세음보 살의 다른 이름은 대비大悲보살이다. 그러면 자보살은 누구일까. 그렇다. 바로 미륵보살이 ‘자慈’보살이다. 그래서 중국사람들은 미륵을 해석할 때 ‘자씨慈氏’라고 불렀다. 그 보살의 컨셉을 이름의 성처럼 썼던 것은 중국적인 방식인데 재미있는 표현이다. 석가모니Sakyamuni란 사꺄족의 성자란 의미지만 중국 사람들은 간혹 ‘석씨釋氏’나 혹은 붓다를 한문으로 표기한 ‘불타佛陀’를 보고 ‘불씨佛氏’라고 부른 걸 보면 자씨란 표현도 특이할 건 없다.


젋은 세대들간에, 혹은 젋은 세대의 불자들을 최근 들어서 스님들은 법우라고 부른다. 어떤 젋은 불자들은 보살이라고 부르면 나이든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 싫고 촌스럽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한편 법우란 호칭이 아직 까지는 어색한 이들도 있다. 또한 법우란 명칭은 친구란 뜻 때문에 상호적이 라고 생각하여 스님이 법우라고 부르는 순간 상대에게 스님도 친구가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복잡하고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불교에서 호칭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거사나, 보살이나 법우는 다 이렇게 나름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좋은 의미이다. 다만, 그 뜻이 아무리 좋아도 명색이 이름인데, 어감이 좋지 않으면 되겠는가. 이렇게 '친구'란 표현은 불교에서 오랫동안 써 왔던 표현이니, 보살이란 어감이 마음에 걸리거나 불편한 이들께서는 서로를 법우法友라고 불러보는 것은 또 어떨지. 미륵彌勒부처님을 떠 올리면서.

Screen Shot 2017-09-21 at 9.07.55 AM.png


source_불식 15/03(003호)
Sort:  

Congratulations @bulsik! You have completed some achievement on Steemit and have been rewarded with new badge(s) :

Award for the number of posts published
Award for the number of upvotes
Award for the number of comments received

Click on any badge to view your own Board of Honor on SteemitBoard.
For more information about SteemitBoard, click here

If you no longer want to receive notifications, reply to this comment with the word STOP

By upvoting this notification, you can help all Steemit users. Learn how here!

Coin Marketplace

STEEM 0.16
TRX 0.16
JST 0.030
BTC 58630.93
ETH 2517.93
USDT 1.00
SBD 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