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허(2016> - 이럴거면 리메이크 하지 말지..(스포가득)
건질 게 아예 없지는 않다. 전작의 명장면인 전차대결은 이번 버전에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영화는 전차 경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긴박함과 쾌감을 잘 살려냈으며, 해전에서 보여주는 충각씬은 벤허의 눈을 통해 관찰되면서 충돌의 순간을 더 생생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캐릭터들은 너무 따로 놀고, 그러다보니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와닿지 않는다. 캐릭터 하나하나가 매력적이면 모르겠는데, 벤허는 멍청하고 메살라는 특색이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영화가 ‘위대한 걸작’이라는 거대한 벽에 가려져있다는 거다. 가벼운 팝콘영화로 본다면 <벤허(2016)>는 재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벤허(1959)>의 기억이 짙게 남아있을수록 이 영화의 평가는 깊게 추락한다. 나 역시 그랬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영화를 이야기하는데 원작의 광채를 배제할 수가 없다.
<벤허(1959)>는 거대한 작품이다. 러닝 타임은 3시간 40분인데 버릴 분량이 별로 없다. 유복한 젊은 시절부터 몰락, 노예선 생활, 로마 귀족의 양자가 되고 메살라와 복수를 하고 나병에 걸린 어머니와 여동생을 찾고 예수를 만나 구원을 받는 결말 등 많은 스토리가 깔끔하게 연결되어있으며, 스토리를 뒷받침하는 비주얼도 준수하다. 그러나 이번 <벤허(2016)>의 분량은 2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그 덕에 많은 장면이 생략되었다. 로마 귀족 에피소드는 통째로 날라갔고, 예수의 죽음도 상당히 맥없이 다루어진다.
짜임새 있던 흐름에 구멍이 났는데, 감독은 이를 제대로 메우지 못했다. 차별점을 두기 위해 넣은 장치들은 매력이 없거나 의구심을 자아낸다. 전개는 우연과 행운에 기대어 졸속으로 이뤄지고 캐릭터 간의 관계 설명은 허술하다. 여기에 새로운 소재들마저 제대로 녹아들지를 못하니 중구난방이 되어버렸다. 속도를 내면 뭐하나 내용물이 다 괴발개발인데.
영화는 1959년작과 달리 ‘복수’가 아닌 ‘용서’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 면에서 메살라에게 많은 비중을 기울인 것은 나쁘지 않았다. 죽을 때는 폭풍간지였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단순한 악역이던 메살라는 여러 설정을 통해 전작보다 입체적인 캐릭터가 되었다. 그의 위치를 1959년작보다 불안정하게 설정하고, 사건의 세부 내용을 바꿈으로써 그의 악행에 나름의 정당성을 부여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벤허가 너무 찌질해졌다. ‘우연한 사고’를 고의로 범죄로 몰고 가 몰락시킨 1959년작에 비해, ‘반란군임을 알면서도 데리고 있다가 하필 그놈이 저격을 시도해서’ 몰락하게 되는 흐름은 벤허를 덜 억울하게 만든다. 아리우스 에피소드가 삭제되니 이후의 내용도 얼개가 허술해졌다. 귀족의 권위를 바탕으로 메살라를 압박하던 카리스마는 사라졌고, 이를 대신하는 것은 복수에 눈이 먼 벤허의 무모한 행동 뿐이다. 아무런 힘도 없는 도망노예가 믿을구석도 없이 로마군과 만난다? 그것도 원수랑? 그 결과 10명의 애꿎은 사람들이 또 죽어나갔다. 무고한 사람들의 피해까지 감수하며 이루어낸 복수도 ‘우연히 만난 아랍부자’의 지원을 통해 이루어지니 뭔가 모양이 빠진다.
용서의 매개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 에피소드도 전작과 비교하면 아쉬움이 많다. 전작은 예수의 얼굴과 목소리를 들려주는 대신 그의 행동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으로 그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드러낸다. 벤허를 다그치던 로마 장군이 그를 바라보고 경의와 당황의 표정을 지는 씬 등 씬 하나하나의 존재감이 엄청나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가 20분 남짓만 ‘뒷모습으로’ 출연했음에도 예수가 대단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동시에 예수 에피소드는 영화 스토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있다. 벤허는 예수 덕에 아랍족장을 만나 복수를 이루고, 복수 덕에(?) 어머니와 여동생의 행방을 알고, 그들을 치료하려는 여로에서 예수를 만나 ‘용서’의 가치를 깨닫는다. 예수 에피소드는 적은 분량임에도 스토리에 완벽하게 녹아들어가 작품의 주제를 명료하게 전달한다.
<벤허(2016)>의 예수는 신비로움이 없다. 배우가 연기력으로라도 압도했으면 모르겠으련만 그런 것도 없다. <벤허(2016)>은 짧은 러닝타임 안에 스토리를 우겨넣다보니(그리고 새로운 이야기도 전개하다보니) 전차경주 관련 에피소드 정도를 빼면 기존 에피소드들이 꽤나 축약된 편이다. 그 축약된 스토리에 예수를 일반인1처럼 묘사해버리니 벤허가 예수에게 감화되는 과정도 공감이 안간다. 그 감화로 인해 이어지는 메살라와의 화해도 와장창.. 아니 벤허는 그렇다쳐도 메살라는 왜 그리 태세전환이 빠른거지..
감독은 영화에 관해 ‘1959년 작의 리메이크가 아니라, 원작의 새로운 영화화’라고 밝힌 바 있다. 이를 입증하듯 <벤허(2016)>는 이전 작품과 다른 흐름과 결말을 갖고 있다. 그러나 팀 버튼의 <배트맨>이 이후 모든 배트맨 시리즈의 비교대상이 되었듯, 높은 완성도의 작품은 동일 원작을 다루는 입장서는 반드시 넘어야할 산이 되어버린다. <벤허(2016)>가 이전에 다룬 적 없는 스토리를 다뤘더라면, 우리는 부실한 스토리에 실망하더라도 박력넘치는 해전과 전차씬으로 눈감아줄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역대급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 존재해버리니 영화가 눈에 안들어온다. 시나리오는 너무나 허술하고, 액션도 크게 발전된 것이 없다. 이러다보니 대체 왜 리메이크를 한건가 싶기도 하다. 이럴거면 리메이크를 하지 말지.. 고퀄리티의 연출이나 완벽한 재해석이 아니었다면 <벤허>는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p.s 1) 예수로 분한 로드리고 산토로는 <300>에서 마성의 게이 매력을 풍겼던 크세르크세스를 연기했었다. 나중에 알고 가장 충격받았던 사실..
p.s 2) 메살라 역의 토비 켑벨은 작품 운이 너무 없다. <벤허(2016)> 이전에도 고무닦이 <판타스틱4>에서 닥터 둠으로 나왔다.
"그분의 목소리가 내게서 칼을 거두어가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