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영화] 날씨의 아이 (天気の子, Weathering With You)

in #kr5 years ago (edited)

* 작품의 줄거리와 결말을 포함하고 있는 리뷰입니다. 아직 작품을 보지 않으신 분 중에 사전에 내용을 알기를 원하지 않는 분은 뒤로가기 해주세요.



 좋은 작품은 반복해서 보게 된다. 어느새 3회차. 아마 이 리뷰 후에도 몇 번을 더 보게 될 것 같다.


 먼저 이 말부터 하고 싶다. 만약 이 작품을 보기 전에 경험한 신카이마코토(新海誠) 감독의 작품이 '너의 이름은(君の名は)' 뿐이라면 이 작품은 진입장벽이 좀 있어서 한 번에 소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반면 신카이마코토의 올드팬들에게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이고, 또 신카이마코토 감독의 올드팬이 아닐지라도 만약 반복해서 본다면 계속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아무튼 이 영화를 보고 리뷰를 읽으실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얘기는, 설사 아니메 덕후라도 한 번에 소화하기에는 만만한 작품이 아니니 작품을 보면서 "이게 뭐지?"하는 느낌을 받았다면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워낙 볼거리가 충만해서 그런 거 무시하고도 볼만하다.)

 국내에서 신카이마코토라는 감독의 이름을 널리 알린 작품은 '너의 이름은'이지만, 내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너의 이름은'은 신카이마코토의 전작들과 비교해서 조금은 결이 다른 작품이다. 좀 더 스트레이트(straight)하다고 할까? 그 차이점을 명확히 딱 집어내기 애매한데, '너의 이름은'은 극이 시작부터 결말까지 군더더기 없이 주욱- 달려나가는 느낌이다. 그야말로 우리나라 관객이 몰입해서 보기에는 딱 좋은 방식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아니 비단 우리나라 관객 뿐만 아니라 이 같은 전개방식은 그동안 일본 아니메에서 답답함을 느꼈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사이다처럼 느낄만한 방식이다. 일본 내는 물론 전세계에서 흥행에 성공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반면  전작들이 주었던 방식의 여운은 약했다. 

 '날씨의 아이(天気の子)'는 전작의 빅히트에 따른 영향이었는지 좀 더 대중성을 강화하는 형태로 스타일을 바꿨다. 문제는 그게 일본 아니메의 클리셰(Cliché)를 차용해오는 방식이었다는 것. 이러한 것들을 혹시 처음 접했다면 그러한 장면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할 지 몰라서 당황스러웠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도 신카이마코토는 감독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이라 일본 TV시리즈가 하듯이 무분별하게 넣지는 않았다. 각 캐릭터의 성격이나 이미지를 관객에 명확하게 부각시키는 차원에서 적절히 사용하였는데, 그렇다하더라도 이를 처음 보거나 이러한 연출이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부자연스럽거나 극 몰입에 방해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반면 아니메 덕후들처럼, 그러한 클리셰들에 이미 익숙하고 그 연출을 좋아하는-이러한 클리셰들은 그 자체로 재밌고 사람들이 좋아하여 많은 아니메에서 때로는 맥락도 없이 막 쓰고 있다- 사람들로서는 이러한 요소들이 작품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양념이었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사람들 대부분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국내 막장드라마 클리셰에 익숙하듯이 이게 익숙할 것이기 때문에 이를 재밌게 즐기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그렇지 않기 때문에 아마 많은 사람들이 "잘 만든 것 같기는 한데, 뭔가 좀 예전만 못하다"라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면 이것이 하나로 작용했을 것이라 생각 한다. 



"일본적이네"


 '날씨의 아이'를 1회차 봤을 때, 이 생각부터 들었다. 그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일본 아니메의 클리셰가 들어갔기 때문만은 아니다. 일본 만화의 단점을 지적할 때, "극 바깥에서는 '지나치게 친절한 설명'을 하면서 극 안에서는 캐릭터들이 혼네(本音)의 파악이 어려운 은유와 돌려돌려 말하기가 심해서 어떠한 행동을 할 때 그 개연성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 작품도 여기에 해당한다. 일본 만화책을 보면 지나치게 친절한 설명들을 앞이나 중간중간에 볼 수 있는데. '날씨의 아이'에서는 삽입곡이 그 역할을 한다. 



何もない僕たちに なぜ夢を見させたか
아무 것도 없는 우리들에게 왜 꿈을 꾸게 했을까?

終わりある人生に なぜ希望を持たせたか
끝이 있는 인생에 왜 희망을 갖게 했을까?

なぜこの手をすり抜ける ものばかり与えたか
왜 이 손을 빠져나가는 것만 주었는지

それでもなおしがみつく 僕らは醜いかい
그런데도 여전히 매달리는 우리들은 추한 것일까?

それとも、きれいかい
아니면, 아름다울까?

答えてよ
대답해줘

愛の歌も 歌われ尽くした 数多の映画で 語られ尽くした
사랑의 노래도 다 불렀어. 수많은 영화에서 다 이야기 되었어.

そんな荒野に 生まれ落ちた僕、君 それでも
그런 황야에서 태어나 버린 나, 너 그래도

愛にできることはまだあるよ
사랑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있어

僕にできることはまだある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있어


 이처럼 삽입곡들의 가사는 지나치게 친절하다.(은유 따위는 1도 없다. 이후 소개할 엔딩곡도 마찬가지.) 그 삽입곡이 나오는 시점 또한 아주 정확하다. 마치 극을 잠시 멈추고 설명꾼이 나와서 설명을 해주는 느낌이다. 문제는 이게 오히려 감동을 감소시킨다는 점이다. 차라리 삽입곡이 나오는 시점에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아름다움 영상을 깔고 적절한 BGM을 넣고, 설사 가사가 있는 노래를 틀더라도 가사를 주욱 나열하는게 아니라 은유가 섞인 단어나 문장 정도만 나왔으면 좋지 않았을까? 그러면 각 장면마다 관객은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음미하면서 관객이 해석하는 수만큼 작품의 세계도 확대되어 나갔을 것이다. 특히나 이 부분은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관객에게는 마이너스였다. 일본어의 음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장면들이 마치 뮤치컬 영화에서 극중 인물들이 노래하는 장면처럼 감동을 증폭시키는 장치로써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로지 가사를 해석-원곡의 음율과 상관없는-한 자막만을 따라 읽어야 하는 이들로서는 정말 그냥 설명일뿐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의 BGM이 나오는 상태에서 설명을 읽는 체험을 하게 된다. 똑같은 작품을 놓고 일본어 원어민과는 이 부분에서 전혀 다른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몰입감이 일본 사람들에 비해 반감될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비일본어 사용자가 이러한 부분까지 온전히 느끼는 방법은 사전에 삽입곡들을 반복 청취하여 그 음율과 의미를 충분히 음미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 후에 보는 것 뿐이다. 물론 덕후들은 기꺼이 그러한 수고를 하고 있겠지만-아니 그 전에 많은 덕후들이 이 정도 히어링은 된다- 대부분의 일반 관객은 그렇지 않을테니 이 작품이 일반 대중이 몰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날씨의 아이'는 '너의 이름은'에 비해서는 덜 직설적이다. 그러하다보니 처음 봤을 때는 대사와 극중 인물들의 행동만으로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솔직히 나 역시 처음 봤을 때는 갑자기 클라이막스로 가다가 예상치 못한 결말로 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2회차에는  주인공 '모리시마 호다카(森嶋 帆高, 이하 호다카)'의 모든 행동이 이해가 되고, 3회차에는 전체 스토리가 매우 탄탄하고 잘 짜여져 있음을 발견하고는 감탄하게 되었다. 

 '날씨의 아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화면에 나타나는 모든 것을 파악해야 한다. 내가 일본 여행 갈 때마다 감동 받는 부분 중에 하나가 디테일(detail)인데 정말 사소한 것들까지 하나하나 고려가 되어 있는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모든 요소가 소소한 것까지 섬세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유 없이 들어간 요소는 없다. 마치 빈틈이 전혀 없는 시계 장치의 내부처럼 말이다. 처음 볼 때는 그러한 것들을 놓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뭔가 흐름이 매끄럽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다. 특히나 이 작품은 주인공의 배경에 대해 전혀 설명 없이 시작하기 때문에,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은 주인공이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사실 감독은 이미 설명을 다해놓았다. 단지 극중 대사나 나레이션이 없을 뿐이다. 다른 요소들도 대부분 이런 식이다. 

 한 예로, 주인공 호다카의 배경에 대한 설명은 "볼과 코에 붙어있는 반창고"와 도코에 오면서 가지고 온 "호밀밭의 파수꾼" 책이다. 이 두 가지면 주인공 배경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다. 근데 영화를 처음 볼 때는 이를 아무 생각없이 지나치기 때문에 호다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근데 잘 생각해보라. 배급사가 책의 제목을 친절하게 한글로 자막 처리해준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다른 부분들도 마찬가지) 

 호밀밭의 파수꾼의 스토리를 아주 간략하게 정리하면 "기숙고등학교에서 쫓겨난 주인공이 뉴욕을 방황하던 3일간의 이야기"이다. 거기서 주인공은 어른들의 세계. 위선과 죄악이 판치는 세계를 경험하고 환멸을 느끼다가 여동생에게 돌아간다. '날씨의 아이' 역시 시골에서 살던 주인공이 도쿄로 와서 성(sex)산업과 온갖 불법적인 행위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거리에는 비가 내린다. 비는 극중에서 다양한 곳에 사용되고 각각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데 여기서는 주인공의 우울한 감정, 눈물을 대신 보여준다. 또 하나의 키워드 "반창고". 이것은 호다카가 원래 살던 곳에서 폭력에 시달려왔음을 보여준다. 그 반창고는 도쿄에서 생활하면서 비로소 벗겨진다. 폭력이 일상화되었던 그의 고향과는 달리 도쿄에서는 어찌되었든 매일 맞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나중에 인터넷에서 설정을 찾아보니 아버지가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후 설명되어지지만 그의 고향은 섬이다. 폐쇄적인 공간. 폐쇄적인데 폭력은 일상화되어 있던 공간. 호다카는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치 그가 읽었던 책의 주인공처럼 도망치듯이 도쿄로 온 것이다. 그런데 섬에서만 살았으니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소년은 처음 접하는 번화한 도시에서 여러가지 문화 충격을 접하게 된다. 전반부는 이를 아니메 클리셰들을 적절히 양념처럼 넣어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유쾌하게 보여준다. 

 또한 잘 보면, 이 영화는 호다카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무슨 얘기냐면 이 영화의 전개방식은 이미 모든 것을 경험한-도시의 대부분이 물 속에 잠긴 세계를 경험한- 주인공이 회상하듯이 지나간 얘기를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사건은 호다카의 주관점인 관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호다카가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 호다카가 경험한 이야기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영화의 장면 순서, 구성을 바라보면 훨씬 더 전체 맥락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또 하나. 호다카가 히나에게 가지는 감정은 단순히 연인간의 사랑. 연정 그 이상이다. '사랑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있을까 (愛にできることがまだあるかい)'라는 삽입곡의 내용처럼 이미 젊은 세대에게 사랑은 사치이거나 영화나 노래 속에서 많이 불리어져 흔해진 것이다. 호다카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서 도코에 온 것이 아니다. 호다카가 처음 발견한 것은 빛이었다. 여주인공 '아마노 히나(天野 陽菜, 이하 히나)'가 처음 발견한 것도 빛이었다. 우울한 비가 계속 내리는 환경에서 우연히 발견한 빛의 공간. 히나는 그 공간을 찾아가 '하늘과 사람을 연결하는 무녀'가 되고, 호다카는 섬에서 우연히 그 빛을 보고 이를 찾아 도쿄에 와서 그 빛의 정체가 히나임을 알게 된다. 히나는 그에게 살아 숨쉬는 빛의 존재였다. 이러한 구성은 전작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雲のむこう、約束の場所)'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스토리는 다르지만 '날씨의 아이'를 보고 이 작품을 떠올린 신카이마코토의 팬들이 많았다.)

 호다카는 별 생각 없이 히나가 가진 능력으로 돈을 벌자고 생각한다. 히나는 그동안 능력이 있어도 사용을 망설였지만 호다카의 권유에 이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닫게 된다. 하지만 능력을 반복해서 사용하면 언젠가는 투명해져서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동시에 두려워진다. 그게 히나의 "같지도않지도않기도..." 하고 반복되는 부정의 부정의 대사 속에 담겨있는 혼네다. 그러한 히나의 혼네를 전혀 모르는 호다카는 히나가 사라져버린 후에야 그 모든 상황을 깨닫게 된다. 애초에 자기가 그런 비즈니스를 벌이지 않았으면 히나가 사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빛을 찾아 도쿄에 와서 그것을 발견하고 함께 하게 되었는데 바보같이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호다카는 그것을 되찾아오기 위해 모든 것을 건다. 애초에 그게 도쿄에 온 이유의 전부였으니까.

 그리고 도쿄는 그 결과로 물에 잠긴다. 

 호다카는 당연히 그 결과에 대해 책임감을 느낀다. 죄의식을 느낀다. 이는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된다"라는 것이 강조되는 사회에 사는 일본인으로서 크게 부담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런데 도쿄에 온 그에게 사실상 아버지와 같은 역할. 어른 노릇을 했던 '스가 케이스케(須賀 圭介, 이하 스가)'는 "네 책임 아니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히나와 다시 만나. 나오는 엔딩 곡은 '大丈夫(괜찮아)'다.



世界が君の小さな肩に 乗っているのが
세상이 너의 작은 어깨에 타고 있는 것이

僕にだけは見えて 泣き出しそうでいると
나에게만 보여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으면

「大丈夫?」ってさぁ 君が気付いてさ 聞くから
「괜찮아?」라고 네가 눈치 채고 물어봐줘서

「大丈夫だよ」って 僕は慌てて言うけど
「괜찮아」라고 당황해서 말해보지만

なんでそんなことを 言うんだよ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崩れそうなのは 君なのに
너야말로 무너질 것 같은데.


 나는 이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핵심 주제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있었던 신카이마코토 감독 방한에 맞춰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에서 한 분이 "이 작품이 청년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했는데, 도쿄가 물에 잠기고 우울한 결말인데 어떠한 부분이 위로가 되는 것입니까?"라고 질문을 했었다. 이에 감독의 답변은 "청년 개인이 어떠한 선택을 하든 괜찮다는, 전체가 아닌 개인을 우선시하는 부분이다"라는 답변을 했었다. (따로 메모를 하지 않았다보니 질문의 전체 내용과 답변의 상세내용은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맥락은 이러한 것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극중에 호다카는 히나에게 "스스로를 위해 기도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그 후, 히나의 기도 내용이 바뀌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 대사는 특히나 일본 사회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대사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개인주의가 강한 나라이다.(실제의 일본 분들과 교류가 없는 분들은 이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일본 사회가 전체주의로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특히 일본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나는 지금 일본에 살고 있지는 않으니 현재의 분위기까지는 모르겠지만, 자연재해를 포함해서 여러가지 일본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늘어날수록 이러한 목소리가 더욱 커질 것임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목소리 중의 단적인 예로 아베 정권이 추진하는 헌번개정이 있다. 그 배경과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메이지 유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렇게 돌아가서 '대동아공영권'을 이뤘던 찬란한 과거-그들의 입장에서 봤을때-를 되살리자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주변 국가들 입장에서 보면 끔찍하고 황당한 얘기지만, 문제는 저들은 매우 진지하고 실제로 추진하려고 한다는 점에 있다. (그 의지는 몇 십년째 꺽이지 않고 있다.) 다행히도 일본은 그 시절을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 그 시절 일본인들은 원치 않는 전쟁에 강제로 끌려가 전쟁범죄를 저질러야 했다. 그러한 불행한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많은 이들이 갖고 있고 그 연장선에서 국가주의를 기본적으로 경계한다. 

 하지만 일본 시민들이 모두 온전한 개인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본의 개인주의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형성된 측면이 더 크다. 공동체가 위협 받을 때, 일본은 개인이 희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 한 명 제물로 바쳐서 미쳐버린 날씨를 잠재울 수 있다면 모두가 그걸 원할 것"이라는 스가의 대사는 일본시민 평균의 의식을 대변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본다. 그리고 호다카를 통해 공동체에 기여하면서 얻는 기쁨, 자신의 이타성을 발견한 히나는 기꺼이 그러한 선택을 한다. 이 또한 일본 사회에서 지금까지 권장되었던 모습이라고 보여진다. 근데, 호다카는 여기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선택을 한다. 신카이마코토는 그러한 선택을 극의 결말로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그렇게 해도 괜찮아 라고 젊은 세대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역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청년들의 행태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선이 있다. 그리고 그 레파토리는 앞서 말한 청년들의 지나친(?) 개인주의다. 그런데 감독은 그래도 괜찮아. 더 나아가 그것이 어쩌면 일본 사회의 희망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그 일로 공동체가 더 안좋아져도 그건 네들 잘못이 아니야 라고 말하고 있다. 

 "도쿄가 원래 바다였다"거나, "날씨는 원래 미쳐 있었다" 라거나. 그건 일본의 기성세대가 말하는 일본의 영광과 번영이 본래의 일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그렇다. 일본 전체 역사에서 일본이 전세계 탑의 경제와 번영을 누리던 시절이 얼마나 될까? 따라서 일본 사회가 좀 안좋아지더라도 그건 원래 일본 사회가 가진 Default로 돌아가는 것 뿐이니 그것에 대해서 청년세대가 책임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무리하게 그 책임을 떠안으려고 할 때, 히나처럼 개인은 소멸해버릴 가능성이 크다. 그러지 말라고. 스스로를 위해 기도하고 행동하라고 감독은 이 작품에서 말하고 있다. 이는 일본이 역사적으로도 개인이 소멸된 시대에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개의주의를 구원으로 바라보는 인식은 이러한 역사적 경험 속에서 나온다. 

 이러한 얘기를 직접적으로 하기는 매우 부담스러울 것이다.

 나는 "감독이 일본 사람 답게 자신의 작품 안에 여러 가지 은유를 통해 돌려서 말하고 있구나"하고 느꼈다.

 신카이마코토의 다음 작품도 기대된다.

 그 전에 이 작품을 또 보러 가야겠다.


[Bonus]

신카이마코토 감독의 팬이라면, 또 하나의 재미 포인프로 전작의 캐릭터들이 어디에 카메오로 출연했는지 찾는 것을 해볼 수 있다.

아래는 제가 찾은 것들

타치바나 타키: 맑음소녀 의뢰를 한 할머니집에 교복입은 채로 등장

미야미즈 미츠하: 호다카가 반지를 산 점포의 점원

테시가와라 카츠히코 & 나토리 사야카: 바자회에서 관람차에서 탄 채로 뒷모습만 나옴

미야미즈 요츠하: 히나가 제물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 날씨가 맑아졌을 때, 손으로 태양을 가리키며 "왠지 눈물이 나네"라고 말하는 역할


더 있을 듯.


끝으로 내가 이번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노래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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