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과 함께한 태교 여행기_발리(Bali) #편견극복

in #kr6 years ago

태교 여행을 시댁 식구들이랑 간다고?

여행을 출발하기 전 동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후회할 거라고, 친구랑도 싸우고 오는 게 해외여행인데 시댁과 함께한다니 말도 안 된다고, 뱃속의 아기를 생각해서 스트레스받지 말고 남편이랑 둘이 가라고.

사실 나도 처음부터 시댁과 함께하는 태교 여행을 계획한 것은 아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늘 여행에 목말라하던 나는 2017년 그 긴 추석 연휴를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2017년 연초부터 비행기 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 해 설날에 어머님께서 다음 명절에는 여행이나 가자고 하셨다. 시댁은 차례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명절이면 만나서 밥 한 끼 하고 이야기하며 보내는 데, 무뚝뚝한 두 아들과 며느리와 보내는 명절이 좀 무료하긴 했다. 나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 어차피 명절이면 시댁에 찾아뵈어야 하는데, 며느리 노릇 하면서도 휴가를 갈 수 있다니! 늘 가고 싶었던 발리행 비행기표를 샀고, 그 해 5월 아가가 찾아와 주었다. 추석 여행이 태교 여행으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묵었던 3층 풀빌라. 20만원대

출발하기 전, 많은 걱정이 들었다.

친정 부모님과 갔던 해외여행에서도 아버지와 티격태격했는데, 시부모님에 도련님까지. 속이 답답해도 한 마디도 못하고 스트레스받을까 봐 걱정했다. 스트레스가 태아에게 제일 안 좋다는데... 며느라기를 겪던 나는 뱃속의 아가를 위해서 이번 여행에서는 나쁜 며느리가 되겠다고 미리 다짐까지 하며 비행기에 올랐다.

발리의 계단식 논 Tegalalalng Rice Terrace

발리는 도로가 좁고 운전하기가 힘들어 많은 여행객들이 운전기사 겸 가이드를 고용한다. 처음에는 렌터카를 사용하려고 했는데, 운전기사님을 포함한 금액이나 렌트비나 별반 차이가 없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친절한 기사님과 친해져서 현지인들이 먹는 음식점에 데려가 달라고 했다. 남편과 나는 가리는 음식이 없다. 여행을 할 때면 늘 가장 현지인스러운 음식을 먹으려고 애쓴다. 시부모님과 도련님 입맛에는 안 맞을 수도 있지만, 신랑의 강력한 요청으로 현지인 식당으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파당(padang) 요리를 파는 식당.

파당 요리는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맛볼 수 있는 요리 방식으로서 특유의 매운맛으로 유명하다. 파당 레스토랑에 가면 우리나라의 한정식처럼 여러 가지 요리들을 먹을 수 있다. 우리가 갔던 곳은 아래의 사진과 같이 한정식 뷔페처럼 원하는 것을 고르고 그만큼 계산하는 방식으로 훨씬 저렴하다.


Padang cuisine image by Wikipedia

꾸따나 스미냑 같은 발리 시내에서도 볼 수 있는 식당 형태인데, 우리가 갔던 곳은 여행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골길에 위치한 기사님의 단골 기사식당 버전 파당 식당이었다. 허름한 외관에다 뷔페식으로 차려놓은 음식들에는 더운 날씨 탓에 파리들이 꼬였다. 인도 배낭여행과 필리핀 생활로 다져진 나의 기준으로도 허름했던 탓에 '아... 시부모님들이 싫어하시겠지 나가자고 할까' 생각하는 찰나, 아버님이 먼저 자리를 잡으시고는 우리가 음식을 골라오면 나눠먹겠다고 하셨다. 부담감을 갖고 음식을 고르고 맛을 보았는데 내 입맛에는 정말 맛있었다. 코코넛 밀크가 듬뿍 들어가 있고 향신료 향이 강한 커리에 푹 절여진 닭고기, 삼발(sambal) 소스에 볶은 채소까지 취향저격이었다. 기쁨도 잠시. 나는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 생각과는 다르게 임산부보다 더 많이 드시며 시부모님들은 연신 맛있다를 외치셨다. 그렇게 다섯 식구가 양껏 먹고 만원 남짓한 돈을 냈다고 하니 가격에도 엄청 만족하셨다.

우붓(Ubud) 스타벅스의 사원과 연못

그 후로도 어른들 입맛에는 느끼할 수 있는 연어 포케(poke), 현지 마트에서 산 이름 모를 과일 등 수많은 음식을 정말 '잘' 드셨고 한식을 찾지도 않으셨다. 젊은 아들 내외를 배려하는 걸까 싶어서 남편에게 한식당을 갈까 물어보니 부모님이 평소에도 가리는 음식이 없으시다며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발리식 연어포케

요즘에도 인도네시아 음식 맛있었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시부모님을 보면서 내가 갖고 있던 어른에 대한 편견을 깨닫게 되었다. 친정아버지만 해도 괌 여행 갈 때 멸치, 김, 고추장, 황태포까지 한식을 가방 가득 챙겨가신 터라 어른=한식이라는 공식을 당연한 듯 여기고 있었다. 사실 20대인 내 친구들도 쌀국수 먹을 때 고수를 빼는 친구들이 수두룩한데(고수를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선 정말 이해가 안 가지만), 개인차이를 세대차이로 생각한 것은 아닌가 반성했다. 그 허름한 식당도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시부모님에게는 어린 시절에 본 흔한 것이었을 텐데, 내가 동남아 여행 몇 번 해본 것 가지고 여긴 싫어하실 거라고 생각한 게 우스웠다. 한국의 모든 며느리가 그러하듯이 나도 '시'댁이 편하지 않았고, 지금도 편하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여행 중에 안 맞는 부분도 당연히 있었지만, 일단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함께 즐길 수 있어 다음 여행도 두렵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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