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申政變

in #kr6 years ago

1884년도에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 서재필(徐載弼) 등등이 甲申政變을 일으켰다.

朝鮮 고종 시절에는 帝國主義 시대였고, 日本은 메이지(明治) 維新을 통해서 서양식으로 자국을 완전히 바꿨다. 淸도 마지못해서 완전히는 아니지만 서양식으로 바꿨다. 이런 가운데에 朝鮮만 나라를 서양식으로 바꿀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서양 열강을 보고 있으니 서양문물을 받아들여야 하기는 해야겠는데 어느 정도로 받아들여야할지 고종도 중전 민씨도 조정도 고민하고 있었다.

日本은 희한하게도 서양문물을 아주 적극적이고 아주 대담히도 받아들였다. 다른 어느 나라도 日本처럼 해내지는 못했다. 전통, 문화, 관습, 도덕 등등이 수 백 년 동안 또는 수 천 년 동안에 이어져왔는데 이를 하루 아침에 바꾸기는 아주 어렵다. 따라서 朝鮮이 서양문물을 얼마나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음은 아주 당연했다. 그러나 中華意識에 푹 빠져 있은 淸도 開化했는데 朝鮮이라고 해서 開化 안 할 도리가 없었다.

甲申政變을 일으킨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 서재필(徐載弼) 등등이 보기에 朝鮮도 분명히 開化를 해야 했고 그러자면 本이 필요했다. 이 이들은 그 本을 日本으로 봤다. 그리고 淸은 朝鮮이 뿌리쳐야 할 나라로 봤다.

淸은 병자호란을 통해서 朝鮮에 치욕을 안겨 주었고 그 후에는 조공체제를 통해서 종주국으로 행세했다. 朝鮮 고종 시절에는 더했다. 영국, 프랑스 등에 패전함으로써 나라 체면이 땅에 떨어졌고, 동아시아에 확고히 자리 잡은 조공체제가 무너져가고 있었다. 류큐(琉球)는 日本이 집어삼켰고 베트남은 프랑스가 먹어치웠었다. 이런 상황에서 朝鮮 마저 조공체제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조공체제는 완전히 없어질 상황이었다. 따라서 淸은 어떻게해서든지 朝鮮을 붙잡고 있으려고 했다. 그러나 朝鮮人은 이와는 반대로 생각했다.

開化派가 보기에는 日本이 開化 本보기로 적당했다. 朝鮮 옆에 있은 나라는 淸, 日本, 러시아 등 세 나라였다. 그렇다면 日本 말고는 없었다. 게다가 日本은 서양열강이 帝國主義 짓을 함을 보면서 자국도 이를 本 받기로 마음 먹었었다. 따라서 어떻게해서라도 朝鮮에서 勢를 확보하려고 했었다. 이런 때에 開化派와 日本은 利害가 일치했다.

政變이든 叛亂이든 이를 실현하려면 그만한 武力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甲申政變을 일으킨 이들에게는 이만한 武力이 없었다. 이 때에 한양에는 淸軍 1,500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開化派는 이 淸軍을 물리칠 힘이 없었다. 그래서 日本이 더욱 더 필요했다.

그러나 결과는 大失敗로 끝났다. 이 이들은 웬만한 武力도 없으면서 政變을 일으켰었고 그 부족을 일본군을 통해서 메꾸려고 했었다. 게다가 국제정세에도 어두었다. 日本이 바라는 바는 朝鮮 援助가 아니었다. 日本이 바라는 바는 朝鮮 侵略이었다. 이 때에는 러시아가 큰 골치거리였다. 淸도 러시아가 남하하기를 적극적으로 막아야 했고 日本도 러시아가 남하하기를 적극적으로 막으려고 했다. 게다가 日本은 메이지(明治) 維新을 통해서 국력이 부쩍 켜지자 이를 아주 적극적으로 쓰고자 했다. 이런 때에 開化派가 日本에 손을 내밀었으니 甲申政變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어차피 朝鮮은 아주 힘들게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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