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후 집 가는 길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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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이 아이돌을 보러 가야 해 아침 9시에 레슨을 해야 했다. 난 오늘 공연인데... 좀 투덜댔지만, 요즘 아이돌은 활동 기간이 짧아서 볼 수 있을 때 봐야 한다며 아쉬워하는 통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정신이 없어 SD카드를 컴퓨터에 꽂아둔 채로 나왔다.

요즘은 공연도 많고, 일도 많아 레슨이 밀린다. 그래도 지금이 수시 기간이라 입시생은 시간을 쪼개서라도 자주 봐줘야 한다. 애들은 덤덤한데, 내가 불안해 죽겠다.

스팀잇에 학생에 관한 이야기는 잘 꺼내지 않지만, 내 삶에서 꽤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게 레슨이다. 아이들은 언제나 내게 조건 없는 사랑을 준다. 힘든 시기에도 아이들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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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쉬는 날인데도 바빴다. 바깥에 나가지 않아 쉬는 날이라 생각했는데, 그간 밀린 작업을 해야 했다. 별 것 아닌 작업이었지만 양이 많아 일을 마치고 나니 오후였고, 진이 빠져있었다.

잠깐 피곤해 바닥에 누웠는데 그 자리에서 4시간을 잤다. 오래 잤는데도 개운하지 않고,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선잠을 잔 느낌... 덕분에 하루를 그냥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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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이면서 공연 전날이기도 했는데, 온통 휴일에만 초점을 둬 연습을 하나도 안 했다. 공연 전 예민해지는 느낌도 전혀 없었고, 마치 모든 일이 끝난 것처럼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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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이 늦을까 불안하다며 레슨을 일찍 끝내 달라고 했다. 애를 먼저 보내고 남는 시간엔 손을 좀 풀었다. 전날 잠을 많이 자 손이 탱탱 부어있었다.

얼마 전 큰 공연을 마쳐서일까, 이번 공연은 크게 긴장되지 않았다. 평소대로 하면 되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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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허설 전 합주를 하는데, 연습 땐 한 번도 틀리지 않던 내가 계속 박자를 놓치고, 악보를 놓쳤다. 이렇게 된 건 백 프로 어제 긴장을 놓고 지냈기 때문인데, 후회와 함께 불안함이 밀려왔다.

어제는 평소보다 많이 잤지만, 오늘 일찍 일어나 그 피로가 쌓여있었다. 심지어 어제는 안경을 잃어버렸고, 그래서 악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커피를 끊임없이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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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리허설 땐 틀리지 않았다. 모든 집중력을 끌어모았다. 별로 긴장이 되지도 않았다.

리허설을 마치고 정신을 놓고 있다가 문 사이에 손이 끼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약지가 문틈에 끼었는데,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다. 내일이 되면 손톱에 멍이 들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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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공연 곡 중엔 테크닉이 복잡한 곡이 하나 있어 부담을 느꼈다. 이미 연습은 끝냈지만, 어렵다는 생각에 몸이 저절로 굳는 게 문제였다. 무대 위에서 그 부담감을 이겨내는 것이 과제였다. 게다가 약지까지 불편해지면서 더욱 부담되었다.

첫 곡은 피아노가 곡 시작 후 한참 뒤에 나왔는데, 무대 위에서 연주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시간이 정말 힘들었다.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후로는 마음이 편해졌다.

첫 곡은 어렵지 않았지만, 연주자끼리 합을 맞춰야 하는 부분이 꽤 많았다. 오래 해오던 곡이라 문제가 없던 곡인데, 무대 위에서 합이 안 맞기 시작했다. 다른 연주자도, 나도 당황했다. 누구의 실수인진 모르겠지만, 결국 악기들이 다른 타이밍에 나오게 되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은 척, 그게 원래 모티브인냥 틀린 리듬을 여러 번 반복했다. 사람들이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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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많이 하면서 느는 것은 실력이 아니라, 안 틀린 척 수습하는 뻔뻔함이다. 지금까지 했던 무대 위 실수와 그 수습 방법을 말하자면 밤을 새워야 한다.

첫 곡을 틀리고 나니, 막상 어려운 곡은 긴장되지 않았다. 첫 곡에서 삐걱거려서일까? 모두의 집중도가 높아져 다른 곡들은 평소보다 더 잘 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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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에서 우연히 옛 지인을 만나게 됐다. 요즘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왜 이리 반가운지... 또 두 손을 맞잡고 한참 이야기했다.

지금은 재즈 피아니스트지만 유명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던 동생이다. 바이올린이 싫어 자퇴한 것인데, 바이올린을 켤 줄 안다는 걸 알자마자 바로 데려와 여기저기 부려 먹었다. 실용음악과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를 보기는 정말 힘들었으니까... 그걸 인연으로 내가 음악을 맡은 뮤지컬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하기도 했었다. 오합지졸이었지만 재밌었다.

매주 우리 집 근처로 합주하러 온다고 해 당장 다음 주에 보기로 했다. 전역 후 처음 보는 건데도 전혀 낯설지가 않다. 동생은 곧 앨범이 나온다고 말하면서, 물을 게 있어 몇 번 연락하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왜 쉽게 연락하지 못했을까? 미안한 마음이 들어 화제를 돌렸다. 아까 틀린 부분 티 많이 났냐고 물어봤고, 티가 좀 났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를 거라고 위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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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이번 주 '망해서 행복한 사람들'을 보러 간다. 일부러 영화제 기간에 맞췄는데, 정신이 없어 예매는커녕 팜플렛도 보지 못했다. 숙소도 당연히 예약하지 못했다. 일정도 정하지 않았는데, 내 첫 부산 여행은 어떻게 되려나?

놀러 가는 것도 일로 느껴진다. 그렇게 따지면 한참을 쉬지 못한다. 내심 여행이 엉망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든다. 수틀리면 숙소에서 한 발짝도 안 나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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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힘들다. 집 가는 길이 너무 멀다. 이 지겨운 패턴. 진짜 운동해야지... 또다시 두드러기가 올랐다. 쉽게 낫질 않는다. 이젠 요령이 생겨 긁지 않는다. 오늘은 가자마자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얼굴에 팩 붙이고 전기장판 속으로 기어 들어가야겠다.

넋두리보단 (그나마 더) 생산적인 일기를, 혹은 무언가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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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님 넋두리 읽는 재미인 걸요!

넋두리 잘 읽었습니다. ^^
부산에 비가 온다네요.

기다리던 여행일텐데, 비도 안 오고 영화도 잘 보고 왔으면 합니다.

쉬는날 푹 쉬셔야되는데요~! 그러다 감기걸리십니다!!

와 틀린 멜로디를 어떻게 이끄셨을지 궁금해요.

일기 훔쳐봐도 되는거죠? ㅎㅎ
피아노 연주를 잘 하시나봅니다~
부러운 재능을 갖고 계시네요~
늘 건강하게 오래도록 재능을 꽃피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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