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멸과 결심
정신과에서의 임상심리전문가의 위치란 참으로 애매하기 그지 없다. 정신과 의사의 order를 받는 을의 입장이다 보니 제 목소리를 내기가 어렵다. 이런 포지션은 이미 임상심리전문가가 되기 위한 수련 과정에서부터 시작된다.
다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고 세련된 사회적 스킬들이 있기 때문에 이 위계서열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을 때가 많지만, 그래서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곳이다. 갑을병정 관계가 비교적 분명한 편이라 이 관계의 암묵적 룰을 깨면 여러모로..
이런 곳에서 수련을 받아야 하는 것은 이런 곳이 아니면 정신과 환자를 집중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이 드물기 때문이다. 한국은 정신과 의사가 아닌 다른 직역이 하는 상담 및 심리치료에 대해서는 보험 처리를 해주지 않기 때문에 미국에 비해 환자나 내담자의 선택지가 좁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다른 직역에 보험 처리가 된다고 해서 환자나 내담자에게 썩 좋은 것만도 아니다. 보험회사들이 단기 치료를 선호하여 장기 치료가 필요한 경우에도 연장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직역에 보험 적용을 해주는 것이 환자나 내담자에게 이점이 되기 쉽다. 선택지가 한 곳으로 집중된 것보다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는 것이 좋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약물치료로 차도가 없는 경우라도 심리치료를 통해 개선이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이런 경우라면 굳이 정신과에 가는 게 도움이 안 된다. 보험 처리 되는 다른 심리치료자를 찾으면 된다.
하지만 보험 처리 하려면 심리치료자로서 누가 정통이고 누가 야매인지 판가름해야 한다. 이런 것은 국민적 합의를 기초로 한 국가의 선택에 달려 있다. 국가는 이런 판가름에서 손을 놓고 있다. 저마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에 누구 편을 들어주기가 힘들다고는 하지만 3주 교육 듣고 딴 자격과 3년 고생해서 딴 자격이 같은 '민간자격'으로 동급이 되는 것은 국가가 정신건강 영역에 아직까지 많은 관심을 쏟고 있지 않다는 방증일 수 있다. 정신건강에 대한 국가의 낙후된 인식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은 국민이 아닐지.
미국에는 주마다 공인된 심리학자 상담자 사회복지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 이런 사람들이 보험 처리가 되는 심리치료자일 것이다. 한국에서 이렇게 국가에서 공인하는 직역을 늘릴 필요가 있는데, 공인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명무실이다. 말인즉, 공인된 자격으로 심리치료해도 의사 이외에는 보험 처리를 안 해주니 개업이 쉽지 않다.
심리치료를 하는 것은 의학적인 수술을 하는 능력만큼이나 고도의 전문성을 요한다. 그래서 기본이 석사 졸업에 수련 2~3년이다. 임상심리전문가 자격 취득하기까지 학부부터 따지면 아무리 빨라도 10년 정도 걸리는데(남자는 12~13년), 국가의 인식이 낙후돼 있다 보니 이런 전문성은 인정 받기가 어렵다. 물론 국민에게 이런 전문성을 홍보하지 않고 사회적인 기여에도 무관심했던 심리학 전공한 치료자들 책임도 크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임상심리전문가는 정신과에 셋방살이 할 수밖에 없다. 마음사랑처럼 임상심리전문가들이 주축이 된 심리치료 센터도 있지만 매우 드물뿐더러 이런 센터라 하더라도 수련생을 전문가로 성장시킬 만한 여력이 안 되는 경우가 많은데(그 이유는 나중에 기회 되면 논하기로..) 하물며 임상심리전문가 개인이 차린 상담소는 말할 것도 없다. 전국에 1500명 정도의 임상심리전문가가 있지만 이 중 개업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30%나 될까.. 10%? 그것도 안 될까?
정신과에서는 임상심리 수련생을 받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득일 수 있다. 같은 로딩을 보다 헐값에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는 좀 불편한 얘길 수 있겠으나, 굳이 남의 집 새끼 들여다가 키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심리평가는 비급여 처리되는 항목이 많아서 상당히 비싸다. 대학병원의 경우 종합심리평가가 50만 원을 상회하기도 한다.
병원에서는 임상심리전문가가 보다 많은 심리평가를 소화해주길 바란다. 이걸 혼자 처리하는 게 버거운 경우 임상심리전문가(수퍼바이저) 입장에서는 수련 시스템이 도움이 된다. 인간의 의도에 늘 선악이 공존하듯 이 수련 시스템에도 선악이 있다. 선은 전문가 양성에 힘쓸 수 있다는 것이다. 악은 수련생에게 과도하게 로딩을 부담시키는 것이다. 병원 입장에서도 나쁠 것이 없다. 임상심리전문가가 수련생의 보고서를 지도감독하고 수련생에게 월급 얼마 안 줘도 되니 말이다. 심지어 수련생이 월급을 받지 못 하고 일하는 곳도 많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 무급인 병원의 임상심리전문가를 욕하기 어려운 것은 수퍼바이저 역시 나약한 인간일 뿐이며 병원의 압력에 굴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자리에 있을 때 그러지 않을 수 있다고 장담하기가 어렵다. 말은 늘 행동을 앞서게 마련.
길게 설명했는데, 요약하면..
임상심리전문가가 전문의 수준으로 공부하고 수련해도 국가에서 3주 공부하고 딴 자격증과 동급으로 취급 -> 임상심리전문가로서 개업하기 어렵고 개업한다 하더라도 수련생 받기 어려움 -> 수련생 갈 곳 없는 상황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있는 병원의 수익창출 니즈와 (선과 악이 공존한다지만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해 악이 우세할 때가 더 많은)수퍼바이저의 의도가 결합하여 착취적인 수련제도 탄생 -> 수련생은 울며겨자먹기로 무급이라도 감수하며 50:1 60:1의 경쟁율 뚫고 정신과 입성하여 야근 2~3시간은 기본에 주말도 반납하고 몸 상해 가며 일함. 을의 태도를 체화함. 덤으로 정신과에서의 치료 주체가 의사에만 국한돼 있다 보니 심리치료를 제대로 못 배우고 나옴. 하더라도 집단치료 정도 시행함.
모든 병원이 이렇진 않다. 임상심리전문가나 수련생이 개인 심리치료를 할 수 있게 하는 병원도 있고, 수련생에게 레지던트와 비슷한 월급 주는 병원도 있다. 하지만 특히 후자는 (극)소수다. 나는 이런 극소수의 병원에 운 좋게 있었고 수퍼바이저 선생님에게 평생 감사하고 싶은 부분이다. 지금 월급이 5년 전 수련생 때와 비슷하다.(일단 눈물 좀 닦고)
정신병리에 대한 이해를 더 깊이 하려면 정신과 환자를 더 봐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아동치료분야로 발을 돌렸다가 다시 정신과로 돌아왔지만, 병원 수익을 위한 과잉처방이 아닌가 의심되는(사실 확신에 가깝지만 의심 정도로 해두자) 차고 넘치는 order들로 인해 기계적으로 심리평가 보고서를 쳐내는 데 급급하다 보니 1년을 갓 넘긴 지금 환멸감이 밀려온다. 주체적인 심리치료자로서 기능하기가 여러모로 어려운 셋팅이고, 심리치료가 아닌 약물치료 위주의 셋팅일수록 한 인간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바라보기가 어려움을 느낀다. 돈만 보고 가는 것은 전문가로서 득이 될 게 1도 없음을 새삼 느끼며, 정신과 경력은 현 직장으로 마무리를 짓고자 한다. 셋방살이보단 비닐하우스라도 내 집에서 사는 게 나을 것 같다. 토요일 반납하여 심리치료자로서의 역량을 다지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다시 치료분야로 가시는거에요?
문제점이 많군요 ㅜㅡㅜ 어떤결정을 내리시든 응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어떤 직업이든 고되겠지만, 심리치료자가 되는 길도 참 멀고 끝이 없네요.
정신과까지 가기 전에 한번 가벼운 상태에서 걸려줄 수 있는 기능같은 건가요? 그렇다면 저도 동의합니다. 한 예로 어느 정도 이상 규모의 회사도 심리상담사를 채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전처럼 의지와 열정만으로 덮을 수 없는 상황들이 많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이들의 도움으로 치료가 안될 경우에 정신과를 찾는,,,즉 경증일 때 빠른 접근이 더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예. 지금도 그런 기능을 하고 있지만 자격의 정리가 안 돼 있어서 난립하는 상황인 게 문제인 것 같아요. 아무 자격이 없어도 심리치료 센터를 차리는 게 가능한 상황입니다. 정신과 의사 이외에, 심리치료에서 보험처리가 가능한 직군을 국가가 선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중등도 및 중증 이상의 정신장애를 지닌 환자의 경우에는 정신과 약물치료가 필수적이죠.
오래전일이지만 저랑그다지 친하지 않은 학교 사람들은 당연히 제가 대학원에 갔을 거라고 생각하더라고요. 전 그다지 뛰어난 자질은 없지만 심리학을 참 좋아했고 진로고민이 정말 많았는데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어요. 이 글에 나타난 노력과 시간 대비 보상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고 무엇보다도 빠른 시일 내에 우리나라 내에서 상담사의 처우나 사회적 대우가 확보되지 않을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죠. slowdive님이 이 글에 적어주신 것처럼 정부나 사회적 인식 자체가 그다지 그들을 전문가로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어요. 정신과 상담을 받으며 느낀 부분이기도 하고요. 그 외로운 길을 걸을 자신이 없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묵묵히 가고 계신 slowdive님이 존경스럽기도 조금 슬프기도 해요. 이 길은 절대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임을 잘 이해하고 있어요. 이 모든 것이 slowdive님과 우리나라 임상심리 환경에 긍정적 영향을 주기를 멀리서나마 미약하게 응원드립니다.
안 오시길 잘하신 겁니다 ㅎㅎ 저야 뭐 심리학 공부가 재미도 있고 적성도 얼추 맞고 상담사들 평균적 연봉에 비해서는 처우가 다소 괜찮으니 불안함을 버티며 가고 있습니다. 정신과 나가면 처우는 열악해질 가능성이 있지만 ㅜ
개인적 경험 오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큰 응원이 되네요. fgomul님 덧글이 언제나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일반인들에게 책을 통해서든 블로그를 통해서든 임상심리학의 쓸모있음에 대해 쉬운 언어로 알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일단 제 경험치가 좀 더 쌓여야 할 것 같네요.
ㅠㅠ
우리나라는 상담하다 보면 다들 자기 전공한 분야를 추천하지 못하게 되는군요....
ㅠㅠ
ㅠㅠ
심리치료자 오우 그분야는 난 여하튼 응원할께요.나아가는 그길 빚만 가득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