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정치의 ‘유령들’을 넘어서

in #kr-politics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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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재 _ 노동·정치·사람 청년사업팀장

기표만이 존재하는 ‘청년 정치’

이준석이라는 화두는 분명 근래의 ‘청년 정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버렸다. 보수 정당에서 30대 당대표가 등장할 지도 모르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현상 속에서, 혹자는 이준석을 남한에서 처음으로 성공한 청년 정치인의 모델이라 이야기한다. 그러나 서른 여섯이라는 생물학적 나이를 제외하면, 소위 기존의 ‘청년 담론’이라는 것과 이준석을 매개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과연 이준석의 정치는 청년을 호명하는가?” 지금까지의 그는 보편의 청년이 아닌 청년이라는 집단 내부의 적대와 경계에 집중해 왔다. 여성주의 담론의 유통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이대남’의 정서에 호소하는 이준석의 동원 전략은, ‘보편 청년’이 아닌 ‘20대 남성’의 형태로서 대중을 포착하고 구성하며, 경계 밖의 집단을 배제하는 우파 정체성 정치의 전형에 불과했다.

한 편으로 기존의 ‘청년 담론’이 어떠한 내용을 생산해내고 있는지 역시도 모호해지고 있다. 더 이상 총체로서의 ‘청년 대중’은 단일한 청년 의제라는 것을 공유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청년 담론의 내용을 생산하던 청년학생운동의 단위들은,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대면이 힘들어진 이후로 제 기능을 잃은 채 해체되어가고 있다. 청년학생운동과 담론이 캠퍼스라는 단일한 공간성이 아닌 파편화된 의제를 중심으로 재조직되고 있다는 것은, 이것이 좋고 나쁘고를 평가하기에 앞서 우리가 현실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현상이 되었다.

모두가 청년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것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는 ‘청년 정치’라는 틀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예컨대 얼마 전 김우재 씨는 자신이 한겨레에 게재한 글이 반려 당했다는 사실에 분개하며 한겨레 칼럼니스트 직을 그만 두겠다는 포스팅을 게인 SNS에 게시했다. 공공을 대상으로 한 스피커로서의 책임감이 부여된 언론 지면에 그가 공유하려던 글에는 “정의당의 청년 전략은 구걸”이라는 주장이 들어 있었다. 여기에 정의당 청년 단위가 실천해 오던 사업과 노선에 대한 평가는 비약되어 있다. 담론의 공간을 열어 젖히고 선도해 가야 할 여러 이데올로그들의 태도는 대개 이와 비슷하다. 청년 담론이라는 공간 속에서 유통되는 의제와 내용들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운동의 형태만 호사가적으로 조망하는 것이다.

‘공정성’이라는 유령

서두에 등장했던 이준석은 근래에 ‘공정’이라는 수사를 자주 사용한다. ‘공정성(fairness)’이라는 개념이 곧 ‘청년 담론’이라는 것이 가리키는 ‘진짜’ 내용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것이 오늘날 청년 집단 사이에서 대중적으로 유통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공정성의 문제란 사회적 부가 얼마나 정의롭고 평등하게 분배되는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예컨대 청년들은 입시와 관련한 특혜 논란이 있었던 정유라와 조민에 대해 분노했다. 그런데 이들은 동시에 비정규직 노동자와 여성들에게도 분노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청년 대중의 공정성 요구는 한 편으로 ‘이데올로기적’이라는 점이다.

공정성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층위, 즉 ‘불공정성’, ‘형식적 공정성’, 그리고 ‘실질적 공정성’으로 구분될 수 있다. 청년들이 분노했던 것은 전자의 사례, 즉 불공정성이 맞다. 이는 공정하다고 가장된 경쟁의 사회적 장 속에, 그 장의 규칙을 무시하는 특혜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불공정성에 대한 반발로서 등장하는 청년 대중의 공정성 요구는 대부분 형식적 공정성에 관한 것으로 수렴한다. 「한국사회 공정성 인식조사 보고서」(2018)에서는 “한국 사람들 중 다수는 분배에 있어 산술적 평등보다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분배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힌다. 보고서에 따르면 “개인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수의 차이가 클수록 좋다는 입장이 66%”였다. 이는 공정성이 곧 능력주의(meritocracy) 이데올로기로 환원되는 것이다.

형식적 공정을 가장한 능력주의는 여러 정치경제적 조건을 은폐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이다. 형식적 공정은 사회적 부가 분배되는 사회적 장의 핵심 전제를 여전히 ‘경쟁’으로 설정한다. 여기에서는 경쟁에 있어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사회적 장의 규칙들이 물신화되고, 이 규칙 바깥에 존재하지만 경쟁에 영향을 미치는, 장의 참여자들이 가진 상이한 조건들은 고려되지 않는다. 그러나 경쟁이라는 전제 속에서 개개인이 여기에 투입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자원의 양은 다르다. 예컨대 청년대중은 입시 제도에서의 특혜에 분노하며, 모두가 ‘성적’에 따라 평등하게 평가받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입시 제도의 수호를 요구했다. 하지만 성적은 평등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가령 오늘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노동계급의 자녀와, 높은 교육열의 환경 속에 전격적인 투자를 받는 자본계급의 자녀가 경험할 수 있는 교육의 질은 다르다. 개인의 재능 역시도 사회경제적 투자를 통해 ‘만들어진다’. 이러한 경쟁의 결과는 사회적 부의 불평등한 분배로 이어진다. 이는 계급재생산의 공고화에 다시금 영향을 미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안티테제 아닌 대안담론의 청년 정치

‘이데올로기적’ 공정성은 오늘날 청년 담론이라는 것의 헤게모니를 공고히 장악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치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예시처럼, 좌익 청년 담론의 구성원들이 우익들이 이야기하는 공정성 논쟁에 일일이 대응하고 뛰어드는 일은, 이것의 확대재생산에 기여하는 꼴이 될 뿐이다. 결국 이를 돌파하려면 패러다임을 뒤집어야 한다. 청년 대중이 공감하는 ‘공정성 담론’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만, 이와 동시에 이것의 구호를 반동적인 ‘형식적 공정성’에 대한 요구에서 ‘실질적 공정성’에 대한 요구로 전환시키는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는 (형식적) 공정성이 자유경쟁이라는 전제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로 수렴되는 과정에서 은폐되는 계급과 구조적 불평등의 재생산에 대한 폭로, 그리고 ‘실질적 공정성’ 즉 ‘사회적 부의 평등한 분배에 관한 요구’로 공정성 담론을 재구축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는 공정이라는 이름 아래에 장악 당한 청년 담론의 새 판을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짜는 일이다.

최근 청년학생사회에서 유통되는 여러 파편화된 담론들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조건이 야기하는 불평등에 관한 문제제기로 수렴한다. 예컨대 페미니즘, 주거권, 금융 문제, 노학연대, 대학민주화에 관한 이슈들은 사회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급진적인 요구로 이행할 수 있는 측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젠더 평등, 주거 평등, 노동계급이 처한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 그리고 교육 평등이라는 각 담론들의 지향들이, ‘사회주의적’ 공정성 즉 실질적 평등에 대한 요구와 결합하여 대안 담론의 총체적 경향으로 재구축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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