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위로] 탱고: 라틴아메리카 환상 문학선

in #kr-newbie7 years ago

남자는 지하철 환승 통로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순간적으로 자기가 올라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려가는 것인지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계속 가야 할지 아니면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 할지, 좀더 정확히 말하면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아니면 뒤로 돌아가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이렇게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그의 주위에는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빽빽이 줄을 지어 그를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줄을 이탈하면서 혼비백산하여 흩어졌던 것이다. 당황한 사람들은 서로 뒤엉켜 부딪치면서 넘어졌고, 날씬한 아가씨들은 비명 소리를 질렀으며, 어린 학생들은 밑에 깔렸고, 어느 늙은 대머리 아저씨는 가발이 벗겨졌으며, 멋쟁이 할머니는 틀니가 빠져버렸다. 또한 어느 행상꾼이 지하철 안에서 팔려고 가져온 가짜 금목걸이 가방이 떨어져 사방이 금으로 치장되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은 이런 소란을 틈타 가판대에서 주간지를 한 권 슬쩍 하기도 했다. 그리고 강간하려는 시도도 있었고, 어떤 시계는 손목에서 떨어져나와 공중으로 치솟았고, 몇몇 여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가방을 바꿔들기도 했다.
이 소동이 진정된 후 남자는 체포되어 공공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하지만 남자도 자신이 저지른 경거망동의 희생양이었다. 그 역시도 이런 소란 속에서 앞니가 부러졌던 것이다. 사건 당시에 남자는 밤낮으로 환하게 불이 켜진 25미터 환승 통로에서 잠시 머뭇거렸으며, 당시 열다섯번째 줄의 세번째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 위치는 계단을 오르고 내리는 특정 순간에 특정 위치에 반드시 있어야 된다고 지정된 곳이었다.
심문이 시작된 때는 11월의 차갑고 습습한 어느 날 오후였다. 남자는 도데체 지금이 어느 계절인지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순간적인 머뭇거림으로 이런 사고가 유발되어 구속된 이후, 세상에 대한 그의 생각도 불확실한 시기를 거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틈새 La Grieta,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

탱고: 라틴아메리카 환상 문학선, 루이사 발렌수엘라 외, 문학과지성사


**흔한 경험은 아니지만 가끔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질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기억력 저하나 숙취 때문일 수도 있고, 그저 환경의 변화에 대한 감각적 반응일 수도 있지만 그 모호한 느낌만은 정말 선명하게 환상적이죠.

단편 중에서도 아주 짧은 단편들을 모은 이 책이 라틴아메리카 환상 문학을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잠시 환상으로 인도해줄 만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가끔 장편 소설을 잘 못견딜 때가 있는데 그런 저에게도 빠지려고 했더니 끝나버리는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단편의 아쉬움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끊임없는 와이파이 일상에 잠깐이라도 끼워넣으려면 짧아야 좋다는 게 또한 현실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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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직접 와주시는 거였나요?! 완전 감사합니다. ^^
보팅 서비스도 이용해 보겠습니다 (한번 해볼거 정말 많다는!) 한파 조심하세요~

환상 문학이라는걸 처음 알게 되었네요. 저에게 조금은 어려웠지만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
보내주신 스팀달러 잘 받았습니다!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보팅해주시고 제가 오히려 감사하죠. 좀더 도움이 되어야 할텐데~
한파 조심하시고 춥지만 좋은 하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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