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차이코프스키 -- 영혼의 동반자 폰 메크 부인의 사랑

in #kr-movie3 years ago (edited)

러시아, 거장의 나라!

이고르 탈란킨 감독의 이 작품은 1969년에 만들어졌다. 소련이 강성대국으로 미 제국주의와 대결할 때다. 러시아의 문학과 음악 세계는 그 깊이가 한량없다. 러시아 문학을 빼버리면 서양문학의 절반이 지워진다. 내가 고등학교 때 탐독했던 소설의 90%는 러시아 문호들 대작이었다. 인간 본질을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작품들의 웅숭한 세계 속에서 자맥질할 때 행복하였어라. 고작 문고판 사진으로만 야스나야 폴라야를 봤지만 무덤마저 황홀했다. 아름드리 나무 그늘 밑에 봉긋한 무덤과 밝은 색깔의 꽃들이 무덤 앞에 놓여 있었다. 푸쉬킨도 도스토예프스키도, 투르게네프도, <고요한 돈강>의 미하일 숄로호프도, <닥터 지바고>의 파스테르나크도, <벚꽃동산>의 체호프도 모두 러시아에 있다. 그들은 왜 러시아에서만 태어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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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숲으로 가는 마차

오래전 나는 <러브 오브 시베리아>를 봤다. 미모의 미국여자와 러시아 장교 사이에 맺어지지 않는 사랑을 그린 영화다. 멜로 드라마 치곤 볼만했는데 내가 무척 감동 깊었던 것은 자작나무 숲이다. 드넓은 시베리아 평원에 끝없이 이어지는 자작나무 숲이 가을이 되면 샛노란 단풍잎으로 변한다. 나무 줄기는 백화나무라고도 하는 만큼 하얀 귀족의 얼굴을 연상시킨다. 카메라가 롱 숏으로 하늘에서 내리찍은 노랗게 물든 자작나무 숲의 바다는 숨막히게 매혹적인 정경이었다. 내 평생 그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직접 볼 수만 있다면 그자리에서 죽어도 좋을 것 같았다. 젊은날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의 자취를 찾아가는 여자. 그녀가 확인한 것은 남자의 누추한 삶이었다. 숨어서 그 남자를 지켜보는 여자의 물기어린 눈빛이 오래토록 남는 영화였다.

<닥터지바고>에서도 자작나무 숲은 어김없이 나온다. 김성우 선생은 러시아 문학기행을 하고 난 뒤에 제목을 <백화나무 숲으로> 라고 이름 지었다. 러시아는 나에게 자작나무를 빼면 상상이 불가능 하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내 눈을 오랫동안 빼앗은 그림도 자작나무 그림이었다. 표구해서 오랫동안 본 적이 있다. 내가 다시 영화 <차이코프스키>를 본 것은 자작나무 숲을 보기 위함이었다. 눈 덮인 자작나무 숲으로 마차를 몰고가는 사람들, 잎새 진 자작나무 숲을 산보하는 차이코프스키. 나무의 바다. 나는 그것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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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년 필름을 호암아트홀에서 80년대 후반에 상영했다는 것이 내 기억이다. 나는 아내와 호암에서 <차이코프스키>를 봤다. 배경음악이 너무 좋았고 차이코프스키의 불행했던 삶이 그녀의 정신적 후원자인 폰 메크 부인으로 해서 말년에 평온을 얻는다는 줄거리가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 때 분위기는 음악의 천재 차이코프스키가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잠시나마 휴식을 갖는 부분이었다. 삶은 항상 어지럽고 두서가 없지 않는가? 아마도 증권시장에 후달리던 때라서였는지 내가 그 영화를 보면서 아름다운 음악과 어우러지는 평온한 휴식이 너무 부러웠었나 보다. 다시 보니 영화는 그런 부분 보다는 차이코프스키와 폰메크 부인과 이루어지지 않는, 아픈 사랑이 더 눈에 들어왔다.

표트르 일리이치 차이코프스키. 그는 오페라단 가수였던 벨기에 여인 데지레 아르토와 약혼까지 했으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데지레는 스페인 남자와 결혼하면서 차이코프스키를 발로 뻥 차버린다. 미완의 사랑으로 절망에 빠져 자살을 시도할만큼 차이코프스키는 마음이 여린 남자였다. 러시아 음악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음악원 교장 나콜라이 루빈시타인과 진한 친분을 쌓는다. 영화는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PIANO CONCERTO No.1을 루빈시타인이 연주할 수 없다고 한다. 루빈시타인은 그 당시 모스크바 음악계를 잡고 있던 독재자였다. 피아노 협주곡을 완성시킨 차이콥스키는 음악원의 초대 교장인 니콜라이 루빈시타인(Nikolay Rubinstein)과 동료 교수인 후베르트(Nikolay Hubert)를 자기 연구실로 초청하여 시험 연주하여 들려준다. 뜻밖에 그 두사람은 연주 후에도 아무 말 없이 침묵만 지키고 있고 그가 의견을 구하자 루빈시타인은 격렬한 어조로 이곡은 피아노에 부적당하다느니 졸렬하다느니 개성이 없다는 등의 혹평을 하였다. 차이코프스키가 분개한 나머지 거기서 뛰쳐나가 다른 방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을 때에 루빈시타인이 뒤따라 와서 이 협주곡이 연주에 적당치 못함을 재삼 설명하고 다시 고칠 경우 연주회에서 자기가 초연을 맡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은 당대의 격식과 메너리즘에서 벗어난 때문이었을 것이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차이코프스키 생애 최대 불행은 결혼이었다. 모스크바 음악원 제자였던 안토니나 미류코바라는 28세의 여성으로부터 열렬한 구혼을 받았을 때 차이코프스키는 37세 였다. 너무나 똣밖의 일이라 마음이 내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순정에 빠져 결혼해 버렸다. 차이코프스키를 평생 동안 단 한번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을 사랑했고 인간으로서 차이코프스키를 존경했던 여인 폰 메크 부인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일이었다.

미류코바는 남편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해도 없는 여자였다. 극도로 내성적이고 수줍어하는 성품이며, 오직 음악에만 한결같이 정열을 쏟고있는 차이코프스키의 결혼생활은 순식간에 파탄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심한 노이로제에 걸려 한때 자살을 기도한 일까지 있었던 차이코프스키는 어느날 갑자기 아내를 버리고 친구를 따라 페테르부르크로 도망하여 결혼생활은 종말을 고하였다. 이때 그는 극도로 쇠약해 있었기 때문에 곧 전지요양을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로 와서 겨우 그의 건강이 회복되었으므로, 여기에서 제4교향곡을 작곡한외에 또 《에프게니 오네긴》의 작곡도 계속하였다.

미류코바는 이혼을 하는 댓가로 차이코프스키에게 만 루블을 요구한다. 돈이 없던 차이코프스키 사정을 잘 아는 루빈시타인이 폰 메크 부인을 찾아가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 한다. 그 당시 만 루블은 무지막지한 돈이었을 것이다. 폰 메크 부인은 마음 속 깊이 사랑하는 사람의 불행을 듣고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그 돈이 차이코프스키를 불행에서 건져낼 수 있느냐고 묻는다. 루빈시타인은 부인에게 말한다. '부인은 참으로 위대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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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이미 이루어진 사랑

광산업으로 큰 돈을 벌었고 철도 경영자의 미망인 이었던 폰 메크 부인은 평소부터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가난한 작곡가에게 경제적 후원자를 자임하고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녀는 이런 조건을 단다.

"절대로 서로 만나지 않도록 할 것, 설령 마주치더라도 대화하지 말 것."

차이코프스키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폰 메크 부인의 후원은 15 년 동안 계속되었으나 두 사람은 한 평생 단 한번 밖에 만나지 못한다. 차이코프스키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쓴 작품을 그녀에게 헌정하고 오직 편지 왕래로 부인과 만난다.

영화에서 차이코프스키와 폰 메크 부인간에 절절한 대화가 두 연인을 번갈아 비추면서 이어진다. 폰 메크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사랑은 나에게 분에 넘칩니다. 나는 당신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당신의 음악 안에서 당신이 말하는 것을 듣고, 그 안에서 당신의 감정을 함께 느낍니다."

차이코프스키는 답한다.

"우리들의 교향곡(교향곡 4번) 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주는 이 교향곡 전체의 핵심과 정수입니다. 이것은 운명입니다. 제 2악장은 비애의 다른 일면을 보입니다. 이것은 일에 지쳐 쓰러진 자가 밤중에 홀로 앉았을 때 그를 싸고도는 우울한 감정입니다. 읽으려고 든 책은 그의 손에서 떨어지고 많은 추억이 샘솟습니다."

이혼 한 뒤로 그는 폰 메크 부인에게 만일 내가 다시 사랑이 시작된다면 그 상대는 당신일 것이라고 고백을 하기도 한다. 너무도 슬픈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순수한 사랑도 있었던가? 차이코프스키와 폰 메크 부인은 평생 동안 1,100여 통 편지를 주고 받는다. 차이코프스키의 작곡 배경을 알 수 있는,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자료다.

1890년 10월 폰 메크 부인은 "파산해서 더는 연금을 보낼 수 없다"는 편지를 보냈다. 차이코프스키는 갑작스러운 절교 선언에 크게 낙심해 했고 3년 뒤인 1893년 11월 콜레라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폰 메크 부인의 차이코프스키에 대한 조건 없는 후원은 위대한 곡을 낳게 한다.육체적 사랑이 아닌 정신적 동반으로 시종일관했던 두 사람 관계는 한없이 가슴 아프지만 이들이 이루어낸 음악은 영원히 남아 세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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