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in #kr-mindfulness6 years ago

지금 보여지는 것 역시 어쩌면 제 인지 체계가 투사된 것일지 모릅니다. 사방이 거울인 공간에 갇혀 만족이라는 것을 위해 애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난 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렇게 상호 투사가 난무하는 가운데에서 관계란 무엇일까요? 결국 나 밖에 없는데도 관계란 단어를 쓸 수 있을까요? 그것을 온전한 의미의 관계라 할 수 있을까요? 관계란 단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나와 상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도 있고 상대도 있다고 하면 그 둘을 구별해야하지 않을까요?

의식은 무엇일까요? 아니 의식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구별을 위해 사용되는 것은 아닐까요?

세상에 태어나고나서일 수도, 혹은 태내에서 분화하거나 성장하던 중의 어느 순간부터 일지도 모릅니다. 신체적 감각을 통해 처음으로, 물론 유전적으로 이미 내장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무언가를 감각하면서 의식은 싹 트기 시작했을 겁니다.

처음에는 호, 불호나 쾌, 불쾌 정도로 미분화된 채였고 반응 역시 울음이나 미소 정도로 단순하기 그지 없었겠지만 그렇게 시작된 감각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그것들은 점점 더 잘게 나뉘었을 겁니다.

그에 따라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보다 다양하고 효율적인 회로들이 만들어지고 또 그것들은 점점 더 복잡한 네트워크를 만들어 갔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하지만 물리적 구별로 시작된 그 구별이 온전한 나로의 심리적 구별의 완성에 이르기까지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사춘기에 다소 두드러진 나로의 구별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이 역시 온전한 심리적 구별의 아주 미숙한 시작일 뿐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경우,장년기를 지나 심지어 삶을 마감해가는 노년기에조차도 그것을 온전히 해내는 일이 드믈어 보입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독자적 생존이 불가능하게 태어나다 보니 나라는 개인을 남과 구별하는 것보다는 내 편과 내 편이 아닌 것을 구별하는 것이 생존에 필수적이었던 때문은 아닐까싶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최소 13만년 이상을 편을 먹는 것을 통해 생존하고 진화했으니까요.

'더불어 삶'과 같은 근사한 말도 따지고 보면 결국 내 편 안에서의 더불어 삶이고, 내 편 아님에는 배타적일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여하간 제 짐작에는 인류가 온전한 나를 무리로부터 구별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보입니다. 제 부족한 통찰을 탓해야겠지만 20여세기 전 즈음은 지금의 인간으로 보자면 6세 내지 7세 쯤으로 보입니다. 인본주의를 시작으로 비록 미숙하나마 나를 구별하기 시작한 때는 사춘기쯤으로 보이구요. 그리고 21세기인 지금이 바로 삶의 현장으로 갓나온 성인 초기처럼 보다 구체적으로 세상과 나를 알아가는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매번 변화는 익숙함을 흔듭니다. 비록 나를 구별해가는 과정으로서의 편 가르기였지만 편 가르기의 익숙함 탓에 불가피하게도 더 작게 편을 나누는 과정이 생길 수 밖에 없어 보입니다. 보여지는 수 많은 균열들이 그렇게 보입니다.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과 같은 이분은 비록 아니지만 더 여러 갈래로, 그것도 상황에 따라 변하며 서로를 구별하고자 합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구체적이고 온전한 나를 구별한다기 보다는 비록 새롭지만 단지 더 작게 내 편과 내 편 아님을 구별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지향점이 나라기보다는 여전히 편이라는 점입니다. 더구나 거기에 심지어 '정의'같은 단어가 사용되기도 합니다.

사실 이렇게 쓰면서도 나를 구별해내는 것이 궁극적으로 옳은가에 대한 확신은 없습니다. 외로움을 느끼고 누군가와 정서를 나누며 다행감을 느끼는 것이, 공감받고 위로받으며 상처를 치유해가는 것이 결국은 나와 상대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야를 가리는 쌓아올린 담은 허물되 경계는 분명해야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역시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결국 구체적이고 온전한 나를 구별하기 위한 인류의 여정은 멈춰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보는 남의 모습은 사실이지 대개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입니다. 온전히 나를 구별해 내는 의식이 없다면 나와 너 사이에는 경계가 불분명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비록 의식하는 부분에서는 서로 다르다고 여기겠지만 사실은 무의식적으론 경계가 희미합니다. 나와 너의 경계가 없으니 서로를 넘나듭니다.

의식은 내가 아니라고, 나와는 다르다고 판단했습니다만 온전한 나도 모르고 그러니 온전한 상대도 모릅니다. 이미 무의식에선 상대는 없고 상대는 그저 막연한 나입니다. 상대라고 믿고있는 것은 거울입니다. 제가 본 것들은 전부 거울에 비친 제 모습들입니다. 그것이 투사입니다.

말들이 무성합니다. 시공을 넘나드는 테크놀로지 덕에 온라인에는 말들이 넘쳐납니다. 편을 나누고 비난하는 소리들이 난무합니다. 마치 내부가 거울로 만들어진 구 안에서 한 줄기 빔이 반사되면서 구의 내부가 온통 어지러운 반사 빔들로 가득한 것처럼 말입니다.

거울에 비친 상이 나라는 각성만큼 또 중요한 것은 비친 상의 명료함입니다. 지금처럼 복잡해서 상의 구별조차 어려울 정도로 어지럽다면 사실 그 각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뢰하던 이에게 실망하는 것도 그가 쉽게 투사의 함정에 빠지는 때문 아니겠습니까? 제게 실망하는 누군가도 바로 그런 제 모습때문일 테구요.

온전히 나를 안다면, 그러니까 나와 너의 경계가 명확해진다면 그 지점에서 투사는 멈추지 않을까요? 진짜 내가 보이고 진짜 상대가 보이지 않을까요?

그때 비로소 관계가 생겨나지 않을까요? 투사를 되돌린 상태에서 보이는 상대와 의식된 나와의 관계. 그것이 어쩌면 진짜 관계가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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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은 허물되 경계는 분명해야

좋은 말씀이네요.

보통은 경계마저 무리하게 허물려고 하다 보니
많이 부딪히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듯 합니다. 하지만 경계를 설정하는 것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있는 것같아 보다 더 이해하기 쉽게, 더 풍성하게 풀어봐야 할 것도 같습니다. 그 풍성함을 선생님의 글과 삶에서 느낍니다.

인식적 투사에서 존재적 삶으로의 여정, 말씀 감사합니다.

꿈보다 해몽?

하지만 그런 것도 같네요. 여튼 제겐 inspiration을 주십니다.

하하~~~ 제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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