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의 기원은 고대 "한국어"

in #kr-history6 years ago

일본어는 기원전 5세기를 전후해 한반도의 농경법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고구려 지역 언어가 옮겨간 것이라는 학설이 제기됐다.

또 세계 주요 언어의 확산은 이 같은 농사 기술 전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됐다.

일본이라는 나라와 국기 일본어의 뿌리가 고대 한국이라는 주장(가설)은 우리 한민족참역사의 지론인데

‘일본어의 기원’을 쓴 로이 애드루 밀러 등 언어학자들에 의해서도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물론, 한민족참역사를 비롯, 국내 재야학계와 일본 강단사학계에도 비슷한 견해는 많이 있었지만 이처럼 시기까지

거론해 구체적으로 제시된 내용은 처음이라. 종합적으로 몇가지 중요한 내용을 옮겨 본다.

미국 UCLA 자리드 다이아몬드 박사와 호주 국립대 피터 벨우드 박사는 지난달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에서 일본어는 기원전 400년께 한반도에서 일본 남부 규슈(九州)로 건너와 쌀농사를 짓고 이 농경법을일본 북부로 확산시킨 농경민 언어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3, 5, 7 등의 숫자를 표기하는 고구려어가 각각 ‘密’ ‘于次’ ‘難隱’으로 중세 이후 한국어와 완전히 다른 반면 ‘미(mi)’ ‘이쓰(itu)’ ‘나나(nana)’로 발음되는 일본어와 매우 유사하다는점에서 고구려어와 일본어의 밀접한 관련이 거론돼 왔다. 다이아몬드 박사등은 고대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각 독자적 언어를 갖고 있었으며 현재의 한국어는 신라어에서, 일본어는 고구려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고구려어가 일본어의 기원이라는 이들의 주장은 농업의 발달과 전파가 언어 확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가설에 근거하고 있다. 논문에 따르면 인류는 수렵.채집 생활을 할 동안 부양 능력이 크지 못해 인구가 적었다. 하지만 농사법이 생겨난 뒤 인구가 팽창했으며, 급격히 불어난 농경민들이차츰 수렵.채집민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농경민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주변 인류의 언어를 대체하게 된다. 언어 전파는 인종이나 민족 확산 방식과는 달리충돌할 경우 혼합되기보다 우세한 한 가지만 채택되는 형식이 될 수밖에없어 확실한 인구학의 지표라고 이들은 지적했다.

◆'한(韓)'과 '한(漢)' 흔적 지운 일본 근대 =고야스 류의 목소리는 일본 주류 학계에선 듣기 힘들다. 그는 "'한(韓)'의 흔적을 일본 지리상으로뿐만 아니라 역사상으로도 일본 열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한(韓)'이란 한반도를 통해 전해진 선진 문물을 가리킨다. 그가 볼 때 근대 일본의 성립 과정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한(韓)'의 흔적을 지우는 과정"이었다.

일본은'한(漢:중국 문물)'의 흔적도 제거했다. 근대 일본이 한자(漢字) 문화를 부정한 경우를 예로 들었다. 서양 문물을 번역하는 과정에 일본식 한자 조어를 대거 만들어낸 것에 대해선"'고유한 일본어'에 집착한 근대 민족주의의 소산"이라고 분석했다.

고야스 교수는 특히 서양식 근대가 싹트기 직전인 에도시대의 두 인물에 주목한다. '한(韓)'의 흔적을 강조한 후지와라 사다미키(藤原貞幹.1732~97)와 '한(韓)'의 흔적을 지우며 일본 고유의 기원을 세우는데 주력한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1739~1802)다. 후지와라는 고대 일본의 제도.의례.제사.문자.의복 등의 문화가 '한(韓)'과 '한(漢)'문화에 의존한다고 봤다. 이런 후지와라의 학설을 모토오리는 "광인의 말"이라고 폄하했다. 모토오리는 일본의 정체성을 확립한 국학자(國學者)로 20세기 전반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높이 평가받았다.

◆야요이 시대 600년 기간 중,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계통의) 죠몽 원주민과 (예맥 퉁구스 계통의) 가야 사람들이 어울려서 원 일본인을 형성했다.

후기 고분시대에 이들 원 일본인과 백제에서 새로 건너온 사람들이 합쳐져서 한반도 사람들과의 유전적 유사성이 훨씬 커졌다 야요이 시대의 원 일본어는 한반도 남부의 가야 방언에 가까웠으나, 고분 시대 일본어는 부여-고구려-백제 방언에 가깝게 되었다.
현대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 사이의 음운적, 어휘적 차이는, 한국어가 죠오몽 기층언어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

언어학적인 면에서 죠오몽 원주민이 일본어 형성에 기여한 바는, 현대 일본인의 형성에서 그들이 끼친 유전적인 기여도[35% 미만]에 필적할 수 있다 하지만 (계통이 다른 언어들의) 문법을 섞어서 함께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기 때문에,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의 언어학적인 영향은 어휘와 음운적 요소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어휘와 음운 만을 본다면 한국인과 일본인의 언어는 그들의 유전자 만큼 유사하지 않는 것이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편집자 주 왜 한국인과 일본인의 언어는 그들의 유전자만큼 유사하지 않는 것일까?형태적-구문적 유사성과 어휘적-음운적 상이성홍원탁 (서울대 교수)왜인 대 야마도인Janhunen(1996: 231)은 “일본어의 궁극적인 고향은 한국, 보다 정확하게는 한반도의 남부(가야), 서부(백제), 중부(고구려)다”라고 말한다 원 일본어(原日本語)를 사용하는 원 일본인(原日本人)이 죠몽시대가 아니라 야요이 600년(300 BC-300 AD) 기간 중에 형성되었다 비록 원 일본어가 어휘나 음운적으로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언어의 영향을 상당히 받기는 했지만, 한국어의 가야 방언이 원 일본어의 근간이 되었다.

4세기 말, 백제 정복자들이 일본열도에 도착했을 때, 야요이 원주민들과 큰 불편함이 없이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상당히 많은 수의 어휘를 공유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Diamond(1998)에 의하면 “야요이 시대 사람들 골격 중에는 여전히 죠몽 사람들과 유사한 형태가 발견되지만, 고분시대에 와서는 아이누를 제외하고는 모든 일본인의 골격이 현대 일본인-한국인과 유사한 형태로 단일화되었다” 1야요이 600년 기간 중에 아이누, 말라요-폴리네시안, 가야 사람들이 어울려서 형성한 원 일본인을 왜인(倭人)이라 부른다면, 후기 고분시대에 이들 원 일본인과 백제에서 새로 건너온 사람들이 합쳐져서 형성된 사람들을 “야마도인”이라 부를 수 있다.

야마도 사람들은 야요이 원 일본인보다 한반도 사람들과의 유전적 유사성이 보다 훨씬 커졌고, 그들이 바로 현대 일본인의 선조인 것이다Unger(2001)에 의하면, 정복에 의했건, 폭 넓은 접촉에 의했건 간에, “야요이 시대로부터 고분시대로의 전환”은 일본 말의 중요한 언어학적 변화를 초래했다.

즉, 일본어의 퉁구스어[고구려-백제를 의미]와의 유사성이 커지는 것이다.
Unger에 의하면, “소수의 흔히 쓰이지 않는, 혹은 어의적으로 좁은 뜻의 일본말 어휘들은 한국어[가야를 의미] 어근(語根)들을 갖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광범한 의미로 쓰이는 유의어(類義語)들은 흔히 고구려, 백제 또는 퉁구스어 어근을 가지고 있다” 위서 동이전은 고구려 언어가 부여 언어와 동일하다고 말한다.
양서(梁書)는 백제 언어가 고구려 언어와 동일하다고 말한다 일부 언어학자들은, 누가 보아도 지리적으로나 연대기적으로 가깝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국어와 일본어 사이의 병렬(竝列)성, 유사성을 오로지 어휘의 대량 차용 현상만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언어학자들은 한국어와 일본어가 모두 알타이 계통 언어들이며, 옛 일본어와 부여-고구려-백제 언어 사이에는 명백한 계통 관계가 있음을 강조한다.

이기문(1972, 35-6)에 의하면, 알타이계통 언어들은 수사(數詞)를 공유하는 경우가 드문데도 불구하고 유독 고구려어와 옛 일본어는 놀랍게도 많은 양의 수사를 공유한다.
즉, 고구려 말의 밀(3), 우차(5), 난은(7), 덕(10) 등은 일본어의 미(3), 이쯔(5), 나나(7), 도오(10) 등과 일치한다.
이기문은 고구려 언어가 옛 일본어와 계통적으로 상당히 가까울 뿐만 아니라, 이 두 언어의 분리는 비교적 최근에 발생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왜 한국인와 일본인의 언어는 그들의 유전자만큼 유사하지 않는 것일까?Diamond(1998)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일본인들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한국으로부터 건너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면, 왜 한국인과 일본인의 언어는 그들의 유전자만큼 유사하지 않는 것일까?한국어와 일본어는 상당히 최근에 갈라졌다.

유전적인 유사성이 언어적인 거리와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현대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 사이에서 발견되는 명백한 어휘적, 음운적인 차이를 설명해야만 한다.

언어적 거리라는 수수께끼에 대한 쉽고 가능한 해답을, 부여-고구려-백제, 마한, 진한(신라), 변한(가야) 방언들이 어휘적으로 현저하게 달랐을 가능성에서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한반도 내의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할 때 통역이 필요했다는 기록이 단 한군데도 없다.
통역은 중국인을 상대할 경우에만 필요했다.
사실 삼국사기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 사람들 사이에 어떤 형태이건 언어적 문제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따라서, 일본열도에 야요이 시대를 전개한 가야 사람들의 방언과, 마한 지역을 정복하고 나아가 일본열도에 야마도 왕국을 세운 백제 사람들의 방언과, 또 한반도를 통일하게 된 신라 사람들의 방언이 극복하지 못할 정도로 서로 달랐다고 구태여 가정을 해서 현대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 사이의 어휘적, 음운적인 차이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야마도 왕국의 지배자들이 백제, 심지어는 신라나 고구려에서 온 사람들을 대면했을 때에도 통역이 필요했다는 기록이 단 한군데도 없다 일본서기에는 인교오(允恭)가 죽었을 때 (5세기 중엽), 신라왕이 조문단을 보냈는데, 그들이 야마도 사람들 “풍속언어에 익숙하지 않아(未習風俗之言語)” 오해가 발생하여 문제를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당시 “풍속 언어에 익숙하기만 하면” 신라와 야마도 사람들이 편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반면, 중국 조정에 사신을 보낼 때에는 통역(譯語)이 수행한 사실을 대부분 경우 일본서기가 분명하게 기록을 한다Ono(1962)에 의하면, 일본어에 대한 말라요-폴리네시안의 언어학적인 영향으로 신체 각 부분 명칭에 남방적 어휘가 남아있고, 모음조화 현상이 계속 쇠퇴 해 9세기에 와서 사라져 버렸고, 또 일본어의 어휘들이 개구(開口) 음절로 끝을 맺게 되었다 아이누 언어, 특히 말라요-폴리네시안 언어의 어휘적, 음운적 영향은 일본어의 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Unger(2001)는, 한국어와 일본어 사이의 음운적, 어휘적 차이는 “한국어가 죠오몽 기층언어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언어학적인 면에서 죠오몽 원주민이 현대 일본어 형성에 기여한 정도는, 그들이 현대 일본인의 형성에 끼친 유전적인 기여도[35% 미만]와 필적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계통이 다른 언어들의) 문법을 섞어서 함께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기 때문에,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의 언어학적인 영향은 어휘와 음운적 요소에 집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기 고분시대(대략 375-675) 전기간에 걸쳐,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어휘의 발음을 모두 한자로 표기했었다 1443년에 창제된 한글은, 많은 언어학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체계라고 말한다.

모음 10개로 8,778개의 발음을 표기해 낼 수 있으며, 음절과 발성 사이에 엄격한 1:1 대응관계를 유지한다.
반면, 일본어 음절 표기법은 9세기경에 야마도 지역의 여성들 사회에 나타나 사용되었던 비과학적 표기 방법을 답습하고 있다.

말라요-폴리네시안 언어의의 특징인 최소 발성 전통에 따라 5개의 모음을 가지고 201개의 발음을 만들어 낸다 (폴리네시안 언어는 단지 3개의 모음--a, i, u--만을 가지고 있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각기 채택한 표기방식의 음운론적 차이는 어휘들의 발음을 빠른 속도로 이질화 시켰을 것이다.
일본어 표기의 발성의 빈곤성은 (대부분의 어휘에서 나타나는) 모음의 발음을 빠른 속도로 변화시킬 수 밖에 없다.
현대 일본말은 1,600여 년 전의 야마도 사람들이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완벽한 음운(音韻)이론에 입각해서 한글이 창제된 반면, 일본은 비과학적으로 한자를 차용한 가나(假名)를 가지고 계속해서 음절을 지나치게 단순화 시켜 표기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경우에 그 어원을 쉽사리 추적하지 못할 정도로) 어휘의 상이성이 두드러지게 되었을 것이다.

야요이 시대의 원 일본어는 한반도 남부의 신라-가야 방언에 가까웠으나, 고분 시대 일본어는 부여-고구려-백제 방언에 가깝게 되었다. “야마도인”의 언어는 현대 일본어의 조상이 되었던 것이다. 현대 한국어는 본래 신라 방언인 중세 한국말에서 나온 것이다. 방언은 초기의 언어에서 파생되어 변형된 것으로 정의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언어에는 엄청난 음운적, 의미적(語義的) 변화가 발생하며, 언어들은 빠른 속도로 서로 알아들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문법이라는 것은 아주 완만한 속도로 변화를 하기 때문에, 문법의 연구를 통해 고대의 언어학적인 연관관계를 구명할 수 있다.

(낱말) 어휘론이나 (소리) 음운론적으로는 아니지만, (글의 짜임) 구문론적으로나, (낱말의 생김) 형태론적으로 보면, 현대 한국말과 현대 일본어는 지구상의 다른 어떤 언어와 보다 도 유사하며, 어휘-대-어휘 그대로 번역이 가능하다.

만약 신라 말과 부여-고구려-백제 말이 완전히 달랐다면, 이런 현상은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국열도 사람들은 처음 선사시대에 미지의 원주민 언어로부터 켈트 언어로의 전환을 경험했고, 유사(有史)시대 초기에 다시 켈트어에서 게르만어로 언어적 전환을 경험했다.
앵글로-색슨 영어는 유사시대에 일어난 로맨스 언어의 정복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다.

노어만 족(프랑스화한 대니쉬 바이킹)이 앵글로-색슨의 영국을 정복한 것과는 달리, 원 일본어를 사용하는 원 일본인을 정복한 것은, 똑같은 알타이계통 언어를 사용하는 백제 사람들이었다.
그 결과는 로맨스 언어의 맹공격을 받고 살아남은 게르만계통 언어의 경우와 매우 달랐다.
일본열도의 언어 무대에 등장한 것은 동일한 알타이계통 언어 형태의 새로운 물결이었다.
알타이 원 일본어 위에 새로운 알타이 언어 층이 다시 한번 덮어 씌어진 것이다.

(알타이계통 언어라는 표현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은 “알타이”란 표현을 “퉁구스”로 바꾸어도 된다.) 이 사실은 현대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 사이에서, 현대 영어와 현대 독일어 사이에서 볼 수 없는, 어휘-대-어휘 그대로 번역이 가능한 현상을 설명해준다일본인은 한반도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이주 물결을 흡수한 후에야 비로서 오늘날의 신체적, 언어적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일찍이 일본 열도로 건너간 범 퉁구스 언어의 초기 분파(신라-가야 변종의 남퉁구스 언어)는 죠오몽 원주민 언어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후 범 퉁구스 언어의 후기 분파(부여-고구려-백제 변종의 북퉁구스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정복으로 야요이-고분 언어적 전환을 겪은 이후에야 비로서 현대 일본어로의 본격적 진화과정에 진입하게 되었다.

반면,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고구려-백제-가야를 정복하여, 신라 변종의 남퉁구스어가 언어적 통일을 이룩하고, 현대 한국어로의 본격적 진화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현대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 사이에는 많은 어휘적, 음운적인 차이가 발견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와 같은 언어적 방황을 겪은 이 두 언어가 아직도 어휘-대-어휘 번역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기적이라 말할 수 있다<국문판 부록> 터어키어, 몽골어, 만주어 등을 포함하는 알타이 계통 언어들은, 아득한 옛날에 한 개의 공통 조어(祖語)로부터 분리되어 서로 다르게 변화를 해 온, 친족관계의 언어들이라고 믿어진다.
알타이 어족 사이에는 아주 두드러진 구조적 공통점이 존재한다.

가장 중요한 공통 특징을 들라면, 모음조화와 문법적 교착성(膠着性)이다. 즉, 한 단어 안의 모음이 동화 현상을 보인다.
또 모든 단어의 파생과 되틀림은 각기 단일 기능을 가진 접미사에 의하여 규칙적으로 이루어진다.
알타이 조어에서는 모든 문장이 동명사를 포함한 명사들로만 이루어 졌을 것으로 믿어진다.
인도-유러피안 어족에서는 모음 교체나, 자음 교체가 문법적 기능을 가진다.

인도-유러피안 어족에서는 보통 두 개의 동사가 접속사로 연결되지만, 알타이 어족에서는 (관계대명사라는 것도 없고) 앞선 동사가 (예컨대 “먹으러”같이 “러”를 붙여서) 부동사형을 취하며 뒤에 오는 동사와 연결이 된다.

이기문 (1972: 12-15, 21) 참조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가서 논농사를 지으며 야요이 시대를 전개한 (변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어휘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반도(변한 땅)에 남아서 계속 살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어휘와 상당수 일치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열도의 종족 구성과 (종족간의 충돌과 혼혈을 수반하는) 거주지 이동 측면을 살펴보더라도,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이 구사하는 어휘와 음운(音韻)규칙은, 당연히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사람들이 사용하던 어휘와 음운체계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음운이라는 것은 소리를 내고, 또 그 소리를 낼 때 울림을 만드는 것이다.즉, 언어의 외형을 구성하는, 높고 낮은 목소리와 억양-울림 등을 배합하는 현상이다.) 4세기 말, 백제 사람들이 야마도 지역으로 건너 왔을 때, 통역이 있어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백제 땅 자체에서도, 부여-고구려 계통의 백제 지배층은 왕을 “어라하”라 불렀고, 토착 마한 피지배층은 왕을 “건길지”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 의사소통을 위해 통역이 필요했다는 기록은 한군데도 없다 국립 국어연구원이 펴낸 표준 국어대사전에 실린 현대 한국어 단어는 30여 만 개나 된다.

하지만, 지구상의 어떤 사람이라도 사용빈도 상위 1,000개의 단어를 아는 것만으로 한국어의 75%를 이해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金興圭, 姜汎模 (2000) 참조.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의 대화가 드물고, 단순한 일상생활이 대화의 주 내용이라면, 사람들은 그저 1천 개 미만의 기초 단어(특히 명사와 동명사)만으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을 하며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동일한 문법 형태를 공유하는 어느 두 지역의 사람들이, 그 1천여 개 내외의 기초 단어 중, 절반 정도만이라도 같은 단어들을 사용한다면, 서로 만나 의사소통을 하는데 아주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표정의 변화와 손짓 발짓으로 나머지 절반 정도의 의사소통은 언제나 가능할 것이다.

4세기 말 이후, 백제 사람들이 야마도 왕국을 세우고, 일본어가 한국어의 문장구조를 포함한 전반적인 문법체계를 좀더 조직적으로 완전하게 수용을 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계통의 어휘들을 대량으로 빌려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문법이라는 것은 아주 보수적이기 때문에 “차용”현상이 거의 없다.
야마토 왕국 지배계급의 공식 언어는 고구려-백제계 한국어이었을 것이다.
고구려어의 미에(水), 나(國), 탄(谷)과 나머르(鉛)는 각각 고대 일본어의 “미두,” “나,” “타니”와 “나마리”이다.

백제어의 고마(熊)와 키(城)는 고대 일본어의 “쿠마”와 “키”이다.
고대 일본어의 “나”가 1인칭 혹은 2인칭 대명사로 쓰였는데, 이것은 한국어의 “나” 혹은 “너”에 비교될 수 있다.
고대 일본어의 시마(島), 나타(?), 파타(田), 와타(海) 등은 각각 고대 한국어의 셤, 낟(鎌), 밭, 바닿 등에 해당한다.

이기문 (1972: 23, 25, 34-38) 참조. 일본후기(日本後紀)에 의하면, 812년?? 신라선 한 척이 대마도에 정박을 했고, 그 배에는 10여 명이 타고 있었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言語不通) 무슨 사정인지 알기가 힘이 들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해적선(賊船)인 것 같아, 야마도 조정에서는 사건의 진상을 캐기 위해, 신라어 통역(新羅譯語)을 뽑아 보냈다 한다.
815년에는 아예 대마도에 신라 말 통역을 두었다(置新羅譯語)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들을 보면, 아무리 늦게 잡아도 9세기 초에 들어 와서는 한반도 사람과 일본열도 사람이 서로의 말을 못 알아듣게 된 것 같다.드디어 통역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풍속언어”가 익숙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언어가 불통”인 것이다.

잉글랜드의 경우를 보자. 기원전 2-3세기경에 켈트족이 몰려오고, 기원 전후로 로오만의 침공을 받아 그 식민지가 되고, 5세기말에 앵글-쌕슨 족에게 점령을 당하고, 11세기에 노어만 프렌취에게 정복을 당하고, 스캔디내비안 바이킹들은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와 약탈을 하고 ... 잉글리쉬 단어들을 보면, 대충 스캔디내비안 계통, 져어만 계통, 프렌취 계통, 이탤리안 라틴 계통 단어들이 뒤섞여 있다.
오히려 고대 져어먼 어휘에 그 근원을 추적 할 수 있는 단어들의 수가 (상대적으로) 별로 많지가 않다.
물론 크게 보면 이들 모두가 다 인도-유로피안 계통의 단어들이지만, 좀더 분류를 해 본다면 북부 져어머닉 계통과 남부 로맨스 계통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고대 라틴어가 프렌취, 스패니쉬, 포오츄기이스, 이탤리안으로 나뉘면서 로맨스 언어를 구성한다.) 그런데 잉글리쉬의 문법체계의 본질은, 아주 단순하게 변형된 져어먼 문법이다.
정복자의 노어만 프렌취가 공용어로 사용된 300여 년 간, 잉글리쉬는 무식한 앵글로-쌕슨 농민들만 주로 사용을 했기 때문에, 그 복잡한 져어먼 문법체계가 아주 무식하게 단순화 된 것 같다.

현대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의 문장구조(語順)가 거의 똑 같은데 비해, 현대 져어먼과 현대 앵글로-쌕슨 잉글리쉬의 문장구조는 상당히 차이가 난다.

아마도 그 이유는, 야요이 일본열도에 정착한 한반도 변한(가야) 사람들을 4세기 말에 정복한 것이 바로 한반도의 백제 사람들인데 비해, 5세기에 잉글랜드에 정착한 앵글로-쌕슨 져어먼 족을 11세기에 정복한 것이, 당시의 져어먼 족이 아니라, 로맨스 계통의 언어를 구사하는 노어만 프렌취 이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정복자 윌리엄이 당시의 져어먼 이었다면, 현대 져어먼과 현대 앵글로-쌕슨 잉글리쉬의 문장구조가 똑같았을 것이다.
1066년에 영국을 정복한 노어만들은, 1204년 ?? 왕 때 이르러, 자신들의 본거지인 노어만디를 파리의 필립 왕에게 빼앗기었다.

1236년에 헨리 왕이 프랑스 왕실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된 시기를 전후로, 새삼 프랑스어의 영향이 일시적으로 커졌으나, 결국은 백년전쟁(1337-1453년)이 시작되기도 전에 프랑스와의 적대관계가 심화되었다.
중세 프랑스어는 4개의 주요 방언이 있었다.
즉, 중부의 파리 프렌취, 동부의 버어건디 프렌취, 북동부의 피카아드 프렌취, 그리고 노어만 프렌취 등이었다.
13세기경, 파리에 본거지를 둔 프랑스가 강대해지자, 중부의 파리 프렌취가 지배적인 언어가 되었다.
(한반도의 서라벌 말과 이탤리안 반도의 Latium 말이 지배적인 언어로 바뀌는 과정에 비교 해 볼 수 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어휘나 억양에서, 잉글리쉬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노어만 프렌취는, 프랑스 땅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을 수가 없었다.
부끄럽게 생각한 일부 노어만 귀족들은, 촌사람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 자식들을 파리에 보내 “표준” 프렌취를 배우게 했다.

노어만디의 본거지를 완전히 상실한 후, 자신들의 운명을 잉글랜드와 함께 할 수밖에 없게 된 노어만 정복자들은 잉글리쉬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급기야 잉글리쉬가 1362년 경에 공용어가 되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쵸오서(1340?- 1400년)와 쉐익스피어(1564-1616년) 등이 나타나서, 이미 다양한 어휘를 구사하는 잉글리쉬의 품격을 한층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5세기부터 11세기 전반까지 사용되었던 잉글리쉬를, 쵸오서 이후, 혹은 쉐익스피어 이후의 잉글리쉬와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스캔디내비안 바이킹, 져어먼, 프렌취, 이탤리안 라틴 등 다양한 문화의 풍부한 어휘가, 단순화된 문법체계와 어울려 영문학의 황금시대를 가져오고, 급기야 21세기 전 인류의 공통어로서의 역할을 논하게까지 되었다.
고대 한국어는 4가지의 주요 방언이 있었던 것 같다.
즉, 경북 지방의 신라 방언, 경남 지방의 가야 방언, 북한 지방의 고구려 방언, 그리고 경기-충청-호남 지방의 백제 방언이다.
하지만 후자는 경기-충청의 초기 백제 방언과 호남 지방의 마한 방언으로 세분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7세기 후반, 한반도는 신라에 의해 통일이 되었고, 고대 신라 방언이 현대 한국어의 근간이 되었다.

B.C. 300년 경부터 변한(가야)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가지고 온 어휘들 자체도, 일본 땅에서 야요이 600년 간 논농사를 지으면서 상당한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상당수의 아이누, 말라요-폴리네시안 단어들이 차용되고, 음운규칙과 억양에도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 사람들이 4세기 후반에 야마도 땅에 건너 왔을 때, 통역이 필요했다는 기록은 그 어느 한곳에도 없다.
그래도 야마도 왕국의 초기 단계인 5세기 중반 경, 이미 신라 사람들이 소위 “풍속 언어”에 미숙하여 봉변을 당할 정도로, 양쪽 어휘와 억양에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백제 멸망으로부터 150여 년이 지난 9세기 초, 특히 농민출신의 사무라이들이 지배계급으로 전환되기 시작하는 10-11세기 무렵,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사는 사람들이 구사하는 어휘들은 이미 통역이 없이는 전혀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다시 1천여 년이 경과한 21세기에 어떻게 될 것인가는, 현재 우리가 보는바 그대로이다.

어느 사회가 특정 시점에서, 주어진 어휘와 음운체계를 가지고 출발을 해도, 세월이 천년, 2천년 흐르고, 생활환경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면, 음운체계와 어휘도 조직적으로 변화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애당초 사용하던 어휘들의 본래의 형체와 사용법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현대 한국어가 사용하는 어휘들을 5세기 전후에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어휘들과 비교를 해 본다면, 그 자체로도 엄청난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아예 한자로 대체되어 사라져버린 순수 한국말 어휘들도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대 일본어가 사용하는 어휘들을 5세기 전후에 일본열도에 살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어휘들과 비교를 해 본다면, 그 역시 엄청난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신라어 자료의 핵심이며, 남아있는 신라 문학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향가(鄕歌)는, 삼국유사에 14개, 균여전에 11개가 실려 있다.향찰(鄕札)로 표기된 이 향가들은, 한자를 이용해서 자기 말을 표기해 보려는 노력의 집대성인 것이다.
하지만 한국어 음절은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야 제대로 표기할 수 있기 때문에, 한자를 가지고 그저 비슷하게 흉내를 내보려 해도, 그 표기 방법이 아주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요즘 아무도 아주 자신 있게 향가 내용을 현대 한국말로 번역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음절구조를 비교적 단순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일본의 경우도, 고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시나 노래뿐만 아니라, 759년 이전의 장가, 단가를 모아놓은 만요오슈우(萬葉集) 역시, 아무도 자신 있게 번역을 하지 못한다.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모두 똑같은 단어들을 가지고 출발을 해도, 세월이 천년, 2천년 지나면, 엄청나게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하물며 한 쪽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차용어휘를 가지고 출발을 했다면, 더욱 큰 상이점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구문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현대 한국말과 현대 일본말의 문장구조(語順)는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
그 외의 일반적인 문법형태도 동일한 계통에 속한다.

고대 일본어에는 모음조화도 있었다.
아마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언어의 사이도, 이들보다 더 유사할 수가 없을 것이다.
현대 한국어는 신라 방언을 근간으로 형성된 중세 국어가 진화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신라계 “한국어” 이건, 부여-고구려-백제계의 “일본어” 이건, 일반적인 문법체계는 필연적으로 모두 나름대로의 상이한 역사적 발전 환경을 반영하면서, 각자 독특한 “간소화” 과정을 밟아 왔다.
그런데도 문장 구조(語順)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변함없이 양쪽이 완벽하게 일치한 상태를 2천여 년 가까이 지속했다.
즉, 양쪽의 문장구조에 변화가 있었다면, 아주 똑같은 방식의 변화만 있었다는 얘기다.

현대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의 문장구조(語順)가 21세기라는 현재 시점에서도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은, 언어학적으로 보아, 기적에 가까운 현상인 것 같다.
반면, 현대 잉글리쉬와 현대 져어먼의 문장 구조는 상이한 점이 적지 않다.

앵글로-쌕슨 잉글랜드가 져어먼이 아니라 노어만 프렌취에 의해 정복 된데 반해, 야요이 일본열도는 백제인들에 의해 정복되었다는 사실에서 그 설명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2-13 (2005. 7. 2.)정리: 강현사 박사[각주]1. Kazumichi (2001: 24)는 “현대 일본인의 골격형태는 이미 고분시대에 형성이 되어있었다.
고분시대이후에는 일본인의 유전자 구조에 큰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Unger(2001)는 原(원)한국-일본어를 초기 남부 퉁구스어로 정의하고, 이로부터 진한-변한 방언과 야요이 일본 방언이 분리된다고 말한다.
Unger는 야요이 시대의 원 한국-일본어(진한-변한어)는 범(凡)퉁구스어로부터 아주 이른 시기에 떨어져 나온 것이기 때문에, 고분시대 초기에 이르면, 범 퉁구스어로부터 뒤늦게 떨어져 나온 부여-고구려-백제 언어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믿는다.
어쩐 셈인지 Unger는 가야-신라(변한-진한) 사람들만을 “한국인”으로 정의를 하고, 고구려-백제인은 (부여) 퉁구스인으로 정의한다.

한국인을 한반도 남부의 삼한 사람들로 한정시키려는 일본 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때문인 것 같다.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高句麗傳 . . . 東夷舊語以爲夫餘別種 言語諸事多與夫餘同 . . . ?婁傳 ?婁古肅愼之國也 . . . 其人形似夫餘言語不與夫餘句麗同 梁書 列傳 諸夷 百濟 . . . 今言語服章略與高麗同 4. Miller (1979)와 Levin (1981) 참조. Unger (2001)의 참고문헌들도 참조. Levin (1976)은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 학자들이 일본어를 한국어의 지류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언어학자들에 의하면, 어떤 어휘는 아주 느린 속도로 변하기 때문에 언어학자들로 하여금 오래된 과거의 계통적 근친관계를 식별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천년 이상을 떨어져서 제각기 진화를 하게 되면, 쉽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유사한 형태의 어휘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4개의 고구려 수사, 三(密), 五(于次), 七(難隱), 十(德) 등이 현대 일본어의 해당 수사들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매우 놀랄 일이다.
대한해협 건너 일본열도에서는 이 4개의 수사가 전혀 변화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비대칭적인 변화 속도 때문에 오늘날의 한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조가 사용했던 어휘들을 알아들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Levin(1976)은 “일본말은 고구려 말에 상당히 가까웠을 것이며, 그 핵심은 부여 어군(語群)에 속했거나, 최소한 부여어에 상당히 가까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이누 말에는 호카이도, 사할린, 쿠릴 등 세가지 주요 방언이 있는데, 상호간 소통이 안 된다.
Hudson (1999: 99) 참조. (제주도 방언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한반도 내 방언들 중 상호간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된 경우를 기록한 사례는 전혀 없다.

允恭 四十二年 天皇崩 於是 新羅王聞天皇旣崩…遂參會於殯宮也 冬十一月 新羅弔使等 喪禮旣?而還之 爰新羅人恒愛京城傍耳成山畝傍山 則到琴引坂顧之曰 宇泥?巴椰彌彌巴椰 是未習風俗之言語 故訛畝傍山謂宇泥? 訛耳成山謂彌彌耳 (NI:449)8. Crossley(1997: 37)는 “한글은 (음운론에 충실한) 진정한 의미의 표음문자이며, 적은 수의 추상적 기호를 사용하여 한국말의 발음을 표기한다.
한글이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창적인 표음문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지만, 실제로 한글은 서아시아 셈족의 시리아 문자에서 나온 위구르 문자를 원형으로 하는 거란의 표기법을 본떠서 만든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4만여 개의 한자는 단지 427개의 소리만을 낼 수 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거의 노래를 부르는 듯한 4성을 사용해야만 한다. 평균적으로 23개의 문자가 똑같은 음을 낸다.
음운학자들에게 악몽과 같은 영어는 애당초 음절과 발성 사이에 1:1 대응관계 자체를 거론할 처지가 아니다.
Park (1995) 참조.10. 그러므로 부여 말, 고구려 말, 백제 말, 가야 말과 신라 말을 포함하는 모든 한국어와 옛 일본어 사이에 상당히 밀접한 근친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국어의 양대 방언을 구성하는) 신라-가야 말과 부여-고구려-백제 말 뿐만 아니라, 야요이-고분 시대의 일본어도 모두 공통의 (알타이) 어족인 범 퉁구스 언어의 분파로 간주될 수 있다.

구문론적으로, 또 형태론적으로 볼 때, 한국어와 일본어의 동질성은 크게 강화되었다.
그러나 어휘적, 어의적, 음운론적 차이가 커짐에 따라 한반도 사람들과 일본열도 사람들은 급기야 통역이 없이는 의사소통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문법이 거의 변하지 않는다 해도, 음운-어의(語義) 상의 변화는 빠른 속도로 의사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단 몇 세기 동안만 이라도 서로 떨어져 있게 되면, 헤어지기 이전의 말을 하는 사람과 의사소통이 안될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한반도에서 백제가 멸망한지 18년 밖에 지나지 않은 681년에 신라로부터 일본으로 야마도 말을 익히기 위해 (習言者) 세 사람이 왔다는 기록이 있다.

속일본기에 의하면, 740년에 신라에서 말을 배우기 위해 (新羅學語) 한 사람이 왔으며, 760년에는 신라 조정이 “야마도 조정에서 사용하는 풍속 언어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無知聖朝風俗言語者)” 말을 배우라고 (學語) 두 사람을 보냈다.

일본고기의 812년 기록은, 통역이 없이는 신라 사람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늦어도 9세기 초에 이르면 한반도 사람과 일본 열도의 사람은 통역이 없이 서로 직접적인 대화를 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언어상의 문제가 생기면 그 상황이 공식적으로 기록 된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원 일본어는 일본열도의 모든 방언이 파생되어 나온 공통언어로 정의된다.
후에, 교토 방언으로 대표되는 야마도 지역의 말이 일본 사회에서 가장 권위가 높았기 때문에 일본열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야요이 방언의 흔적은 큐슈와 동북지역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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