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야 할 군인들은 또 있다
기억해야 할 군인들은 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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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이 곧 천만 관객을 달성할 것 같다. 모든 걸 떠나서 일단 재미있는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내 앞에서 퇴장하던 20대 커플 중 남자가 불평하는 걸 들었다. “어우 팝콘 반도 못 먹었어.” 집에 가져가긴 뭐하고 버려야 하니 아까웠을 게다. 하지만 행복한 불평이었으리라. 그 팝콘을 집어먹을 짬을 영화에 빼앗겨 버린 셈이니 얼마나 몰입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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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우리는 몇 명의 용감한 군인들을 본다. 뭘 해도 빛나는 얼굴의 이태신(실제 인물 장태완), 공수특전사령관 공수혁(실제인물 정병주) 헌병감 김준엽 (실제 인물 김진기)을 비록해 특전사령관을 지키기 위해 반란군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산화한 오진호 (실제인물 김오랑) 그리고 서슬푸른 반란군 앞에서 총을 빼앗기지 않겠노라 버티다가 전사한 정선엽(실제인물) 병장 등등. 그런데 그 다급했던 날, 그리고 전두환의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기까지의 과정에서 그들만큼 용감하지는 못했다 해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들은 또 있다. 그들의 사연을 한 번 짚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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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훈 장군, 그는 12.12 당시 군수참모부장으로 육본에 모였던 장군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유부단한 장군들과 정신 나간 듯한 국방장관에게 분통을 터뜨린 수경사령관 장태완이었지만 그의 회고록에서 육본의 그 희미한 별들 가운데 단 한 명의 분노를 증언하고 있다. “이번 쿠데타가 아무리 세밀하게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 진압이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국민의 군대요 군인의 사명에 따라야 하는 우리 고급 장성들이 우리만 살겠다고 손을 들자는 거요?”(시사저널 2006.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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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사는 우리가 아다시피 참담한 쪽으로 흘러 12.12 사태는 전두환 일파의 승리로 판가름났다. 장태완 정병주 등은 곤욕을 치렀지만 전두환 쪽도 그들이 좋아하는 ‘싹쓸이’는 원치 않았던 것 같다. 엄연히 군 내부에서도 견제 내지는 존중해야 할 이들이 많았으므로. 그래서인지 군수참모부장 안종훈은 별 셋, 군수사령관으로 승진한다. 그리고 또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를 지지하고 최규하 정부를 압박하는 전군지휘관 회의에 참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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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전두환 ‘소장’과 그 따라지들이 분위기를 주도하는 상황이었다. 이른바 ‘대세’라고나 할까. 12.12를 겪은 장군들이고 누가 힘을 쥐고 있는지, 그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안다. 12.12 때에는 반란군 진압하자는 사람이라도 있었지만 전군 지휘관 회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일방적이었다. “제2의 월남을 막자”느니, “무법천지이니 불길을 잡아야 한다.”느니. 하지만 여기서도 안종훈 군수사령관은 삐딱한 의견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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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이 직접 개입한다는 것은 중요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3천7백만 명 모두 똑같이 생각할 수 없습니다......군이 개입하는 것은 마지막입니다. (국민) 전체 여론이 그렇게 하기를 원할 때 국민합의에 의해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안종훈 군수사령관은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의 눈을 일제히 치켜뜨게 할 만한 한 마디로 말을 맺는다. “회의는 그 대책을 마련하는 방식에 있어서 미리 결정해놓고 하면 의의가 없습니다." 요즘 말로하면 ”‘답정너’를 외치면서 무슨 회의를 하고 자빠졌냐.“가 되겠다. 이 안종훈 장군의 말을 다급하게 받아친 사람이 하나회 출신 특전사령관 정호용이었다. ”국민이 원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그렇게 표현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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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도 없고 짬밥도 없는, 별 두 개 전두환 앞에 별 서너개들이 꿇어 엎드리는 그 자리에서 안종훈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결국은 비상계엄 확대 서명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두고두고 그 일을 아쉬워했다. ”서너 명만 동의해 줬어도 분위기가 바뀔 수 있었는데.“ 하지만 그 서너 명이 없었다. 결국 안종훈도 더 이상의 용기를 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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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5.17 비상 계엄 확대가 선포됐다. 이 군대의 움직임을 당시의 운동 세력들이라고 해서 모르지 않았다. 서울역 ‘회군’도 사실 계엄의 빌미를 주지 말자는 명분이었고, 계엄이 떨어지면 어디어디 모여 투쟁을 이어가자는 결의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저항이 벌어진 것은 광주 뿐이었다.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사람 머리 몇 개 터뜨리고 대검으로 좀 쑤셔 주고 군홧발로 짓이겨주면 사람들이 어마 뜨거라 도망갈 줄 알았다. 그러나 광주는 그렇지 않았다. 광주항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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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는 광분했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한영구’라는 극중 이름으로 배우 안내상이 연기하는 장군이 있다. 실명은 황영시. 12.12 당시 1군단장이었고 전두환 쪽에 붙었던 놈이다. 이 황영시가 하시라도 빨리 밟아 버릴 것을 채근했다. 당시 기갑학교장 이구호 준장에게 전화를 건 황영시는 이렇게 말한다. ”탱크를 동원하여 시위 군중들에게 발포하여 광주 시내를 장악하면 되지 않느냐.” 탱크로 시민들을 밀어붙이고 기관총을 난사하고 포를 갈겨 버리라는 주문이었다. 시민군이 무장했대야 카빈이나 M16 정도일 테니 탱크를 앞세우면 안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건 전쟁 중일 때 이야기가 아닌가. 이구호 준장은 황영시 중장에게 격렬하게 반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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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시민이 적군이 아닌데 어떻게 시민들한테 (탱크를) 발포한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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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이 이구호 준장
당시 참모차장이었던 황영시는 포기하지 않는다. 탱크 1개 대대 32대를 도청 ‘탈환’에 투입하라고 고함을 친 것이다. 그러자 이구호 준장은 명령을 하려면 정식 계통을 밟아 명령하라고 대꾸했고 다시 전차포 이야기를 하며 발광하자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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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호 준장의 용기도 거기까지였다. 말을 듣지 않는 군인들 말고도 실세 전두환 장군의 명이라면 빤스줄이라도 잡고 싶어하는 군인들이 너무 많았다. 그들은 결국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었고, 끝까지 저항하는 시민들을 살해하고 그 피비린내 위에 5공화국의 팡파르를 울렸다. 이구호 준장은 얼마 후 예편됐다. 어디 끌려가서 곤욕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그도 각오를 했으리라. 어차피 더 이상 군생활은 어려우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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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1980년 5월 21일경이었고 5월 23일에는 참모총장 주재 아래 대책회의가 열렸다. 안건은 ‘전남지역 폭도소탕계획’ 회의가 끝난 뒤 육군참모총장은 한 장군의 개별면담 신청을 받는다. 군수참모부 박춘식 보급운영처장이었다. “폭도와 시민 격리 후 공격”을 주장하던 그는 육군참모총장에게 이렇게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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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식 장군의 항변을 담은 보안사 내부 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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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광주에 가서 시민들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현역 장군이 가서 군이 무력 공격을 하면‘폭도’들이 이길 수도 없고 광주도 피바다가 될 텐데 그걸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고향 사람으로서 여기 왔다고 설득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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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출신이었던 모양이다. 창군 이래, 특히 박정희 집권 이후에는 노골적인 차별을 받았고, 참모총장을 그 후로도 십수년 동안 한 번도 배출하지 못한 호남 출신 장성이었던 것 같다. 전두환 일파의 살기를 그라서 몰랐을까. 광주를 그냥 두면 자신들이 무너질 수 있다고 어금니 갈아붙이고 발톱 세운 그 악귀들의 기세를 그가 눈치채지 못했을까. 하지만 그는 그렇게 애타게 부르짖었다. “고향 사람으로서 제발 이러면 안된다고 설득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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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총장이 난처한 나머지 “(장군이 그럴 거까지 있느냐) 밑에 영관 장교 없어요?”라고 얼버무리자 박춘식은 두 손을 모은다. “제가 장군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 하나 죽어 유혈사태 없이 평온을 찾는다면 그 이상의 영광이 없겠습니다.” 당연히 그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도 그 이상의 저항은 하지 못했고 용기를 내지 못했다. 고향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바라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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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싶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위인이 되기는 어렵다. 역사에 남을 만큼 용기를 내고 지혜를 발휘하고 결기를 뽐낼 가능성은 정알로 적다. 나는 그것도 팔자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있다. 하지만 소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만고만한 환경에서 올망졸망한 삶을 살아가고, 삐죽삐죽 내밀다가 다시 의기소침하고 가물에 콩 나듯 “이건 정말 아니잖습니까.” 항변을 하기도 한다. 물론 무자비한 폭력과 거대한 압박에 깨갱할 수 있고, 그것으로 ‘그칠’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작은 저항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억해야 한다. 그만한 용기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찌 큰 용기를 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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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얼치기가, 백면서생이, 소시민이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일 수도 있다. 그때 별 것도 아닌 나같은 인간들이 옆에서 옳소 옳소! 맞아 그러면 안되잖아요. 우리 이러지 맙시다. “서너 명만 동의한다면"(안종훈 장군 왈) 역사를 바꾸는 모멘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안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래도 움직이지 않는 것보다는, 말하지 않는 것보다는 반대의 쪽이 훨씬 우리 미래에 이로울 것이다. 안종훈, 이구호, 박춘식. 용맹하지는 못했으되 어려운 용기를 냈던 군인들도 기억하자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