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booksteem]거시적 시선으로 인간 이해하기 8/26 유럽이 앞서간 이유
농지로 개간된 것으로 판단하건대 숲을 개간해서 밭을 만들었다. 초기 패총에서 먼 바다의 돌고래와 참치 뼈가 대량으로 발굴된 것에서는 알 피토니아와 엘라에오카르푸스와 같은 큰 나무를 베어 커다란 카누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로헤벤이 보았던 작고 약한 배는 먼 바다까지 나가 작살로 돌고래나 참치를 잡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또한 석상을 운반하고 세우는 데 필요한 목재와 밧줄을 만들기 위해서 도 많은 나무가 베어졌을 것이다. 그밖에도 많은 이유로 나무가 하염없 이 베어졌을 것이다. 게다가 밀항자인 쥐들도 나름의 이유로 야자나무 와 다른 나무들을 '이용' 했다. 발굴된 야자나무 열매들에서 예외 없이 쥐가 갉은 듯한 잇자국이 남아 있다. 그래서 땅에 떨어져서도 발아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이 도래한 직후, 즉 900년경부터 삼림이 파괴되기 시작해서, 로 혜벤이 상륙한 1722년에는 완전히 끝난 것으로 판단된다. 로헤벤이 3미터가 넘는 나무를 볼 수 없었다니 말이다. 그런데 900년과 1722년 사이에 언제 삼림이 파괴되었는지 더 정확히 밝힐 수는 없을까? 적어 도 다섯 가지 증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방사성 탄소법 으로 측정한 야자나무 열매들 대부분은 1,500년 이전의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그 이후에는 야자나무가 크게 줄어들었거나 멸종했다는 뜻이 다. 이스터 섬에서 가장 척박한 땅이므로 십중팔구 가장 먼저 삼림 파 괴가 시작되었을 포이케 반도에서는 야자나무가 1400년경에 자취를 감 추었다. 개간에 따른 숯은 1440년경에 사라졌지만 그 후에도 사람이 살 면서 농사를 지었다는 흔적은 남아 있다. 오를리아크가 아궁이와 쓰레 기 구덩이에서 채취한 숯을 방사성 탄소법으로 측정한 결과에 따르면, 1640년 이후로는 연료로 나무 대신에 풀이 사용된 듯하다. 이런 현상은 최후까지 나무를 연료로 사용했을 지배계급의 집에서도 예외가 아니었 다. 플렌리는 화분 분석을 통해서 900년부터 1300년 사이에 야자나무. 데이지, 토로미로, 관목 등의 화분이 사라지면서 풀의 화분이 나타난다 152 문명의 붕괴
[OFF] 산데이 사용 신의 고 주장했다. 그러나 퇴적물에 방사성 탄소 측정법을 적용한 결과에 따 르면 야자나무와 그 열매를 직접 측정한 결과보다 삼림 파괴가 더 나중 이다. 끝으로 크리스 스티븐슨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고지대의 플랜테 이션은 1400년대 초부터 160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개발되었고, 이 시 기는 석상을 운반하고 세우기 위해 나무와 밧줄이 가장 많이 필요했던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듯하다. 이런 모든 증거로 판단하건대 인간이 이 스터 섬에 정착하고 곧바로 삼림 벌채가 시작되었고, 1400년경에 최고 조에 이르렀으며,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었지만 1400년대 초부터 1600년 대 사이에 거의 끝난 듯하다. 사회에 미친 결과 이스터 섬은 삼림 파괴의 결과를 보여주는 태평양 지역에서, 아니 세 계 전체에서 가장 극단적인 예이다. 삼림 전체가 사라졌고, 모든 수종 이 멸종되었다. 그 결과는 곧바로 섬사람들에게 미쳤다. 천연자원이 턱 없이 부족했고, 살코기를 제공하던 야생 동물까지 크게 줄어들었으며, 식량 생산까지 곤두박질쳤다. 천연자원의 감소로 나무와 새에서 얻던 것, 예컨대 목재와 밧줄, 천 을 만들던 나무껍질, 깃털까지 사라지거나 크게 줄었다. 큰 나무와 밧 줄이 사라지면서 석상을 운반해서 세울 수도 없었다. 바다로 나갈 카누 조차 만들 수 없었다. 1838년 이스터 해안에 닻을 내린 프랑스 선박을 향해 작은 체구의 두 남자가 노를 젓는 카누 다섯 척이 다가왔다. 그때 프랑스 선박의 선장은 "모든 원주민이 툭하면 '미루(miru)' 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우리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그들은 초조한 빛을 띠었 다. 그 말은 폴리네시아인들이 카누를 만들 때 사용하는 나무의 이름이 었다. 그들은 그 나무를 간절하게 원했다. 우리에게 그런 사정을 이해 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스터 섬에서 가 장 크고 가장 높은 산에 붙여진 '테레바카' 는 '카누를 얻는 곳' 이라는 2. 이스터 섬에 내린 땅거미 153
뜻이다. 플랜테이션으로 개발하려고 그 산에서 나무를 베어내기 전까 지 섬사람들은 그 산에서 카누를 만들 나무를 구했다. 그 때문에 지금 도 그 산에는 돌 천공기, 긁개, 칼, 끌 등 나무를 베고 카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연장들이 흩어져 있다. 큰 나무가 부족했다는 것은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 섭씨 10도까지 떨어지는 겨울밤에 집을 난방할 땔감조차 없었다는 뜻이다. 그 때문에 1650년 이후, 이스터 섬 사람들은 풀과 사 탕수수 등 곡물의 쓰레기를 땔감으로 사용해야 할 처지였다. 게다가 지 붕을 덮을 이엉과 집을 지을 나무, 연장용 나무, 천을 만들 껍질 등을 구하기 위해서 조금 남은 관목숲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심지어 장례 관습까지 바뀌었다. 시신 한 구를 태울 때마다 적잖은 나 무가 필요했던 화장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그때부터 시신을 바싹 말 려서 땅에 묻었다. 야생에서 얻던 식량 자원들도 대부분 사라졌다. 먼 바다로 나갈 카누 가 없었던 까닭에, 이스터 섬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에게 주된 영양원이 었던 돌고래의 뼈가 1500년경부터 패총에서 실질적으로 사라졌다. 참 치를 비롯한 난바다의 물고기 뼈도 없었다. 낚시 도구와 물고기 뼈가 쌓 인 패총의 수도 전반적으로 줄어들었다. 패총에서도 얕은 바다나 연안 에서 잡히는 물고기들의 뼈가 대부분이었다. 육지새는 완전히 사라졌 고 바닷새는 연안의 작은 바위섬으로 서식처를 이동했지만 그나마 3분 의 1밖에 남지 않았다. 야자나무 열매, 말레이 애플 등 야생 열매들도 식단에서 크게 줄었다. 갑각류의 소비도 크게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작은 중까지 먹어야 했다. 이런 와중에도 줄 지 않는 유일한 식량 자원은 쥐였다. 야생 식량 자원만이 급격히 감소한 것은 아니었다. 곡물의 생산량까 지 갖가지 이유로 떨어졌다. 삼림 파괴는 비와 바람으로 인한 토양 침 식을 부추겼다. 플렌리가 확인했듯이 토양에서 유출된 다량의 금속 이 온이 늪의 퇴적물로 스며든 것이 그 증거이다. 예컨대 포이케 반도의 발 154 문명의 붕괴
굴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곡물은 처음에 간헐적으로 서 있던 야자나 무들 사이에서 재배되었다. 커다란 야자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면서 따 가운 햇살과 증발, 바람과 빗물로부터 표토와 곡물을 지켜주었다. 하지 만 야자나무가 사라지면서 대대적인 침식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로 저 지대의 아후와 건물이 흙에 묻혀버리면서 포이케 지역의 밭은 1400년 경에 버려지고 말았다. 그 후 포이케에 풀이 자생적으로 돋아나면서 1500년경에 경작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한 세기 후에 다시 대대적 인 침식이 시작되면서 섬사람들은 그곳을 다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삼림 파괴로 인한 피해로 곡물 생산만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흙이 건조해지고 영양분이 빠져나갔다. 그러나 퇴비로 사용할 만한 나뭇잎, 열매, 작은 나뭇가지를 구할 길이 없었다. 삼림 파괴를 비롯해 인간이 환경에 미친 영향으로 나타난 직접적인 결과들이었다. 그 여파는 더 참혹했다. 기아로 시작해서 싸움이 빈발했 고 급기야는 카니발리즘(cannibalism, 식인 풍습: 옮긴이)으로 발전했다. 살아남은 섬사람들이 구전으로 전해준 기아의 참상은 '모아이 카바카 바(moai kavakava)' 라는 작은 석상의 확산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야 윈 뺨과 갈비뼈를 선명히 드러낸 굶주린 사람의 모습이다. 1774년 쿡 선장은 섬사람들을 '작고 마르고 겁 많고 초라한 사람들' 이라고 묘사 했다. 거의 모두가 모여 살았던 해안 저지대의 집터들도 전성기이던 1400~1600년에 비해 1700년대에는 70퍼센트가 줄었다. 인구도 줄었다 는 증거였다. 야생 동물이 사라지자, 섬사람들은 가까이 있지만 그때까 지 식량 자원으로 생각지도 않던 것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바로 인 간이었다! 인간의 유골이 무덤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후기의 쓰레기 더미에서도 발견된다. 골수를 빨아 먹으려던 것일까? 쪼개진 뼈까지 있다. 이스터 섬의 구전설화에서 카니발리즘은 빠지지 않는다. 적에게 모욕감을 주는 가장 심한 욕은 "네 엄마의 살을 내가 씹어 먹겠 다!"였다. 2. 이스터 섬에 내린 땅거미 155
이스터 섬의 족장들과 성직자들은 신과의 밀접한 관계를 주장하면 서, 풍성한 수확과 번영을 약속하면서 지배자로서의 위치를 정당화시 켰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안겨주려고 거대한 건축물을 세 우고 제식(祭式)을 집전하면서 그런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했다. 먹을 것 이 넘쳐흐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약속이 점점 공수표가 되면서 족장들과 성직자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1680년 경에는 '마타토아(matatoa)' 라는 군부 지도자들이 족창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다. 그리고 복잡하게 통합되었던 이스터 사회가 거듭된 내 란으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 전란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날카로운 흑요석 창('마타아' )이 얼마 전까지 이스터 섬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그 때부터 과거에는 지배계급에게만 허락되었던 해안 지역에 서민들도 작 은 집을 지었다. 안전을 위해서 많은 사람이 동굴을 거처로 삼았다. 동 굴을 파서 안쪽 공간을 넓혔고, 입구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부분적 으로 폐쇄해서 좁은 통로로 만들었다. 음식의 혼적, 뼈로 만든 바느질 용 바늘, 목공 연장, 타파 천을 수선하는 도구 등이 동굴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판단하건대 동굴은 일시적인 은신처가 아니라 일상적인 거처였 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스터 사회가 저물어가면서 낡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무너졌고, 족장의 권위와 더불어 종교적 전통까지 허물어졌다. 구전설화에 따르 면, 마지막 아후와 모아이가 세워진 것은 1620년경이었다. 가장 큰 석상 인 파로도 이때쯤 세워진 것 중 하나였다. 지배계급이 일정한 생산량을 징발해서 석상 제작에 투입된 사람들을 먹였던 고지대의 플랜테이션은 1600년부터 1680년 사이에 점차적으로 황폐화되었다. 그런데도 석상이 점점 커졌다는 것에서 상대를 압도하려는 족장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날로 심각해지는 환경의 위협을 조상의 힘으로 피해보려는 간절함이 읽혀진다. 일종의 쿠데타가 일어난 1680년경, 씨족들 간의 다툼은 더 큰 석상을 세우려는 경쟁에서 상대 씨족의 석상을 무너뜨리는 파괴로 변 156 문명의 붕괴
해갔다. 그 때문에 석상들이 돌판에 쓰러지면서 파괴되었다. 제4장과 제5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아나사지 문명과 마야 문명에서도 그랬듯이 인구, 기념물의 건축, 환경의 충격이 궁극점에 이르면서 이스터 사회는 급속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이 이스터 섬에 처음 상륙했을 때 붕괴가 어느 정도까지 진 행되었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722년 로헤벤은 이스터 섬의 한 지 역에 상륙해서 그곳만을 둘러보았을 뿐이다. 또한 1770년 곤잘레스가 지휘한 에스파냐의 탐험대도 항해일지에만 이스터 섬에 상륙했다는 기 록을 남겼을 뿐이다. 그런대로 읽을 만한 최초의 기록은 쿡 선장이 남 겼다. 1774년 이 섬에 상륙한 쿡 선장은 나흘을 머물면서 파견대를 보 내 내륙을 정찰했다. 그때 데려간 타히티인은 이스터 섬 사람들과 무리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폴리네시아어가 이스터 섬 사람들의 언어와 무 척 흡사했기 때문이다. 쿡 선장은 석상들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 쓰러 진 석상뿐만 아니라 여전히 똑바로 서 있는 석상도 목격했다는 기록이 었다. 그런데 똑바로 서 있는 석상에 대한 유럽인의 기록은 1838년에서 끝난다. 1868년의 기록에는 서 있는 석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구 전에서도 파로가 1840년경에 마지막으로 쓰러졌다고 전해진다. 한 여 인이 남편을 기리면서 세웠다는 파로를 그녀 가족의 적들이 허리를 두 동강 내려고 쓰러뜨렸다는 것이다. 아후도 신성함을 상실했다. 사람들은 공들여 깎은 돌판들을 빼내 아 후 근처에 마련한 밭을 보호하는 담( '마나바이' )을 쌓았고, 시신을 안치 하는 석관묘를 만들기도 했다. 그 결과로 오늘날까지 복원되지 않은 채 버려진 아후는 그저 큰 돌을 쌓아놓은 것처럼 보일 뿐이다(대부분이 복 원되지 않았다). 조 앤 반 틸버그, 클라우디오 크리스티노, 소니아 아오 아, 배리 롤렛, 그리고 내게도 아후는 파괴된 석상에서 떨어진 돌조각 들과 뒤섞인 돌더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후를 쌓고, 석상을 조각해서 운반하고 세우기 위해서 수세기 동안 쏟아부은 엄청난 노력 2. 이스터 섬에 내린 땅거미 157
을 생각할 때, 그리고 조상의 그 기념비적인 작품을 파괴한 장본인이 바로 섬사람들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서글픈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스터 섬 사람들이 모아이를 쓰러뜨렸다! 공산정권이 붕괴하자 러 시아 사람들과 루마니아 사람들이 스탈린 동상과 차우세스쿠 동상을 쓰러뜨렸던 상황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러시아인들과 루마니아인들이 그랬듯이, 섬사람들도 지도자에 대한 울분을 오랫동안 억눌렀을 것이 다. 파로의 전설이 말해주듯이, 석상의 주인에게 앙심을 품은 사람들이 간헐적으로 석상을 하나씩 쓰러뜨렸을 것이다. 그리고 공산주의가 몰 락했을 때처럼 분노와 환멸이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번지면서 무수한 석상들이 쓰러졌을 것이다. 내게는 또 하나 기억나는 사건이 있다. 뉴기 니의 고원에 있는 보마이(Bomai)라는 마을에서 1965년에 있었던 종교 적 편견에 따른 문화적 비극이다. 보마이에 파견된 기독교 선교사가 내 게 자랑스레 해준 이야기였다. 어느 날 그는 회심자들을 불러 '이교도 의 인공물(즉 그들의 문화유산과 예술품)' 을 가설 활주로에 쌓아두고 불 태우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선교사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이스터 섬 의 '마타토아' 도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비슷한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1680년 이후 이스터 사회를 완전히 부정적이고 파괴적이었 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환경 과 종교에 적응해나갔다. 데이비드 스티드먼, 파트리시아 바르가스, 클 라우디오 크리스티노가 아나케나에서 발굴한 가장 오래된 패총에서는 동물의 뼈 중 닭뼈가 0.1퍼센트밖에 차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1650년 이후에 카니발리즘뿐만 아니라 닭장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여겨진 다. 마타토아는 과거에 이스터 사회의 수많은 신들 중 하나에 불과하던 마케마케(Makemake)를 창조주로 섬기는 새로운 종교를 내세우면서 그들의 쿠데타를 합리화시켰다. 바닷새들이 둥지를 튼 앞바다의 커다 란 세 섬이 굽어 보이는 라노카우 분화구 언저리에 있는 오롱고 마을이 158 문명의 붕괴
제식의 중심지였다. 새로운 종교하에서 새로운 예술 양식이 발달했다. 특히 암면(巖面) 조각이 성행하면서 여성의 성기, 조인(鳥人), 새 등이 오롱고의 기념물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 쓰러진 마오이와 푸카오에 조 각되었다. 매년 오롱고에서 제식이 거행될 때마다 남자들은 이스터 섬 에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앞바다의 작은 섬들까지 상어들과 싸우면 서 건너가, 검은제비갈매기가 그 해에 낳은 첫 알을 구해서 고스란히 이스터 섬까지 가져오는 경기를 벌였다. 그리고 승리자에게는 '올해의 조인' 이란 명예가 주어졌고 그는 다음 한 해 동안 그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오롱고에서 마지막 제식은 1867년에 있었다. 가톨릭 선교사들 의 눈에 띄었던 탓일까? 섬사람들의 손에 파괴되지 않은 이스터 섬의 고유한 전통들은 외부 세계의 압력으로 인해 파괴되는 운명을 맞았다. 유럽인들과 해석 유럽인들이 이스터 섬 사람들에게 안겨준 슬픈 이야기는 짤막하게 요약될 수 있다. 쿡 선장이 1774년 잠시 머문 후부터 유럽인들의 발길 이 끊이지 않았다. 하와이, 피지 등 태평양의 많은 섬들에 대한 기록에 서 보듯이 그들은 유럽의 질병들까지 이스터 섬에 안겨주었고, 그런 질 병들에 대해 면역성이 전혀 없던 섬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갔다. 구체적으로 언급된 최초의 전염병은 1836년경의 천연두였다. 또한 태 평양 일대의 다른 섬들에서도 그랬듯이, 섬사람들을 노예로 납치하는 만행은 이스터 섬에서 1805년에 처음 자행되었고, 1862~1863년에 절 정을 이루었다. 그 해는 이스터 섬의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시기였다. 페루인들이 20여 척의 선박을 몰고 와 1,500명(살아남은 사람의 절반)을 강제로 납치해서, 페루의 조분석(烏糞石, guano) 채취장이나 다른 노역 장에서 일할 노예로 팔아넘겼다. 이때 납치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노역 중에 죽었다. 국제 사회의 압력 아래 페루 정부는 10여 명의 생존자를 이스터 섬으로 송환시켰지만 그들이 섬에 다시 한 번 천연두의 비극을 2. 이스터 섬에 내린 땅거미 159
상에서 유일한 인간이라 믿었을 사람들에게는 기대하기 힘든 반응이었 다. 그러나 1722년 이전에 유럽인들이 이스터 섬에 상륙했다는 분명한 증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어떤 식으로 삼림을 파괴했는지도 학 실하지 않다. 마젤란이 1521년 태평양을 최초로 횡단하기 전부터 이스 터 섬에서 인간으로 인한 파괴가 자행되었다는 증거는 곳곳에서 찾아 진다. 즉 1300년 이전에 모든 육지새가 멸종했고, 돌고래와 참치가 식 단에서 사라졌으며, 플렌리가 확인해주었듯이 퇴적물에서 나무의 화분 들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또한 포이케 반도의 숲은 1400년경에 완전히 파괴되었고, 야자나무 열매는 1500년 이후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두 번째 반론은 삼림 파괴가 가뭄이나 엘리뇨 등과 같은 기후 변화에 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이론이다. 아나사지(제4장), 마야(제5장), 노르 웨이령 그린란드(제7~8장)에서 기후 변화가 인간으로 인한 환경 훼손 을 더욱 가속화시킨다는 사실을 살펴보겠지만 기후 변화가 이스터 섬 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면 이런 반론도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이스 터 섬과 관련된 기간인 900년부터 1700년까지의 기후 변화에 대한 정 보는 거의 없는 편이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기후가 더 건조해고 폭우가 잦아지면서 삼림의 생존에 불리했는지, 거꾸로 더 습 해지고 폭우가 줄어들면서 삼림의 생존에 더 유리하게 변했는지 판단 할 자료가 부족하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기후 변화만으로 삼림이 파괴 되고 새가 멸종되었다고 설명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한 듯하다. 테레 바카 화산의 용암류(lava flow)에 문힌 야자나무 줄기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거대한 야자나무는 이스터 섬에서 수십만 년 전부터 살았고, 플 렌리는 퇴적물을 분석해서 야자나무, 나무 데이지, 토로미로 이외에 대 여섯 종의 수종이 이스터 섬에서 3만 8,000~21만 년 전부터 존재한 것 을 밝혀냈다. 따라서 이스터 섬의 식물들은 수많은 가뭄과 엘리뇨를 끗 끗하게 이겨냈기 때문에, 인간이 그 섬에 정착한 이후에 우연의 일치인 양 이런 토종 나무들이 가뭄과 엘리뇨를 견디지 못하고 한꺼번에 사라 162 문명의 붕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