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리대밭을 걷는 상상

in Korea • 한국 • KR • KO4 years ago (edited)



  1. 취하고 싶은 날들의 연속이라며, 와인 한병을 사서 요리하며 가끔 마시고 뱅쇼를 만들어볼까 하는 참이라고 썼다. 술 한잔에 알딸딸해지지도 않았건만, 요새 이상하게 음식의 간이 맞지 않는다. 최근에 두부김치도 하고 늘 먹는 파스타도 했는데, 음식의 완성도가 영... 그래도 계속 하다보면 늘지 않겠나 싶어 열심히 요리 요리중. 갈비찜을 먹고 싶다는 친구의 주문에 소갈비를 사러 한인마트에 들리기로 했다. 요새는 떡볶이도 땡긴다. (안땡긴적은 없었지만)

  2. 강아지를 키워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또는 애완견을 기르는 친구를 주변에 두었다면 알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가족처럼 사랑받고 케어받는지. 조건없이 예뻐해주고 그 누구보다 아프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껏 돌본다. 똥 치우고, 밥 먹여주고, 간식 챙기고, 발톱 깎아주고, 털 미용 관리하고. 그냥 존재만으로도 사랑받는 그런...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 오랜만에 (아주 가끔 드는) 퓨어한 잡생각이 들었는데 누군가 나를 소중한 애완견처럼 우쭈쭈해줬으면 좋겠다는...재미있는 상상으로 이어졌기 때문. 그녀 덕분에 이런 상상에 잠깐 빠졌다(가 나왔다). 숨만 쉬어도 예쁘다 해주고, 눈만 마주쳐도 쓰다듬어 주는 그런.

  3. 울산이란 곳을 살면서 언제 가볼까 싶었는데 솔메님이 알려주신 '십리대밭'의 사진을 보고선 이때다 싶었다. 물론 휘황찬란한 은하수 조명으로 빛나는 대나무 숲길을 연인과 걸어도 사랑의 시 세편을 거뜬히 쓸 수 능력은 생기지 않겠지만... 그래도 조금, 충전은 되지 않을까? 졸업시험을 불태워 치른 후 급격히 떨어진 체력에 충전이 간절해졌다. 무언가에 시들해진 마음을 되살릴, 전기충격같은 강력한 충전이. 보건교사 안은영한테 한문샘의 손 같은 그런 기운의 충전도 좋고 말이다. 어쨌든 그런 충전이 지금의 내겐 없다는 것. 사랑의 배터리 타령을 했더니, 친구는 웃기만 한다.

  4. 수업중 함께 책을 읽어내려가는 도중에 학생이 방귀를 뿡, 하고 뀌었다. 아무렇지 않게 읽어 내려가는 귀여운 모습에서 모른척 해야 하는데 (민망할 수 있으니) 살짝 웃어버렸다. 귀엽기도 하고, 순간 오늘은 진도를 어디까지 나가야 하는데 하며 쥐고 있던 긴장의 끈이 훅 풀려버린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상황을 글로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글빨이 오는 그런 장면은 대개 이렇게나 소소하다. 컴퓨터로 영화를 볼 때, 마음에 드는 장면이 지나가면 뒤로 돌려 멈추고 잠깐이나마 그 장면을 눈에 오래 담는것 마냥. 글도 마찬가지로, 남기고 싶은 감성을 건드리는 그런 순간이 분명 찾아온다. 이동중이거나 도저히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할 때 외에는 메모장에 짧게나마 적어두곤 하는데, 엊그제 적힌 '학생 방귀 귀여웠음' 을 오늘 확인하곤 두번째로 빵 터졌다. (내가 썼지만 너무 웃긴..) 내가 번호일기를 쓰는 이유는 이런데에 있다. 바로 일상 속 사라지는 단편의 기억들을 붙잡아두고 싶어서. 오로지 나를 위한 하루의 좌표와도 같다. 이렇게라도 적어두지 않으면 나는 일년 뒤, 아니 한 달 뒤 오늘을 기억하기나 할까. 쓰여진 오늘은 이렇게라도 남는데 말이다.

  5. 현실 속 나의 삶, 여성들의 삶 그리고 선택을 위협하는 법과 제도가 만연한 사실을 마주할때, 그리고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음을 깨달을 때 과도한 고통속으로 말려들어간다. 지나친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게 중요한데, 계속 가라앉기만 하니 말이다. 마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과도 같은 느낌에 고개를 들기가 힘들때가 종종 찾아온다.

  6. 친구가 파리에 온 이유는 그래서였다. 매일 서로의 생존과 안부를 확인하고, 소소하게나마 생각을 나누던 친구는 문득 내게 말했다. 어깨좀 피고 다녀. 지치고, 피곤해보여. 우울해보여. 안되겠다, 내가 가던가 해야지. 생각해보면, 평소와 다름없이 잘 살고 있고, 그래왔다고 생각한 나의 상태를 때로는 가까운 친구가 가장 정확하게 꿰뚫어보기도 한다는 것이 신기하고, 또 동시에 씁쓸할 따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는 늘 주어지는것이 아니니까.

  7. 할 말을 잃었다. 굳이 보고 싶지 않은 (이미 내 손에 할 일들을 차고 넘치는데) 영상을 어쩌다가 지나가며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부부 유투버의 영상이었다. 그들은 최근들어 자주 싸웠다고 하며, 화두는 자잘한 집안일 같은 일들을 도맡아 하는 여자가 참고 참다가 화가 나서 터졌고, 남자는 대체 뭐가 문제야? 하는 태도를 보이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이 싸움의 원인이 아니다. 이 여성은 이 '화두'에 대해 온갖 짜증이 나 보였지만 결론은 이 둘이 부딪히는 상황의 이유를 '남자' 와 '여자'의 뇌구조가 다르다 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영상에 하고 있었고, 설마설마 했는데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얘기를 꺼내기까지...

  8. 인터넷 댓글을 잘 읽지 않는 편이라 이번에도 외면하고 말았지만, 읽었다면 과연 답답함이 조금은 해소되었을까. 인터넷이란 공간엔 누구나 훈수를 두기 마련이니까. 이 여성의 잘못된 접근과 이해방식은, 안타깝게도 가장 보편적이다. 남여는 굳이 따지자면 차이보단 같은 점이 많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화되는 첫 출발점 부터, 아니 대부분 뱃속에 있을때 부터 남여는 다르다고 교육을 받아왔고, 그 고리를 모든 상황에 연결지어 생각하도록 세뇌받아왔다. 모든 미디어와 책, 사상이 이렇게 주입식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니 영상속 문제가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9. 두 사람이 같이 살며 공평하게 가사를 나누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일은 분명하게 존재하고, 이는 누군가 도맡아 하지 않으면 절대 끝나지 않는다. 집안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를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이 아닌 다른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러나 대부분은 '뭘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으면 어떻게 아나' 라고 반문을 하는 웃지 못하는 상황도 종종 벌어진다고..

  10. 천천히 스며들었어야 하는 거였을까. 대화는 충분히 나누었다고 생각했는데, (충분히가 어디있다고 참) 이번에도 서둘렀던 거였나. 다시 돌아간다면 그렇게 행동하진 않을텐데, 라는 후회는 하나마나지만 그럼에도 안고 살아간다. 품위가 머무는 관계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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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좋아서 두번 연속 들었네요.
뒤로 갈수록 더 좋은 거 같아요.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

 4 years ago 

제이콥의 음악은 사랑이죠. ^^ 즐겁게 들으셨다니 다행이네요.

잘읽었어요

 4 years ago 

혼자 넋두리 처럼 적는 번호일기인데,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코로나에 안녕하시길 바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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