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의 세계사] 506년 2월 2일

In Calendarium

Alaric II, eighth king of the Visigoths promulgates the Breviary of Alaric (Breviarium Alaricianum or Lex Romana Visigothorum), a collection of “Roman law”.

서고트왕국의 9대왕 알라리크 2세가 로마법과 고트법의 장단점을 분적하여 장점을 취하고 단점은 배제한 신법인 브레비아리움 아라리키아눔(알라리크의 서약서)를 반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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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리크 대왕

오늘은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 잘 등장하지 않은 서고트왕국의 이야기 입니다. 바로 서고트 왕국의 9대 군주인 알라리크 2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알라리크 2세는 정교에 대한 박해 정책을 완화하고 로마인과 고트인 모두를 위한 법전을 개편하는 등 유능한 면모를 보였지만 507년 8월 부이예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에 참패를 당하고 목숨을 잃은 왕입니다. 알라리크 2세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알아보겠습니다.

1. 생애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알려진 것은 서고트 왕국 8대왕 에우리크와 라그나길드 왕비의 아들입니다. 역사가 시도니우스 아플리나리스에 따라면 왕비인 아그나길드는 라틴어를 할 수 있었으며 시인과 예술가들을 후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알라리크 2세는 로마에 온건한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는 추측들이 있습니다. 484년 12월 28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서고트 왕국의 새군주로 등극합니다.

2. 즉위당시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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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당시의 유럽의 영토

이 당시 서고트 왕국의 입지는 굉장히 탄탄했습니다. 이전왕 에우리크의 정복활동으로 영토를 넓혔으며 프로방스 일대의 식량생산량을 여전했고, 훨씬 이전에 지어진 로마의 가도들은 상업활동과 대외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알라리크2세는 이러한 왕국의 입지를 유지하는데에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피레네 산맥을 통행을 보장하고 오도아케르를 꺽고 이탈리아 전역을 장악한 뒤 강성해지고 있는 동고트왕국의 테오도리크 대왕과 동맹을 맺기 위해 대왕의 딸 테오데고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들이 후에 왕위를 잇는 아말라리크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날의 역사에서 언급한 알라리크의 서약서라는 새법이 반포가 되죠 그리고 서고트왕국의 주된 종교가 아리우스파 기독교였지만 알라리크 2세는 정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 정책을 중단하고, 시게리우스가 아를의 주교로 선임되는 것을 인정해 줍니다.

3. 프랑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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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비스 1세의 초상

하지만 이때 프랑크왕국이라는 국가가 급격히 성장하게 됩니다. 481년 프랑크 왕 클로비스 1세가 수아송 전투에서 로마계 군벌인 시아그리우스를 격파해 버립니다. 시아그리우스는 알라리크2세에게 귀환하지만 클로비스 1세가 시아그리우스를 내놓으라고 하게되고 프랑크왕국과의 전쟁을 피하고 싶었던 알라리크 2세는 시아그리우스를 내주게 되죠 .프랑크 왕국은 계속해서 세력권을 넓힙니다. 갈리아 북쪽의 튀링겐 족을 제압하고 라인 강 서부와 중부에 부르군트족과 알란족을 정벌합니다. 그리고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발휘 랭스에서 부하 3000명과 함게 정교로 개종함녀서 로마 교회와 갈리아 현지민들에게 지지를 받고 가톨릭 주교들로부터 ‘아수구스투스’의 칭호를 받게 됩니다. 자 이제 문제가 생깁니다. 서고트 왕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프랑크왕국이 정교로 개종을 했으니 서고트왕국내의 정교인들이 프랑크왕국으로 귀순하기를 희망했다는 것이죠. 오히려 박해 정책을 펼치지 않은게 서고트내의 분란을 늘리게 되고 결국 클로비스 1세와 불가침 조약을 맺습니다. 역사에 그 내용은 잘알려져 있지 않지만 낭트, 앙제, 투르, 오를레앙등을 넘겨준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 이 지역은 정교인들이 많은 지역으로 아리우스파인 서고트 왕국에는 골칫거리였던 곳이라 넘겨주는게 낫다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클로비스 1세의 생각은 달랐죠.

4. 최후

클로비스 1세는 우선 부르군트 왕국의 군주 군도바트와 군사동맹을 맺었습니다. 동고트왕국의 원조를 막기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리고 507년 3월에 프랑크 왕국 전역에 군대 동원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아키텐으로 진격합니다. 당연히 알라리크2세도 대응을 준비하지만 그 당시 프랑크군의 전투력은 압도적이라 결판은 손쉽게 나고 알라리크2세도 전사합니다. 이 전투는 부이예 전투라고 불리고 프랑크군은 보르도를 포함한 아키텐 전역을 휩쓸었고, 서고트 왕국의 수도인 톨루즈도 함락시켜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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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트 왕국의 영

5. 사후.

서고트 귀족들은 왕이 전사하자 게살레크를 새왕으로 추대합니다. 그러나 이탈리아로 망명한 아말라리크를 보호한 테오도리크 대왕은 게살레크를 찬탈라로 규탄하고 511년 게살레크를 폐위한 뒤 아랄라리크가 성인이 되어 나라를 통치할 수 있을 대까지 대신 맡겠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서고트 왕국을 섭정해 버립니다. 아말라리크는 테ㅐ오도리크 대왕이 사망하고 나서야 정식으로 서고트 왕에 등급합니다. 나라의 중심이 되는 왕에게 급한 변고가 생기면 어떤일이 발생하는지 알수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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