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위치 사장님과 나눈 90분의 대화

in Korea • 한국 • KR • KO3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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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꿈과 말년의 꿈이 있다. 중년의 꿈은 남극에서 펭귄을 가만히 찍으며 멍을 때리는 것이고, 말년의 꿈은 호주에서 ‘호호 할머니의 샌드위치 가게’를 열어 “하이, 호호!”라고 불리는 거다. (그때는 브런치 이름을 현호호로 바꾸고 싶다). 하지만 이 꿈은 현실에 치여 사느라 판타지와 다름없는 소망이 되었고, 나는 카메라를 잡거나 빵 굽는 법을 익히는 대신 펭귄 사진을 잔뜩 보거나 맛있는 샌드위치를 잔뜩 사 먹으며 대리 만족을 실현했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호호 할머니’가 된 내 모습을 진지하게 그려볼 기회가 생겼다.

그제 찜해뒀던 연남동의 한 샌드위치 가게에 들렀다. 이번 책이 영풍문고 매대에 실렸다는 소식에 미루던 비행기표를 끊어 도착한 곳이었다(서점 간다고 서울 갔으면서 샌드위치 가게 먼저 방문해버리기). 나는 점잖게 “아아, 호밀빵에 바질 페스토로, 치즈는 딥하게-(사실 치즈 이름이 기억 안 나서 진한 걸로 달라고 했다) 부탁드려요.” 하고는 창가에 앉아 특유의 여행자스러운 모습으로 스마트폰을 밀어 두고 바람을 타고 휘날리는 앞머리를 느꼈다. 사장님은 샌드위치를 만들다 코로나 방문자 기록부를 보시고는 “제주에서 오셨어요???? 저 제주에 친구 있는데!!!!!”라고 외치셨다. 나는 《제주 토박이는 제주가 싫습니다》를 떠올리며 역시 서문을 잘 뽑았다고 한 번 더 생각했다.

처음에는 사장님과 제주 얘기만 하다 끝날 줄 알았으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는 터프한 사장님의 매력에 반해 최근 고민을 보따리장수처럼 줄줄이 꺼내보였다. 다름 아닌 요즘 고민은 직장과 인연을 제쳐두고 코로나 블루라는 이유로 서울을 벗어나 제주에 온 거였다. 처음에는 소신 있게 성공의 궤도를 벗어나 지방에서 글을 쓰는 내 자신을 멋지게 여겼지만, 사회의 쓴맛을 겪으신 선배들은 그건 조금 무모하다는 얘기를 하셨다. 돈을 벌 구석이 마땅치 않고 제주에는 일자리가 없어 나의 역량을 표출하기 어려워 보인다는 게 요지였다. 그 순간 내 얇은 귀는 주체 않고 팔락댔다. 가장 위험한 좌절은 내가 나를 의심하는 순간이므로 나는 엄청난 좌절에 빠져버렸다. 왜냐하면 구구절절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되새겨보면, 나는 인턴과 스타트업 외에는 이렇다 할 경력이 없고 책도 한 권밖에 내지 못했다. 심지어 다음 책은 언제 나올지 모르는.. 그야말로 무명의 무명의 무.... 하다가 내 존재는 ‘없을 무’가 아닌가? 무얼 믿고 앞가림을 할 수 있다고 떵떵거렸지? 싶은 마음이 차올랐다.

샌드위치 가게 사장님(이하 샌사)은 한탄을 가만히 듣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꼭 마흔에 귀향하라는 법 있나요? 인생에서 한 번쯤은 타자화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뛰던 사람이 어느 날은 뛸 필요 없이 뛰는 사람을 바라보는 거지. 급박하구나, 바빠 보이는구나, 조급하구나, 하고. 손님도 관광객으로서 서울 오니까 여기서 살던 때랑은 다르지 않아요?”

귀가 얇은 나는 다시 내 결정에 확신이 들었다. “맞아요, 저는 여기까지 오면서 단 한 번도 달리지 않았어요, 지도 볼 때 빼면 스마트폰도 하지 않았고요, 서울 사람들은 어떻게 사나 구경만 했어요.“라고 답했다. 내 어깨를 툭 치며 사과 없이 달리는 사람들, 새치기를 하며 내게 욕하던 어느 사람의 이야기는 쏙 빼고 말이다.

샌사는 빵을 한 번 뒤집으시고 숨을 고른 뒤 다시 입을 뗐다. “제주는 어때요?” 나는 곰곰 생각하다 웃으며 “맛있는 샌드위치 가게를 찾기 어려운 거 빼곤 다 좋아요.”라 답했다. 샌사는 호탕하게 웃으시더니 커다란 손바닥으로 박수를 짝! 치셨다. “손님이 차리면 되겠네!”

나는 아유 말도 마시라며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했다. 먹어본 적 외에는 베이킹을 한 기억도 없으며 지금은 다른 직업에 몰두 중이라는 답과 함께. 사장님은 어린 사람이 왜 그런 꽉 막힌 생각을 하고 있느냐는 눈빛을 보내며 “때??????”라고 외치셨다. 샌사의 연배는 쉰을 넘었기에 나는 얼른 말을 바꿨다. “아뇨, 제 말은 그게 아니고, 아니, 그게 아니고가 아니고, 네! 차릴게요!”(?)

이후 시답잖은 농담과 서로의 철학을 나누며 샌드위치 하나를 맛있게 비웠다. 값을 치르고 나오는 길에 나는 나를 조이던 자기 의심이 조금은 사라졌음을 느꼈다. 그간 글을 쓰며 나는 내 인생 중 지금이 글을 쓰기 딱 좋은 적기라고 생각하는데(그래야 마흔에 펭귄을 찍고 예순에 호호 할머니가 될 수 있다) 왜 때에 맞지 않게 책은 불티나게 팔리지 않고 공모전은 번번이 떨어지며 다음 책의 출간 소식은 들리지 않는가 하며 낙담했다.

최상의 시기, 알맞은 시기라는 건 없다는 걸 안다. 때란 내가 만드는 거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면 운이 트여 빛을 보게 된다는 것도 아는데, 나는 얼른 팬을 많이 만들고 싶고 나를 찾는 출판사가 줄줄이 나를 기다리는 순간을 만나고 싶다. 위대한 업적은 아니더라도 다음 책을 투고하지 않고 섭외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하지만 샌사의 “때??????”로 시작하고 때로 끝난 비명은 그간 쓸데없는 걱정을 너무 많이 했다는 걸 몸소 깨닫게 했다. “샌드위치? 만들면 돼!” 그건 마치 “글? 쓰면 돼!”라고 말하던 내 모습과 똑 닮은 장면이었다.

밖에서는 글이야 쓰면 됩니다, 영감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낯선 순간에서 아이디어를 얻으려다가 영영 글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라고 말해놓고는 겨우 공모전 몇 차례 떨어지고 투고 몇 번 거절당했다고 징징댔나. 지금은 때여야 하는데 때가 아니라고 나를 미워하고는. 리즈 시절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샌드위치처럼 글을 미루고 있었다.

제주에 가면 제일 먼저 샌드위치를 하나 만들어야겠다. 소스도 배합해보고, 눈을 감고 빵 종류를 알아차리는 실험도 해봐야지. 때는 없으니까. 때는 “때????” 하고 어처구니없이 소리 지르는 단어인 만큼 언제든지 만들 수 있으니까. 호호와 할머니를 굳이 붙이지 말아야지. 호호 이모도 좋다. 그리고.. 샌사와의 대화는 무척 좋았다. 근데 샌드위치랑 커피 합쳐서 만.. 만 육천 원이네.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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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샌드위치 가게 차리시면 한번 가보고싶네요.

 3 years ago 

차리게 되면 바로 알리겠습니다. ㅎ_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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