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30(화)역사단편112-淵蓋蘇文[연개소문]의 死年[사년](11)

지난 글에서는
연개소문이 사망한 해가 657년이라고 확신하는
내용으로 마무리 했다.

연남생연대.JPG
대대로는 부친 사후에 물려받는 것이고,
막리지와 대대로가 하나의 관직명인데,
연남생의 묘비를 기록하면서
<대우>의 기법때문에 서로다른 명칭을 사용했고
그 과정에서 혼란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연개소문이 '태대로'로 승진을 하면서
연남생이 '막리지'로 임명된거 아니냐는 해석에 대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다시 읽어보면,

설혹 막리지 이외에 <대로>라는 관명이 있다 할지라도,
김춘추가
“태대대로 연개소문”을 방문했다는 연도
[김유신전─원주]가 곧 보장왕 원년(642) 단군 2975년이니,
단군 2975년에 연개소문이 이미 ‘태대대로’의 관명을 가졌은즉,

그 16년 후인 <단군2990년(657) ─ 원주>에
연개소문이 ‘막리지’로부터 ‘태대대로’의 직으로 승진하고
남생이 대신하여 ‘막리지’가 되다 함은 있을 수없는 일이니,
그러므로 단군 2990년 보장왕 16년(657)을
─ 막리지가 사망한 ─ 연개소문의 사년이라 하노라.

오늘은 그 뒷부분을 읽어본다.

연개소문이 만일 단군 2990년에 이사(已死)하였으면
당인이 어찌 이때를 타서 고구려를 치지 않고 먼저 백제를 쳤느냐.
이를 논술하자면 먼저 2978년의 동맹전역(同盟戰役)의 원인과 결과를
약술할밖에 없다.
그 전역의 원인으로 말하면
단군 2808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을 파하고 남진정책을 취하매,
신라와 백제가 각기 자위를 위하여 양국의 공수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에 대항하다가, 2870, 80년경에 신라 진흥왕이 출현하여
국력이 취성(驟盛)하여, 강원도ㆍ함경도 등지와 경기도의 남반
부를 병유(並有)하고 충청북도 등지로 침입하니,
백제는 신라의 삼면 포위를 받아 국세가 위급하다가,
<출처: 연개소문의 사년>

동맹전역(同盟戰役):동맹들간의 전쟁
기원전 2333년이 단기 1년이다.
따라서, 2978년은 2,978-2,333=서기 645년
취성(驟盛): 빠르게 성장하다
병유(並有): 아울러 가지다

(옮기면)
연개소문이 만일 단군 2990년(657)에 이미 사망했다면
당나라가 그 기회를 틈타 고구려를 치지 않고 왜 먼저 백제를 쳤을까?
이를 논술하자면 먼저
단기2978(서기 645)년의 동맹들간의 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간단히 설명할 수 밖에 없다.
그 동맹의 원인으로 말하면
단군 2808(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을 뺏고 남진정책을 취하매,
신라와 백제가 각기 자위를 위하여 양국의 공수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에 대항하다가 2870, 80년경(537~547년)에
신라 진흥왕이 출현하여 국력이 빠르게 성장하여,
강원도ㆍ함경도 등지와 경기도의 남반부까지 장악하고
충청북도 등지로 침입하니,
백제는 신라의 삼면 포위를 받아 국세가 위급하다가,

장수와의 남진정책이 가져온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어서 읽어본다.

백제 무왕(武王)이 다시 군정을 닦고 국력을 기르며
부여성충(扶餘成忠)ㆍ부여윤충(扶餘允忠:兄弟? ─ 原註[원주]) 등
을 썼으므로, 그 뒤 의자왕(義慈王) 원년에 신라 서비(西鄙)의 40여 성을
함락하며,
대야(大耶:지금 陜川[합천] ─ 原註[원주])의 역(役)에
김품석(金品釋)과 고타소랑(古陀炤娘)을 금살(擒殺)하니
낭(娘)은 신라 귀신(貴臣) 김춘추의 애녀(愛女)라,
춘추가 그 복수를 위하여 고구려의 구원을 구하나,
고구려는 신라가 한강유역을 독점함을 꺼려 이를 거절하고
돌아와 백제와 동맹하니,
신라가 또 이를 저항하기 위하여 바다를 건너 당의 구병을
걸하였다.
<출처: 연개소문의 사년>

서비(西鄙): 서쪽 변경
역(役): 전투, 실행하다
고타소랑(古陀炤娘): 김춘추의 딸( ? ~ 642)
금살(擒殺): 사로잡아 죽임
낭(娘): 아가씨, 여기서는 고타소랑
귀신(貴臣) : 지위가 높은 신하

(옮기면)
백제 무왕(武王)이 다시 군정을 닦고 국력을 기르며
부여성충ㆍ부여윤충(형제? ─ 原註[원주]) 등을 등용했므로,
그 뒤 의자왕원년(641)에 신라 서비(西鄙)의 40여 성을 점령하고,
대야(大耶:지금 陜川[합천] ─ 原註[원주])의 전투에서
김품석과 고타소랑을 사로잡아 죽였는데,
고타소랑은 신라에서 지위가 높은 김춘추의 사랑하는 딸이었다.
춘추가 그 복수를 위하여 고구려의 구원을 요청했지만,
고구려는 신라가 한강유역을 독점함을 꺼려 이를 거절하고
반대로 백제와 동맹하니,
신라가 또 이것에 저항하기 위하여
바다를 건너 당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신라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캡처729.JPG
<좌측 아래가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

이때에 고구려의 전정자(專政者)는 곧 연개소문이니,
연개소문이 소시로부터 인국을 침략할 야심을 회포(懷抱)하고
중화에 유력(遊歷)하여 풍토를 시찰하고 돌아와,
부의 직을 사(嗣)하여 대대로가 되어
단군 2975년에 영류왕(榮留王)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워
국정을 전천(專擅)하더니,
당 태종이 수양제(隋煬帝)의 살수(薩水) 참패를
중화의 대치(大恥)라 하여,
매양 고구려를 침벌하여 이를 보복하려 하다가,
연개소문의 근기(根基)가 공고치 않은 시기를 타려 하는 즈음에
신라의 걸원사자(乞援使者)가 오므로,
양국이 드디어 비밀히 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고 그 토지를 공분하기로”하여,
이에 고구려ㆍ백제 양국동맹에 대한
신라ㆍ당의 양국동맹이 성립되어 2978년의 전역을 산출하였다.
<출처: 연개소문의 사년>

전정자(專政者): 전제정치를 하던 사람
소시(少時): 젊었을 때
회포(懷抱): 마음속에 품은생각
유력(遊歷): 여러고장을 돌아다님
사(嗣): 이어받다
전천(專擅): 마음대로 처리함
근기(根基): 기반, 토대
걸원사자(乞援使者): 도움을 청하는 사자

(옮기면)
이 때에 고구려의 절대권력을 쥐고 있던 사람은 곧 연개소문이니,
연개소문이 젊었을때 부터 인접국을 침략할 야심을 마음속에 품고
중화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지리적 환경을 시찰하고 돌아와,
부친의 직책을 이어받아 대대로가 되었다.
단군 2975(642)년에는 ‘영류왕(고건무)’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워
국정을 마음대로 처리했다.
당 태종이
<수양제의 살수참패>를 중화의 큰 수치라 하여,
항상 고구려를 공격하여 이를 보복하려 하다가,
연개소문의 기반이 견고하지 않은시기를 잡으려하고 있을때
신라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자가 오므로,
양국이 드디어 비밀히 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고 그 토지를 나눠갖기로”하여,
이에 고구려ㆍ백제 양국동맹에 대한
신라ㆍ당의 양국동맹이 성립되어 2978(645)년의 전쟁을 유발하였다.
<출처: 연개소문의 사년>

오늘은 7세기 중반,
당나라와 조선삼국의 관계를 설명하는것으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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