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29(월)역사단편111-淵蓋蘇文[연개소문]의 死年[사년](10)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 사건보다 중요한 것은
관심밖에 있는 과거의 역사다.
일본이 만들어준 교과서를 외우고
그것을 우리 역사라고 생각하면서
사도광산 뉴스에 흥분하는게 의미가 있을까?

연개소문이 사망한 해에 대한 의문을 계속 추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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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점은 여기다.

연남생 28세 막리지 임명
막리지는 승계직

‘대로(對盧)’의 ‘대(對)’는 ‘마주’의 ‘마’를 취하여 의역(意譯)한 것인즉,
‘대로(對盧)’도 ‘막리지(莫離支)’와 같이 ‘마리’로 읽을 것
이니, “대로와 막리지가 일개 동일한 관명의 이역(異譯)이라”함은,
내가일찍 「이두문해석(吏讀文解釋)」에 논술하였거니와,
본 묘지는 매양 일명이역(一名異譯)의 이두자의 관명을 혼용하였으니,
<출처: 연개소문의 사년>

대(對): 마주하다.
뜻을 빌려 반음을 사용하면 '마'가 된다.
盧 는 아래아( . )였으므로 발음이 다양하다.
莫離: 고대어로는 <mˤaklǐe> 인데 연음으로 <마리>비슷한 소리가 된다.
현대북경어로는< Mò lí >이다

(옮기면)
‘대로(對盧)’의 ‘대(對)’는 ‘마주’의 ‘마’를 취하여 의역(意譯)한 것인즉,
‘대로(對盧)’도 ‘막리지(莫離支)’와 같이 ‘마리’로 읽을 것이니,
“대로와 막리지가 한개의 같은 관명을 다르게 번역한 것이라”함은,
내가일찍 「이두문해석(吏讀文解釋)」에 논술하였거니와,
본 묘지는 항상 한가지 이름을 서로 다르게 번역하여
이두로 적은 관명과 섞어서 사용했으니,

계속 읽어본다.

예를 들면 남생의 고구려에서 임한 관작을 서(敍)할 때에
‘두대형(頭大兄)’ ‘태막리지(太莫離支)’등의 관명만 있고,
그 하문에 당이 남생의 관을 서(敍)할 때에는
“任公特進太大兄[임공특진태대형] 如故[여고]”라 하여,
‘태대형(太大兄)’이 두대형(頭大兄)의 고직(故職)을 가리킴인지,
태막리지(太莫離支)의 고직을 가리킴인지 모르게 되었으며,
또는 그 전문이 대우(對偶)의 체인 까닭에
내ㆍ외구에 동일한 명사를 쓸 수 없으므로,
내구에는 “曾祖子遊[증조자유],
祖太祚[조태조] 並任[병임] 莫離支[막리지]”라 하고,
외구에는 “父蓋金[부개금] 任太大對盧[임태대대로]”라 함이요,
막리지 이외에 따로 대로란 관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출처: 연개소문의 사년>

서(敍): 열거하다, (관작을)주다
대우(對偶): 서로 비슷한 어구를 연립시켜 문장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
나중 구절에서는 앞에서 사용한 단어대신
같은 뜻을 가진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

(옮기면)
예를 들면 남생이 고구려에서 맡았던 관작을 열거할 때에
‘두대형(頭大兄)’ ‘태막리지(太莫離支)’등의 관명만 있고,
그 다음 문장에 당이 남생에 내린 벼슬을 열거할 때에는
“공께서는 특별히 태대형으로 임명되어, 예전과 같다”라 하여,

‘태대형(太大兄)’이 두대형(頭大兄)이라는 옛직책을 가리킴인지,
<태막리지>라는 옛직책을 가리킴인지 모르게 되었으며,
또는
그 전제 문구가 <대우형식>인 까닭에
내ㆍ외구에 동일한 명사를 쓸 수 없으므로,
내구에는
“증조부 자유, 할아버지 태조는 둘다 막리지였다.”라 하고,
외구에는
“아버지 개금은 태대대로였다”라 함이요,
막리지 이외에 따로 대로란 관명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당나라시절에 글을 쓰던 방법이었던
<대우>라는 것을 모르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단재선생 덕분에 하나 배우고 간다.

계속 읽어본다.

설혹 막리지 이외에 대로란 관명이 있다 할지라도,

김춘추(金春秋)가
“太大對盧[태대대로] 淵蓋蘇文[연개소문]”을 방문할 때(金庾信傳[김유신전]
─ 原註[원주])가 곧 보장왕 원년 단군 2975년이니,
단군 2975년에 연개소문이 이미 ‘태대대로(太大對盧)’의 관명을 가졌은즉,
그 16년 후(檀君[단군] 2990년 ─ 原註[원주])에
연개소문이 ‘막리지’로부터 ‘태대대로’의 직에 승하고
남생이 대신하여 ‘막리지’가 되다 함은 불성설이니,
그러므로 단군 2990년 보장왕 16년을
─ 막리지가 궐(闕)한 ─ 연개소문의 사년이라 하노라.
<출처: 연개소문의 사년>

보장왕 원년 :642년
보장왕 16년: 657년

(옮기면)
설혹 막리지 이외에 <대로>라는 관명이 있다 할지라도,
김춘추가
“태대대로 연개소문”을 방문했다는 연도
[김유신전─원주]가 곧 보장왕 원년(642) 단군 2975년이니,
단군 2975년에 연개소문이 이미 ‘태대대로’의 관명을 가졌은즉,
그 16년 후인 <단군2990년(657) ─ 원주>에
연개소문이 ‘막리지’로부터 ‘태대대로’의 직으로 승진하고
남생이 대신하여 ‘막리지’가 되다 함은 있을 수없는 일이니,
그러므로 단군 2990년 보장왕 16년(657)을
─ 막리지가 사망한 ─ 연개소문의 사년이라 하노라.

관련 기사를 참조하면,

善德大王十一年壬寅(중략) 麗王遣太大對盧盖金舘之, 燕饗有加.
선덕대왕11년 임인( 642년)에<중략>고구려왕이
태대대로(太大對盧) 개금을 보내 〔춘추 일행의〕 객사를 정해주고,
연회를 열어 매우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 출처:삼국사기 > 열전 제1 > 김유신 상>)

라고 되어있다. 642년에 연개소문이 <태대대로>였다.

물론, 연남생이 막리지가 된것은 28세 이므로,
그 해에 연개소문이 사망했다면 <661년>이 된다.

이제야 분명해졌다.
연개소문은 666년에 죽을 수 없었다.
일본학자들과 우리 역사학계가 암기시키고 있는
교과서는 틀렸다.

657년이 아니더라도,
지금 교과서에 나오는 666년은 불가능하다.

다음 포스팅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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