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27(토)역사단편110淵蓋蘇文[연개소문]의 死年[사년](9)

연개소문이 사망한 해를 추정하기 위해
그 아들 남생의 묘비에 기록된 연대기를 살펴보고 있다.

연남생이 막리지에 임명된것이
28세 였는데
신채호선생은 24세라고 착오를 일으켰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본다.
핵심은 연남생의 나이 24 혹은28이 아니라
666년이라고 잘못(?) 기록된 연대기의 수정이기 때문이다.

연남생연대.JPG

막리지 또는 대대로는 계승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죽어야 물려받는 다는 것을 기억하자.
'태'는 조선시대 <정1품> 같은 품계다.

선생의 글을 계속 읽어본다.
기존의 해석자들이 반박할 이슈에 대해 소개하고
그런 해석은 잘못임을 설명한다.

혹왈 묘지 중에
“三十二加太莫離支[삼십이가태막리지] 總錄軍國[총록군국]
阿衡元首[아형원수]”라 하였으니,
남생의 32세 되는 단군 2998년에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남생이 대신하여 군국대권을 총람함이 아니냐.
<출처: 연개소문의 사년>

총람(總攬) :장악하다.
總錄軍國[총록군국):군사와 국정을 총괄하다
阿衡元首[아형원수]: 나라의 최고권력자

(옮기면)
어떤 사람은 “기록중에
“32세에 태막리지를 더하여,군국을 총괄하며
나라의 최고권력자가 되었다.”라 하였으니,
남생이 32세 되던 단군 2998(665)년에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남생이 대신하여 군국대권을 총람함이 아니냐.”라고 말한다.

실제로 이렇게 주장하면서,
666년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기존 사학계의 입장이고
그냥 생각없이 편한대로 해석하는 관점이다.

삼국시대 당시의 권력시스템에 대해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선생의 글을 읽어보자.

대개 ‘太[태]’자의 관명은
삼국시대에 다 공덕 있는 자에게 올리는 품계요,
실직이 아니니,
『삼국사기』의 직관지에
“文武王八年[문무왕팔년] 以金庾信[이김유신]
爲太大角干[위태대각간] 賞其元謀[상기원모]”라 한바,

김유신이 원래 ‘각간(角干)’으로 군권을 총람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원모(元謀)를 상(賞)하여
품계를 증가함인즉,
태막리지(太莫離支)도
남생의 공을 상한 품계가 됨이 명백하며,
또는 “總錄軍國[총록군국]ㆍ阿衡元首[아형원수]”의 양구는
“廿四[입사]……任莫離支[임막리지]……
卅二加太莫離支[삽이가태막리지]”의 양사를 병승(幷承)한 문구니,
이로써 “남생이 32세에 비로소 군국대권을 총괄함”으로
억단함이 불가하니라.
<출처: 연개소문의 사년>

품계品階: <정1품>처럼, 벼슬자리에 대하여 매기던 등급
실직實職: 실제 벼슬(직책)
원모(元謀): 으뜸인 지략
병승(幷承): 하나로묶다, 함께 받다

(옮기면)
대개 ‘太[태]’자의 관명은
삼국시대에 다 공덕 있는 자에게 올리는 등급이요,
실제 직책이 아니니,
『삼국사기』의 직관지에
“문무왕8년, 김유신에게 태대각간 벼슬을 내리고,
그의 전략을 칭찬했다]”라 한바,
김유신이 원래 ‘각간(角干)’으로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였나,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전략을 친찬하여 품계를 증가함인즉,
(연남생의) 태막리지(太莫離支)도
남생의 공을 높인 품계가 됨이 명백하며,
또는 “군사와 국정을 총괄하여-전권을 장악했다”의 2구절은
“24세…막리지에 임명되고…32세에 태막리지를 더했다”라는
두 가지 일을 하나로 연결해서 쓴 문구이니,
이것은 “남생이 32세에 비로소 군국대권을 총괄했다”라는 내용이니
이해에 연개소문이 죽고 남생이 대신 전권을 총괄한거 아닐까?.” 라고
억지로 단정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문에 28세로 적혀있으니
그 부분만 수정하면 문제없고, 그것과는 별개로
연개소문이 연남생의 32세되던해에 죽은것일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해 진다.

선생이 또 다른 잘못된 견해를 소개한다.

혹이 또
“상문에 ‘蓋金[개금] 任太大對盧[임태대대로]’라 하였은즉,
남생이 24세 되던 해에
막리지 연개소문은 태대대로(太大對盧)로 승(陞)하고
남생이 막리지를 임함이 아니냐”하나,
『삼국사기』나 신ㆍ구 『당서』에는 다
연개소문의 부를 대대로라 하였는데,
본 묘지에는
남생의 조태조(祖太祚:淵蓋蘇文[연개소문]의 父[부] ─ 原註[원주])를
막리지라 하고,
『삼국사기』나 신ㆍ구 『당서』에는 다
연개소문을 막리지라 하였는데, 본 묘
지에는 개금(蓋金:淵蓋蘇文[연개소문] ─ 原註[원주])을
태대대로(太大對盧)라 하여 서로 정반대의 기록을 게(揭)하였다.
<출처: 연개소문의 사년>

승(陞):: 승진하다.
게(揭): 표시하다

(옮기면)
또 다른사람은,
“상문에 ‘개금이 태대대로에 임명’라 하였은즉,
남생이 24세 되던 해에
막리지 연개소문은 태대대로로 승진하고
남생이 막리지를 맡은것이 아니냐”라고 말하지만,
『삼국사기』나 신ㆍ구 『당서』에는 다
연개소문의 부를 대대로라 하였는데, 본 묘지에는
남생의 조태조(연개소문의 父[부] ─ 원주)를 막리지라 하고,
『삼국사기』나 신ㆍ구 『당서』에는 다
연개소문을 막리지라 하였는데,
본 묘지에는
개금(연개소문─ 원주)을 태대대로(太大對盧)라 하여
서로 정반대의 기록을 게시했다
<출처: 연개소문의 사년>

막리지는 부친이 죽은후에 물려받는 것인데
기존의 기록이 잘못된것인지 따질 생각은 하지않고
어떻게든 정당화를 시키려고
억지로 말을 만들어내는 역사학자들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승진을 해서 남생이 막리지가 되었다니..
막리지는 부친의 지위를 승계하는 것인데
그것도 무시하고
멋대로 막리지에 임명했다는 해석인데.
그정도로 연개소문이 막장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인가?

관련 기록들을 잠깐 살펴보자.

(642)왕의 동생의 아들 장(臧)을 세워 왕(王)으로 하고,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그 관직은 당(唐)의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중서령(中書令)의 직임과 같다.
(출처: 삼국사기 권 제49열전 제9 개소문)

(642)태대대로(太大對盧) 개금을 보내
〔춘추 일행의〕 객사를 정해주고,
연회를 열어 매우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 출처:삼국사기 > 열전 제1 > 김유신 상>)

(666)개소문이 죽고 장자인 남생이 대신 막리지가 되었다.
(출처:삼국사기 권 제22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당시의 상황도 살펴본다.

용삭 원년(661년)가을, 7월 갑술일에
소정방이 패강에서 고구려를 격파하고,
여러 차례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여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출처: 자치통감 권200~201)

(661)9월에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그의 아들 남생을 보내
정예병 수만 명으로 압록강을 지키게 하니, 여러 군대가 건널 수 없었다.
<중략>
설인귀는 수십 리를 추격하여 3만 명의 목을 베었고,
나머지 군대는 모두 항복하였다.
남생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출처: 자치통감 권200~201)

661년이면,
연남생이 28세로 막리지로 임명된 해이다.
정통사학자들의 주장대로면,
남생이 공을 세우고
연개소문이 관례를 무시하고
자기는 승진해서 태막리지가 되고
아들은 막리지로 임명했다는 것인데..

그 해의 중국기록에는 뭐라고 적혀있을까?
당나라의 기록을 요약하면,

7월에 패강에서 승리하고 평양성을 포위했다.
9월에 압록강을 건너지 못했다. 나중에 이겼다.
연남생은 겨우 살아 도망쳤다.

평양을 포위했는데 압록강을 건너지 못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기록이다.

중국, 일본, 그것을 베낀 우리 정통역사책들이라는 것이
자세히 읽어보면
말이 안되는 내용들을 버젓이 적어놓고
암기하라고 강요한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두문을 통한
당시 관직에 대한 것이다.
다음 편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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