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14(일)역사단편97-고구려이야기2

주말을 맞아 고구려에 관련된
중국역사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본다.

풀이는 <DAUM, 네이버 사전, 위키등>
오늘의 본문은 <신당서>

신당서에서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할 명분이었다고 제시한것이
첫째, 원래 우리땅이다
둘째, 연개소문이 반란을 일으키고 방자하니 징벌을 해야한다.
세째, 천하가 굴복했는데 요동만이 복종하지 않았다.

결국 전쟁을 일으킨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황제가 말하길, "고구려의 땅은 네 개 군에 불과하니,
내가 수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요동을 공격하면
각 성들이 반드시 구원할 것이다.
나는 배를 이용하여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향하는 것이 확실히 쉽다."

고구려의 땅이 네개군四郡에 불과하다?

당태종의 침입과 그 결과를 살펴본다.

19년 2월, 황제가 낙양에서 출발하여 정주定州에 도착하였고,
4월에 군대가 요수遼水를 건너자,
고구려가 모두 성에 틀어박혀 수비하였다.
황제는 군사들을 크게 격려하고,
유주幽州의 남쪽에 진을 쳤다.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맹세하게 하고,
동쪽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개모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2만 가구와 10만 석의 곡식을 얻었다.
그 지역을 개주蓋州로 삼았다.

정명진이 사비성을 공격하여, <중략> 8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유격병이 압록강 상류로 진출하였다.
군대가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사비성이 나오는데 이건 백제의 사비성이 아니다.
압록강의 <상류>로 진출했단다.
압록강은 어디고 상류는 어디인가?
그곳에 요동성이 있어야한다.

황제가 요택에 도착하여,
수나라의 전사들에게 노고를 위로하는 조서를 내렸다.
고려는 신성(新城)과 국내성(國內城)에서 기병 4만 명을 파견하여
요동을 구원하였다.

요동성을 함락시켜서 군사 만 명과 4만 가구, 50만 석의 곡식을 얻었다.
그 지역을 요주遼州로 삼았다.
"처음에 황제는 태자가 머물고 있는 곳에서 신호용 횃불을 하나 설치하고,
요동 지역에 신호용 횃불을 올리기로 약속했다.
그 날 신호용 불길이 국경 안으로 전해졌다."

백애성白崖城을 공격하였는데, 성은 산을 등지고 있으며
절벽과 물이 있어 지형이 매우 험난하였다.
<중략>그 지역을 암주岩州로 삼고, 벌음을 자사로 임명하였다.

고구려의 주요한 성들을 여러곳 함락시켰다.

안시성安市城으로 진군하였다.
이때 고구려 북부의 낙살 고연수와 남부의 낙살 고혜진이
군대를 이끌고 말갈의 병력 15만 명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왔다.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킬때 고씨들을 제거했는데
북부의 고연수가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고 단재가 지적한다.

고연수 등은 상황이 궁지에 몰리자 즉시 항복하였다.
고구려는 크게 놀라서,
후황성後黃城과 은성銀城 두 성이 스스로 퇴각하였고,
수백 리 지역에 연기가 없었다.
이에 황제는 태자에게 급히 소식을 전하고, 여러 신하들에게도 서신을 보내어
"짐이 직접 이와 같이 전투를 지휘하였으니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머물렀던 산을 주필산駐蹕山이라 이름하고,
전투에서의 승리를 그림으로 그리고, 돌에 새겨 그 공을 기념하였다.

"안시성에 10만 명의 군중이 우리 뒤에 있으니,
먼저 그들을 무찌르는 것이 낫다.
그렇게 해서 남쪽으로 몰아가면 만전(萬全)의 계획이 될 것이다."
성 안의 사람들이 황제의 깃발을 보고
소리 지르며 소란을 피우자, 황제는 화를 냈다.

황제는 화가 나서 부복애를 참수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공격을 명령했으나 사흘 동안 이기지 못했다.

황제가 군대를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요遼주와 개蓋주의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군대가 성 아래를 지나갈 때,
성 안에서는 숨죽이고 깃발을 내렸다.
안시성주가 성에 올라 두 번 절을 하였다.
황제는 그들의 수비를 칭찬하며 비단 백 필을 하사하였다.
요주에는 곡식이 아직도 십만 곡이나 있었지만,
병사들이 모두 가져갈 수는 없었다.
황제가 발착수渤錯水에 이르렀을 때,
진흙이 많아 80리 동안 수레와 기병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장손무기와 양사도 등이 만 명을 이끌고 나무를 베어 길을 만들고,
수레를 이어 다리를 만들었다.
황제는 말에 짐을 싣고 직접 일에 참여하였다.

10월에 병사들이 모두 건넌 후, 눈이 심하게 내렸다.
조서를 내려 불을 피워 건너오는 병사들을 기다리게 하였다."

처음 출발할 때 병사 10만 명과 말 1만 필이 있었으나,
돌아올 때에는 병사 중 사망자가 천여 명에 이르고
말은 18마리가 죽었다.
수군은 7만 명이었고, 사망자도 몇 백 명에 이르렀다.

전사자 1천명에 말 18마리가 죽었다?

"황제는 전사한 병사들의 유해를 모아
유성(柳城)에 묻도록 명령하고, 을태뢰(乙太牢)의 예로 제사를 지냈다.
황제가 직접 가서 울었고, 수행하던 신하들 모두 눈물을 흘렸다.
황제는 비기병(飛騎兵)을 이끌고 임유관(臨渝關)에 들어갔고,
황태자가 길 왼쪽에서 맞이하였다."

太牢(태뢰):나라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 소를 통째로 바치던 일.
비기병(飛騎兵): 기병중에서 빠른 병사

빠른 기병의 보호를 받아 ,
임유관으로 도망가기 바빴다는 이야기다.

처음에 황제가 태자와 헤어질 때, 헌 옷을 입고 말하길
"너를 다시 볼 때까지 이 옷을 입겠다"고 하였다.
그 옷은 두 계절을 지나도록 바꾸지 않아 구멍이 났다.
신하들이 옷을 바꾸기를 청하였으나,
황제는 "병사들이 모두 낡은 옷을 입고 있는데,
내가 새 옷을 입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태자가 깨끗한 옷을 올리자 비로소 그 옷을 입었다.

두 계절이라는 것은,
최소 6개월 이상을 말한다.
2월에 정주(定州)에 도착했고,
유주(幽州)의 남쪽에 진을 쳤다.
4월에 요수를 건넜으며
안시성에서 패배한후
임유관(臨渝關)으로 도망쳐온것이 10월이다.

이 전쟁에서 등장한 지명들을 살펴본다.

익숙한 이름으로 안시성, 요동성, 신성, 국내성, 개모성이 있고
압록강, 요수, 발착수 같은 강이름이 있다.
이것들은 이름은 친숙하지만,
실제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숙제다.

그럼 상대적으로 쉬워보이는 지명들을 보자.

정주(定州): 2월에 도착한 장소
요수(遼水): 당나라군이 처음 건너간 강
유주(幽州)남쪽: 당태종이 진을 친 곳
유성(柳城): 전쟁에서 사망한 병사들을 묻을 곳

왜곡이 있지만 지도를 참고해본다.

당태종2.JPG

지도의 하단좌측에 보이지 않는 <장안:당나라수도>에서
화살표가 있는 곳까지 일단 진격을 했다는 이야기다.
그곳의 지도를 살펴본다.
당태종.JPG

1번: 당태종이 도착한 정주

그리고 강을 건넜다.

당연히 그 강이
<요수(遼水): 당나라군이 처음 건너간 강>가 된다.

2번: 당태종이 진을 쳤다는 유주남쪽
유주가 당나라의 영토라면
왜 유주의 남쪽에 진을 쳤을까?

그리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지도에는 '신성(新城)'이라는 표기도 있다.
안시성에서 대 참패를 하고 철수했다.

3번이 유성(柳城)으로 황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다.

이세민과 연개소문의 전쟁터는 어디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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