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부터 압록강까지 11-6 대전전투 이후의 미제24사단

손실 개관

미군은 2주일반동안 30%의 손실
총실종수는 2,400명, 영관급 장교가 가장 많았음
장비는 1개사단을 장비할 만한 양을 상실
매일 평균 6마일을 물러섬
7월 22일 딘 소장이 실종된 후, 처치 소장을 후임으로 임명

인명손실

3,933명의 미제24사단은 1150명의 사상자를 내어 30%의 손실을 당함
48명 전사
228명이 부상
874명이 실종

소총중대는 후위였던 34연대 L 중대가 153명중 107명(70%)의 사상자

장비피해

13야포대대 B포대와 63야포대대 B포대 및 미제34연대 제I중대만 완전
(적이 도로를 봉쇄하기 전에 철수)

35%의 차량만이 구출

사단 병참중대는 34대중 30대의 손실

미제11야포대대 A포대는 155미리 곡사포 전 5문의 손실

미24사단의 문제점

많은 지휘관들이 새로 임명되어 부하들과 사이가 생경
초급장교의 질이 낮았음
초급지휘관의 통솔력 결핍은 무익한 인명피해를 초래
(오히려 고급장교의 수준이 문제였다고 보아야 할 듯)

통신장비의 부족, 특히 유선 통신선의 부족
무전기 건전지는 한두시간이면 소모되어 작전수행이 곤란

탄약부족도 적지않은 난관
60미리 및 4.2인치 박격포탄이 특히 부족

군사지도는 1918-1932년 일본이 제작한 것으로 포병전방 관측자의 조정없이 목표를 사격할 수 없었음

도로 지도도 정확하지 않아 운전에 곤란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3개사단은 특히 전투력이 저하(훈련부족, 정비부족)

보급지원은 원활하지 않았고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품목이 지급되지 않음

딘 장군의 수기내용중 대전전투 상황에 대한 부분(96)

당시의 피아배치는 아주 불명료하였다. 본인이 최후까지 대전에 남아 있었던 몇가지 이유중 첫째는 미 제34연대 및 그에 배치된 전투부대의 사기를 고무하고, 둘째는 한국군 지휘관에게 시범하고 또 한국군에게 전의를 회복시키며, 셋째는 최 전방에 근접하여 북한군의 전투방식을 관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와서 회상하면 지나치게 전방에 근접하였기 때문에 전체적인 상황에 어두워 적이 포위망을 압축하고 있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금산가도를 거쳐 대전을 탈출하여 적의 산병선을 돌파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사건의 전모를 짐작하였다. 적의 포위망의 윤곽은 알 길이 없었고 본인의 유일한 믿음이었던 제34연대는 금산가도가 아니라 옥산을 통해 철수했음을 알았다.

철수로를 금산가도로 택했던 들 아군의 무익한 손해는 적었을 것이다.

회상하면 당시 미제 21연대는 철수로를 확보하고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모양이다. 나의 명령은 옥천 서측방의 감제고지에서 대전동방 및 동북방에서의 적의 침입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의 커다란 두가지 과오는 원래 계획과 같이 7월 19일 밤에 미제34연대를 철수시키지 않았다는 것과 금산가도에 배치되었던 수색중대를 미제34연대에 배속시켰다는 것이다.

<미제1기갑사단의 조기증원으로 전세이전에 도움, 미24사단이나 한국군은 그런 능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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