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록자] Havana Blues #6 – 쿠바, 바라데로

노숙조차 할 수 없게된 바라데로의 방황하는 청춘. 그는 과연 하룻밤을 제대로 보낼 수 있었을까요.

Havana Blues #6 – 쿠바, 바라데로

  • 글/사진 : 이준형, 편집 : 여행기록자


쿠바의 성인, 페드로


바라데로의 밤거리


‘아.. 정말 오늘만큼은.. 오늘만큼은..’

서러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오늘 하루만큼은 내게 편안한 잠자리를 선물해주리라 마음먹었건만,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 없는 이 상황이 정말 미웠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버렸다. 어떠한 의욕도 생기지 않았고 심지어 여행에 대한 의미조차 잊게 할 정도였다. 이전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절망감이었다.

하지만 절망은 절망이었고 현실은 금방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미 땅거미가 짙게 깔린 바라데로의 길거리는 인적이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노숙 준비를 하지 않으면 까마득한 상황이 될 게 불 보듯 뻔했다. 많은 고민을 했지만, 쿠바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노숙을 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용기를 내기로 했다. 내 앞을 지나는 모든 이들에게 하룻밤 거처를 구걸했다.

물론 결과는 뻔했다. 사실 쿠바에서는 허가받지 않은 민간인이 외국인을 재워주는 것은 불법이다. 사람들이 나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도 하나같이 난색을 보였던 것은 이 때문이다. 얼마간의 시도 끝에 나는 구걸을 단념했다. 터미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위를 둘러보다 그나마 안락해 보이는 나무를 찾았다. 그 아래 침낭을 깔고 짐을 풀어서 대충 잘 준비를 마쳤다. 한숨이 푹푹 나왔다. 그런데 딱 봐도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중년 부부가 두 손을 꼭 잡고 내 앞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정말 딱 한 번만 더 해보고 안 되면 깨끗이 포기하자’

나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중년 부부에게 쭈뼛쭈뼛 다가가 최대한 예의를 갖춰 말을 꺼냈다.

‘저.. 저는 쿠바를 여행 중인 청년입니다. 오늘 당장 잘 곳이 없어 그러는데 하룻밤만 저를 재워주실 수 있을까요?’
‘저런… 많이 힘들었겠구나. 저녁은 먹었니?’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분명 하루를 신세 질 수 있겠냐고 물어봤는데 저녁밥을 먹었냐니… 이렇게 따뜻한 대답은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따뜻함에 감동한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호텔 같은 집은 아니지만 너 재워줄 침대 하나 정도는 있어. 따라오렴’


절망의 늪에서 나를 건져준 쿠바의 성인 페드로와 그의 아내 산드라. 나를 정말 친아들 이상으로 아껴주었던 잊지 못할 분들이다


파란 눈동자를 가진 선한 인상의 그가 들려준 답변은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숙박 때문에 전전긍긍했던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고,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이면서 눈물이 났다. 페드로는 나의 격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가득 띤 채 내 가방을 둘러메고 앞장섰다.

‘어쩌다 밥도 못 먹고 이 시간에 그러고 있었던 거야?’
‘여행 비용이 충분하지 않은데도 무작정 쿠바로 왔어요. 바라데로의 숙박비는 너무 비싸더라구요. 결국 이 신세가 되었네요.

페드로는 나의 여정을 듣고 딱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집으로 안내했다. 페드로의 집 깔끔한 아파트였는데, 쿠바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가전제품들과 가구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냉장고에는 먹을거리가 가득 채워져 있었고 에어컨은 세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를 품어주었던 페드로의 아파트. 호텔 부럽지 않은 시설 속에서 정말 좋은 사람들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페드로는 어서 내게 샤워를 하고 오라며 수건과 세면도구 몇 개를 내 손에 쥐여주었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는 동안 오늘 겪었던 수많은 일과 감정들이 씻기는 것 같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음식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아내인 산드라가 나를 위해 급하게 저녁을 차려놓고 있었다.

산드라가 나를 위해 요리해준 쿠바식 치킨 요리와 따말레스(옥수수가루 반죽 요리), 포테이토 매쉬. 너무 오랜만에 받아 본 따뜻한 밥상이었다


‘급하게 요리한다고 이 정도밖에 못 해줘서 미안해. 그래도 맛있게 들어’

나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허겁지겁 밥을 마시기 시작했다.

‘정말 맛있어요. 최고예요!’

금세 먹어 치우는 나를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산드라와 페드로는 계속해서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잠시 후 기분 좋게 배부른 상태가 되었다.


쿠바에 가족이 생겼다


‘다녀왔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내 또래쯤 되어 보이는 한 무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인사해! 나의 아이들과 친구들이야’

당황해서 눈을 끔벅이는 나에게 페드로는 그의 아들과 딸 그리고 친구들을 한 명 한 명 소개해 주었다. 그들 역시 나만큼 적잖이 당황스러워했다. 그들의 눈동자에서 ‘어떻게 동양인이 우리 집에서 밥을 먹고 있지? 라는 생각을 쉽게 읽어낼 수 있었다.

‘안녕! 나는 한국에서 온 준이야 (발음상의 이유로 준이라고 알려주었다.) 만나서 반가워!’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페드로는 아이들에게 지금까지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페드로는 적지 않아 보이는 돈을 그의 사위인 프랭크에게 건네며 말했다.

‘너희들이 쿠바를 여행 중인 준에게 잊지 못할 밤을 만들어 주렴.’

프랭크는 나를 바라보며 눈을 찡긋하더니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경쾌한 목소리로 ‘Vamos!’ (가자고!) 라고 외쳤다. 이 어리둥절한 상황 속에서 난 페드로에게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페드로는 나를 안아주며 좋은 친구들과 즐겁게 놀다 오라고 했다. 프랭크, 안나, 수아레즈, 우고, 미치의 손에 이끌려 그들을 따라갔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바라데로의 밤거리는 혼자 헤매던 아까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세상 어느 풍경보다도 아름다웠다. 아까 그 거리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앞에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프랭크는 ‘준이 우리 가족이 된 걸 기념하는 의미에서 맥주 한잔 하자!’고 제안했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 ‘Vamos’를 외쳤다. 모두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우리는 화려한 밤거리를 가로질러 바라데로의 라이브클럽인 ‘The Beatles’에 도착했다.

바라데로의 유명한 라이브클럽인 ‘The Beatles’에서 즐거운 시간 왼쪽부터 수아레즈, 미치, 우고, 프랭크, 안나


클럽 안에 들어와 보니 한 시대를 풍미했던 미국의 로큰롤이 흘러나왔고,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는 사람들은 죄다 북미에서 온 관광객들뿐이었다. 아이러니했다. 쿠바에 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생기는 변화 중 하나겠지만, 쿠바의 예술적 유산마저 사라지는 건 아닐까 싶은 괜한 걱정이 일었다. 부디 새로운 변화가 쿠바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길 바란다.

‘준, 여기 어때?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왔는데 마음에 들어?’
‘정말 좋아. 그런데 여기가 쿠바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어. 하하하’

우리는 영어로 된 노랫말이 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그렇게 한바탕 놀고 난 뒤 프랭크는 ‘이제 밤이 깊어졌으니까 집에 가서 한 잔 하자’ 라고 제안했다. 다시 집에 도착한 우리는 테이블에 둘러 앉아 서로에 대해 궁금했던 질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쿠바는 며칠째인 거야?’
‘쿠바에 나쁜 사람은 없었어?’
‘한국은 어디에 있는 나라야?’

호기심에 그들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언어 문제로 긴 대화가 어려울 뻔했지만, 프랭크가 영어로 통역을 도와주어 순조롭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아바나 대학을 재학 중인 프랭크는 나의 가이드와 통역을 자처하며 쿠바의 문화, 정치, 사회문제 등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도미노. 쿠바의 국민게임이다


나에 대한 궁금증들이 어느 정도 해소되고 우리는 럼을 몇 잔 마셨다. 잠시 후 미치, 수아레즈, 우고, 안나는 곧 잠에 들었고 나와 프랭크 둘만이 남게 되었다. 프랭크와 가벼운 대화를 하며 술잔을 주고받는데, 프랭크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준, 아까 장인인 페드로가 너를 최대한 도와주라고 했어. 너를 처음 만나고, 너를 도와주고, 너가 그에게 아버지라고 불렀을 때부터 그는 너를 아들로 받아들였다고 했거든. 페드로의 아들이면 넌 나의 형제이기도 해. 남은 시간 쿠바에서 너의 든든한 편이 되어줄게. 잘 부탁한다 동생아.’

말을 마친 프랭크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나 또한 새로운 가족이 된 프랭크에게 악수를 청하며 이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이루어진 이 기적과도 같은 일들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이었다.

무더운 한여름 밤에 맺어진 형제의 인연. 프랭크와 나


그렇게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누다 프랭크의 ‘내일을 더 기대하라’고 말을 끝으로 잠을 청했다. 길었던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오늘 하루, 나를 스쳐 갔던 수많은 인연과 지금 나와 함께 하는 모두를 떠올리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침대는 푹신했고 머리맡에선 에어컨이 시원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더 이상 부족할 게 없었다.

쿠바에 가족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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