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14 ○ 너와 내가 깨뜨리단 만 침묵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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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ston de la Touche 'Derrière le vitrail'

사랑의 가장 좋은 순간은
사랑한다고 말할 때가 아니다
그것은 어느 날 깨뜨리다 만
침묵 바로 그 속에 있는 것
─ 쉴리 프뤼돔 '사랑의 가장 좋은 순간' 中

여기서 내가 계속 되뇌었던 부분은 침묵을 '깨뜨리다 말았다'. 즉 마음을 온전히 '펼치려다 말았다'는 것인데 이 순간을 '본다'면 어떤 모습일까?

올해에 본 꽃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3월 말쯤 밤길에 본 흰 매화였다. 옆옆동네에서부터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어떤 아파트 단지 앞에 덩치가 제법 큰 매화나무들이 있었다. 앙증맞게 가지에 붙은 흰 뭉치들은 제각각 모습이 달랐다.

만개한 꽃들도 있고 한 두 잎 살짝 벌리기 시작하는 꽃들, 아직 봉오리만 져있는 꽃들. 한 시야 안에서 하나의 꽃이 개화하기까지의 과정을 3단계로 한꺼번에 볼 수 있었다.

걷는 내내 나는 도로를 등지고 그 나무들만 쳐다보았다. 길가에 가족들만 있어서 조심스레 마스크를 벗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손은 추워서 팔짱을 끼고 있었지만 만개한 꽃들 주변에서 흐르는 은은한 매화향이 차가운 밤공기와 섞여 기분이 말랑말랑해졌다.

"이제 곧 봄이 오려나 보다."

우리는 만개한 꽃을 보며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만개한 꽃들보다 더 많은 꽃봉오리들을 보며

"왜 넌 아직 자라지 않았지?"

하며 닦달하지 않는다. 빨리 너도 너를 보여주라고 나무라지 않는다.

만개한 꽃들의 어렴풋한 향 속에서 피기를 기다리는 꽃의 내일을 상상해 본다.

기대되고 예감되는 너의 내일
하지만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고
코끝에 설렘만 남겨 맴돌면서
은근히 내 마음으로 스며들어
계속 뒤돌아보게 만드는
머지않아 주변을 자기로 덮을
그 무르익은 향을 품은 작은 봉오리가 바로 '말하지 않는 설렘'.

내 기억에 남은 3월 밤의 매화는 자신의 향을 숨기고서 빛나는 그 하얀 꽃봉오리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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