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고대 - 우리는 고대사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했나?

in #histroy6 years ago (edited)

한중일 3국의 역사 교과서는 치열한 정치적인 투쟁의 산물이다.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통해 한국의 강제 병합을 합리화하는 논리로 사용했다. 중국은 초원 민족의 역사를 자국의 현대 국경선을 기준으로 자국의 역사로 편입했다.

이런 역사 공정은 필연적으로 동북아 3국에게 불편한 아젠다를 제공한다.

만들어진 고대.jpg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비석은 1900년 경의 제국주의가 팽배하던 일본이 원하는 해석의 틀을 제공했다. 한문에서 기본적으로 주어를 당연히 서술자의 입장에서 기술해야하지만, 일본의 어용학자들은 '왜'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특이한 점은 일본 육군 참보본부에서 광개토대왕 비문을 연구했다는 것이다.

문제의 대목은 이렇다

신묘년 기사
"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 □는 훼손된 문자 )

제국주의 일본에게 유리하게 해석된 이 비문은 일본으로 밀반출하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이런 역사 데코레인션에 대한 반동은 위당 정인보 선생이 새로운 가설을 세웠다. 나는 한문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문장을 작성한 '고구려'의 입장에서 서술해야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그리하여, 왜는 일찌기 신묘년에 (고구려에 가서 침범하고) (고구려도 또) 바다를 건너 (왜를) 무찌르고, 백잔(백제)은 (왜와) 내통하여 신라를 침범 했다. (태왕, 광개토왕은) 신민(인 백잔과 신라가 왜 이런 일을 하는가)이라고 생각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천년의 시간 동안 마모가 된 비석에 탁본을 뜨기 위해 행했던 파괴의 흔적과 고의적인 탁본 글자의 위변조였다. 일본이 고고학에서 지금 신뢰를 잃은 것처럼 이런 25자의 위변조는 신뢰의 문제가 되었다.

광개토대왕 비.jpg

광개토대왕비를 해석은 시대가 감에 따라 달라졌고 전체적인 문맥, 시대 상황, 텍스트 해독, 동북아시아 당시 한문 사용의 연구가 뒷받침됨에 따라 달라졌다.

저자는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인으로 다양한 해석의 텍스트로 광개토대왕의 비와 발해사를 탐구했다. 이런 다양한 관점과 시대적 관점에서 왜 이런 텍스트가 비문에 적혔는지, 발해를 우리 민족으로 봐야하는지, 아니면 요동의 독자적인 역사를 봐야하는지에 대해서 담론을 펼쳤다.

우리가 '고대'사를 볼 때 누군가의 편집을 거치고 의견이 덧붙여진 것이다.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이웃 나라와 평화를 갈구하고 갈등을 봉합하며 더 좋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역사'라는 해석은 동양 삼국이 공통으로 인식을 합치시켜야할 것이다.

testcode~

참고: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4750&cid=40942&categoryId=4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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